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65화 (65/200)

제65화.

“궁금한가요?”

“네, 인테리어는 다 끝났는데, 아직 열지 않은 박스가 하나 남아있으니까요.”

서인우가 빨간 벽돌로 쌓은 벽 한가운데 만들어놓은 네모 반듯한 공간으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 저 공간은 왜 만든 건가요?”

“그 답이 바로 이 박스에 담겨 있어요. 이건 제 선물입니다. 한 번 열어보세요.”

선물이라는 말에 이준형의 손이 재빨리 움직였다.

박스를 열자 안에 뽁뽁이로 쌓인 장식품 같은 것이 두 개 보였다.

길게 전선이 연결된 모습이 언뜻 봐서는 뭔지 알아보지 못할 모습이었다.

“그거 둘이 하나씩 들고 밖으로 나와보세요.”

제시카를 따라 뽁뽁이로 쌓인 장식품을 들고 아직 페인트와 본드 냄새 등이 남아있는 폴딩도어로 향했다.

“여기 네모난 곳 안에 이렇게 콘센트가 매립되어 있어요. 우선 하나 여기 꽂아 보세요.”

서인우가 들고 있던 장식품의 뽁뽁이를 벗기고 전원을 연결하자 빨간 불이 활활 타고 있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이게 요즘 유행하는 불멍 조명이에요. 겨울에 따뜻한 느낌을 줄 수 있어요.”

“정말 멋진데요? 마치 벽난로처럼 느껴지네요.”

“빙고. 내가 노린 게 바로 벽난로에요. 실제 벽난로 설치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나가니까 조명으로 대리만족 하는 거죠.”

“진짜 근사합니다.”

제시카가 전원을 빼서 다시 서인우에게 돌려준 후, 이준형을 향해 손짓했다.

“이번엔 그거 한 번 꽂아 보세요.”

이준형이 잽싸게 뽁뽁이를 벗기고 전원을 연결하자 이번에는 하얀 눈이 내리는 조명이 근사하게 펼쳐졌다.

“이건 여름용. 더울 때 눈 내리는 풍경을 볼 수 있다면 시원하게 느껴지겠죠. 겨울 생각도 나고 말이죠.”

“정말 그럴 것 같은데요. 둘 다 너무 멋있고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선물로는 너무 과한 것 같은데요. 인테리어 비용도 최소로 잡아 주신 거 아는데...”

“맞아요. 사실 잘 보이려고 뇌물 쓰는 거예요. 앞으로 또 찾아 달라는 뜻이라고 할까?”

“당연히 또 인테리어 할 일 있으면 무조건 제시카 씨랑 합니다. 그래도 선물이 너무 과해요.”

제시카가 배를 한 번 쓱 만지더니 고개를 들어 시계를 봤다.

“부담 느끼시라고 드리는 겁니다. 저 장식품 볼 때마다 잊지 말고 기억하시라고요. 일종의 영업이죠. 그럼 저는 사라지겠습니다.”

서인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치킨에 맥주 한잔하고 가실래요? 선물에 대한 답례입니다만.”

제시카의 답도 아직 듣지 않았는데, 이준형의 입이 또 헤벌쭉 벌어졌다.

“감사합니다만 약속이 있어서요.”

“아, 그럼 다음기회에...”

“그럼 약속을 다음 기회로 하고 지금 출발 할까요?”

“네?”

500짜리 생맥주 세잔, 후라이드 치킨과 골뱅이, 서비스로 주는 과자와 치킨 무가 테이블에 가득했다.

“점심을 적게 먹었는지 배고파 죽는 줄 알았어요.”

절대 적게 먹지는 않았을텐데...

어이가 없었지만, 찔끔찔끔 먹는 것보다 훨씬 보기는 좋았다.

“제시카 씨는 외국 어디서 살다 오셨어요?”

“독일이요.”

“그럼 독일에서 인테리어를 전공하신 거군요?”

골뱅이와 소면을 동시에 집어 입에 넣으며 이준형이 물었다.

“제 전공 들으면 두 분 다 깜짝 놀라실텐데...”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켠 제시카가 오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처음부터 너무 많은 걸 알면 재미없죠. 우리가 인연이 되면 자주 볼 일이 생기지 않겠어요?”

분명 제시카의 말속에는 영업적인 뜻이 잔뜩 담겨 있었다.

단 한 사람 이준형만이 완전히 개인적인 뜻으로 받아들인 듯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인연?

