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여기 빵 진짜 죽음이에요. 여기 여기 봐봐요.”
제시카가 갑자기 입술을 뒤집어 까 보였다.
“네?”
“너무 맛있어서 입술 깨물었어요. 피 나고 아파도 너무 맛있어.”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이 보는 사람마저 기분 좋게 만들었다.
“커피도 잘 마시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휴무일이라 혼자 나오셨나 보네요?”
아차차.
하마터면 이준형한테 맞아 죽든 볶여 죽든 할뻔했다.
“아니에요. 한 명 더 나올 겁니다.”
얼른 답을 내놓고 바로 이준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늦잠을 자고 있는지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았다.
[오늘 인테리어 작업한단다. 제시카 씨 가게에 와있다.]
전화도 하고 톡도 남겼으니 할 만큼 했다.
다시 여유로운 마음으로 커피를 마시고, 고소한 빵을 크게 뜯어 입에 가득 넣었다.
씹을수록 왜 제시카가 입술까지 깨물었는지 알 것 같았다.
각종 견과류와 건포도, 크랜베리가 잔뜩 들어가 고소함과 달콤함이 입안에 가득했다.
양쪽 볼이 햄스터가 된 제시카가 밖에 들리는 차 소리에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왔다. 이제 작업을 시작해 볼까요?”
목장갑을 손에 끼고 업체 직원들에게 이것저것 설명하며 작업하는 모습이 힘들고 거친 일이지만 즐거워 보였다.
가냘픈 몸에 덩치 크고 힘센 인부들을 지휘하는 모습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밖에서 한창 일하는 제시카를 지켜보다 아직 아무 연락이 없는 이준형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한참 신호음이 들리다 막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 하는데 이준형의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죽을래? 쉬는 날 이렇게 일찍 왜 깨워?
“그럼 끊을까? 지금 제시카 씨 와 있는데?”
-어디? 우리 가게에? 왜? 언제부터?
갑자기 말이 빨라진 이준형이 여러 번 헛기침으로 잠긴 목을 풀었다.
“문자 봐봐, 오늘 인테리어 공사한다고 했잖아. 9시부터 시작했으니까 빨리 튕겨 나와.”
-알았어. 끊어.
채 30분도 되지 않아서 이준형이 가게에 도착했다.
최대한 꾸안꾸 패션을 의도한 듯 했지만, 과하게 넘긴 앞머리, 잘 입지 않는 하얀색 남방셔츠와 카디건이 매일 보는 인우의 눈에는 신경을 쓴 티가 났다.
“제시카 씨, 수고가 많네요. 제가 뭘 좀 도울까요?”
“안녕하세요. 지금 하실 일은 없어요. 나중에 도움 필요할 때 말씀드릴게요.”
제시카가 방긋 웃어 보이자 항상 그랬듯이 입이 귀에 걸린 이준형이 알겠다고 답하고는 계속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안에 들어가 있자. 일 방해 되겠다.”
“어? 어. 그래.”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재빨리 테이블 스캔을 마친 이준형의 귀에 걸렸던 입이 한 움큼 뾰로통하게 나왔다.
“커피잔이 두 개, 그중 하나는 방금 본 제시카 씨 입술 색과 같은 색이 묻어있는데...둘이 커피 마셨냐?”
“아침 식사 못 하고 왔을 것 같아서 빵 사 와서 커피랑 먹었어.”
“단둘이?”
“네가 전화를 안 받아서.”
“우리 엄마한테 전화해서 물이라도 한 바가지 뿌려서 깨우라고 했어야지. 그래서, 둘이 무슨 얘기 했는데?”
“아주 중요한 얘기.”
이준형의 눈에 레이저가 발사됐다.
“무슨 얘기?”
“갑자기 나한테 속살을 보여주더라. 그래서 어디서도 구하지 못할 중요한 정보를 알려줬지.”
“뭐? 속살을 보여?”
서인우는 실시간으로 변하는 이준형의 표정을 보는 재미에 계속해서 장난을 이어갔다.
“응, 그래서 내가 아무한테나 알려주지 않는 일급정보를 알려줬다는 거 아니냐.”
이제 이준형은 자기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칠 것이다.
혼자 별의별 상상을 다 했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이준형이 잠시 후 뭔가 깨달은 듯 서인우를 노려봤다.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바보. 하하하.”
크게 한바탕 웃고는 제시카가 빵을 맛있게 먹다 입술을 깨물어 속살을 뒤집어 보여준 일이며, 그 빵집 위치와 전화번호를 알려준 일등을 얘기해 주었다.