연인이 되는 인연일까? 아니면, 설마 가족이 되는 인연?

혼자 또 김칫국을 한 사발 드링킹하고 있을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때 열심히 닭다리를 뜯고 있던 제시카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액정이 뱉어내는 이름을 확인한 제시카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잠시만요, 통화 좀...”

호프집 문을 급히 열고 나온 제시카가 전화를 받았다.

“오늘 못 가고 내일 일찍 간다고 문자 넣었잖아요?”

-서원이 너, 도대체 요즘 어디서 뭐 하고 다니는 거냐? 회사로 나오기 싫으면 집으로라도 오라고 했더니...

“일하느라 바빴어요.”

-일? 정말 레슨 시작한 거야? 그까짓 애들 코 묻은 돈 받아서 평생 먹고살 작정이냐?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일 한단 말이에요. 다음에 찾아뵙고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그렇게 알고 끊습니다.”

종료 버튼을 누르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대화의 온도가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

얼떨결에 같이 술까지 마시게 됐지만, 아마 저들이 보여주는 따뜻함 때문이 아닐까?

평생 가족들에게 느끼지 못했던 사람 냄새.

저들과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르게 편안했다.

밥을 먹어도 커피를 마셔도 뭐든 맛있고 맘껏 먹을 수 있었다.

사람을 대하는 진심이 느껴졌다.

그런 그들과 섞여 같이 일하고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가슴 한쪽에 자리 잡는 밤이었다.

* * *

드디어 박정원이 하는 프로그램 동네 식당에서 [서풍 TWO]를 찍는 날이다.

녹화를 위해 많은 스텝과 촬영 도구들이 작은 가게에 가득했다.

한참 녹화 준비로 정신없는 가게에 박정원이 모습을 나타냈다.

담당 피디가 먼저 다가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인우야. 저거 봤냐? 역시 대세는 다르다.”

“요리 실력, 사업 능력 거기다 인간성까지 이미 모든 걸 인정받은 사람이다. 우리의 롤모델이라고 할 수 있지.”

“정말 부럽다. 우리도 오늘 촬영 잘해서 꼭 성공하자.”

담당 피디와 다른 스텝들 하나하나 인사를 건넨 박정원이 서인우를 향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준비는 잘했지? 평상시처럼 보여주는 게 중요해. 요즘 시청자들은 워낙 똑똑해서 가식적인 방송이나 거짓 방송 다 귀신같이 알아봐.”

“네, 저희의 진정성을 보여 드릴 겁니다. 새벽 시장 가서 재료 구매하는 장면은 내일 찍기로 했습니다.”

“그래, 서인우가 요리에 얼마나 진심인지, 어떤 놀라운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이번 기회에 제대로 보여주라고.”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준비가 얼추 끝나고 녹화가 시작되었다.

박정원이 시장 초입을 향해 걸어 들어오면서 멘트가 시작됐다.

“지금 저는 여기 시장 쪽으로 가다 보면 보이는 작은 중식당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저 앞에 추억의 천막이 눈에 확 띄는 가게가 보이시죠?”

카메라 감독이 빨간색과 하얀색, 초록색이 어우러진 천막으로 시작해 제시카가 선물해준 불멍 인테리어 조명과 포인트 등을 하나씩 보여주었다.

그리고 서서히 가게의 간판으로 다가간 카메라 감독이 [서풍 TWO]라는 간판을 크게 확대해서 잡았다.

“여기가 바로 지난번 [중화요리 최고의 고수를 찾아서]라는 요리 경연대회에 최종 우승을 차지한 서인우 셰프가 운영하는 가게입니다.”

가게의 입구로 들어가는 박정원을 카메라 감독이 그대로 따라가며 찍었다.

“그런 큰 방송 프로그램에서 최종 우승한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치고는 너무 소박하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박정원의 멘트를 이어받아 카메라 감독이 가게의 내부를 천천히 보여주었다.

명찰과 앞치마를 단정하게 갖춘 정다운과 이준형의 모습도 잊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다.

어색하지 않게 각자 하던 일을 의식하지 말고 하라 했지만, 평범한 사람의 방송 출연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둘 다 진땀을 흘리는 게 느껴졌다.

“아주 아담하죠? 이번에는 최종 우승자 서인우 셰프가 요리하는 주방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박정원이 주방으로 들어가자 서인우는 필살기인 중식도 솜씨를 맘껏 펼쳐 보였다.

빛보다 빠른 속도로 양파와 양배추를 써는 모습이 여과 없이 카메라에 잡혔다.

“역시 중식도를 다루는 솜씨는 요리 인생 30년인 저도 못 따라갈 수준입니다. 그럼 요리를 주문해 보겠습니다.”

다시 홀로 나온 박정원이 카메라가 세팅된 테이블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정다운이 메뉴판을 가지고 박정원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여기 저희 가게 메뉴판입니다.”

메뉴판을 손에 들고 있던 박정원이 벽에 걸려있는 메뉴판으로 시선을 돌리며 손짓을 해 보였다.

“지금 보이는 이 메뉴판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서풍]에 있던 바로 그 메뉴판이죠. 과연 요리 대회 때처럼 맛도 똑같을지 다시 한번 먹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박정원이 이준형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이 식당에서 제일 유명한 메뉴가 뭔가요?”

“이전 [서풍]의 인기 메뉴였던 양장피와 [서풍 TWO]의 대표 메뉴인 오징어 먹물 만두입니다.”

“그럼 그렇게 두 가지 부탁합니다.”

주문을 받아 주방에 걸어두자 서인우의 요리가 바로 시작됐다.

이때부터 서인우가 요리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

양장피 요리는 요리 경연대회 방송을 본 사람들이라면 익숙하겠지만, 이번에 새로 개발한 메뉴인 오징어 먹물 만두는 모든 시청자에게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었다.

서인우는 중식도와의 합작품인 두 요리를 근사하게 만들어 큰 접시에 담아서 나왔다.

박정원이 카메라를 가까이해 음식을 자세히 찍어 보였다.

“[서풍]의 양장피는 특징을 가지고 있죠. 따뜻한 재료와 차가운 재료가 한데 어우러져 있고, 각각 식감을 다 느낄 수 있는 음식입니다.”

박정원의 멘트가 끝나자 서인우가 소스를 뿌려 바로 비벼 주었다.

그리고 나서 박정원이 잘 버무려진 양장피를 크게 떠서 앞접시에 담은 후 바로 집어 입에 넣었다.

“이 식감을 느끼고 나면 바로 앞에서 비벼주는 소스 맛을 이어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천천히 음미하는 모습을 보여준 뒤 박정원이 서인우에게 물었다.

“해물이 아주 싱싱한데요. 재료는 어디서 어떻게 구매합니까?”

지금이다.

이 방송을 하게 된 목적.

억울한 누명을 벗을 기회.

서인우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는 매일 새벽 4시에 수산시장에 가서 그날그날 제일 좋은 해물을 사서 요리를 합니다. 그날 재료는 그날 다 소진하는 게 제 요리 철칙입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말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월요일이 저희 가게 휴무입니다. 그날은 제 몸 밧데리 충전하는 날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영업일에는 무조건 새벽 시장부터 일과가 시작이겠네요?”

서인우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저희 아빠 서동수 셰프님 때부터 단골로 다니셨던 수산시장의 오사장님 가게에서 매일 새벽에 그날 들어온 싱싱한 재료를 사는 게 하루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서인우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지금 서인우 셰프의 얼굴이 어두워졌는데요?”

“최근에 저희 가게에서 바로 이 양장피를 먹고 장염이 심하게 걸렸다는 손님이 계셨습니다. 그 영상이 인터넷에 떠돌았죠.”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박정원도 방송을 오래 해서 그런지 이제 거의 배우나 마찬가지였다.

자연스러운 표정과 말투에 서인우도 깜빡 속을 만큼.

“저희는 그 손님이 걱정되기도 하고, 한 번도 싱싱하지 않은 재료로 요리를 해본 적이 없는데 이상하기도 해서 가게 CCTV를 다 뒤졌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찾지 못했습니다.”

“희한한 일이군요. 여기서 요리를 먹고 장염이 걸렸는데, 어떻게 가게 CCTV애는 잡히지 않는 걸까요? 빨리 진실이 밝히길 바랍니다.”

이 얘기를 오래 끌면 오히려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박정원의 충고에 따라 화제를 오징어 먹물 만두로 바꿨다.

“이 시커먼 만두는 시청자분들에게는 생소할 텐데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선 하나 드셔보세요.”

박정원이 만두를 반으로 갈라 카메라에 속을 자세히 보여준 뒤 바로 입에 넣었다.

베테랑인 그의 얼굴에 자기도 모르게 놀란 표정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