둘이 느긋하게 웃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이 [서풍 TWO]의 입구가 점점 근사하게 변해갔다.
말로만 듣던 폴딩도어가 조금씩 윤곽을 보이기 시작하자, 제시카의 얼굴이 점점 붉게 상기되기 시작했다.
“여기 나와서 한 번 보세요. 겨울에는 이렇게 쫙 펼쳐서 문을 닫아 놓으면 되구요, 여름엔 이렇게 접으면 확 트이고 시원한 입구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정말 실용적이고 근사한데요?”
“그렇죠? 오후에 천막 설치까지 완성하면 더 근사할 겁니다. 저는 이분들하고 식사하고 올 테니까 나중에 봐요.”
이준형이 서인우에게 노골적인 눈짓을 했다.
‘뭐해? 같이 가자고 해!’
아무런 반응이 없는 서인우를 향해 이준형이 복화술을 시도했다.
“우리가 점심 사드린다고 해.”
등 뒤에 딱 달라붙어서 조르는 모습이 마트에서 장난감 사달라는 유치원생 같아 보였다.
“저희랑 같이 가시죠. 애쓰셨는데 저희가 밥 사겠습니다.”
“그럼 그럽시다.”
업체 직원 중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가 목장갑을 벗어 바지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러실래요, 사장님? 그럼 저 시장 안에 있는 순댓국 콜?”
순댓국 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거라고 믿기지 않겠지만, 분명 제시카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순댓국 좋지. 내장 팍팍 넣어서.”
업체 인부 둘과 제시카 그 맞은 편에 이준형 그리고 서인우 이렇게 다섯이 큰 테이블에 앉았다.
“이모, 여기 순댓국 특으로 다섯 개. 맞죠?”
제시카가 능숙하게 주문을 하며 예의상 앉아 있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그렇지, 특으로 먹어 줘야 또 가서 힘쓰지.”
인부 하나가 순댓국보다 더 걸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인우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준형을 쳐다봤다.
“좋죠. 아침도 안 먹었는데 맛있겠다.”
말을 하는 이준형의 이마에 왠지 모를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것 같았다.
뿌연 국물에 순대, 각종 내장, 고기 등이 듬뿍 담겨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각자 스타일에 맞게 산더미 같이 다진 파와 부추를 넣고, 새우젓을 넣었다.
빨간 다대기 양념을 넣은 인부들과 달리 제시카는 뽀얀 국물 그대로 들깻가루만 왕창 넣었다.
이준형의 순댓국은 처음과 완전 다른 메뉴로 변신 중이었다.
깍두기 국물과 파, 고추, 부추를 몽땅 때려 넣어 넘칠 듯 만든 이준형이 보란 듯이 밥을 말았다.
“저 젊은 사장이 순댓국을 무지 좋아하나 보구만. 그럼 나도 말아서 본격적으로 먹어볼까?”
인부 한 명이 밥을 말더니 숟가락 가득 퍼서 입에 넣었다.
“아, 좋다.”
서인우가 계속 걱정스럽게 쳐다보자 이준형도 크게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꿀꺽.
또다시 크게 떠서 꿀꺽.
뭔가 이상하다 싶어 자세히 보니 입에 넣고 다음 단계가 빠졌다.
씹지 않고 그냥 하수도에 음식 버리듯이 쑥쑥 밀어 넣고 있었다.
“천천히 먹어요. 그러다가 체하겠어요. 순댓국을 나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으네.”
제시카가 물잔을 밀어주며 웃었다.
“넹, 등등하고 맛있지 앙슴니까?”
말하는 이준형의 코가 콱 막혔다.
“푸흡.”
결국 참고 있던 서인우의 입에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저놈 지금 숨 안 쉬고 있네. 완전 코 막힌 소리 작렬이다.’
아무래도 가게로 돌아가는 길에 약국에 들러야 할 것 같다.
돌도 씹어 먹게 생긴 이준형은 외모와 반전 식성을 자랑했다.
청국장이나 시래기 된장국같은 메뉴는 환장하고 좋아할 것 같이 생겼지만, 냄새난다고 절대 입에 대지도 않는다.
가장 좋아하는 메뉴가 스파게티와 피자라고 하면 그를 아는 사람 열이면 열 다 웃었다.
든든하게 점심을 먹고 옷에서 나는 꼬리꼬리한 냄새를 즐기며 가게로 향했다.
“맛있는 커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나머지 작업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거 완전 풀 서비스네.”
길모퉁이에서 식후 담배를 즐기는 인부 둘을 제외하고 서인우와 이준형 그리고 제시카는 먼지가 나는 곳을 피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이준형 씨는 괜찮아요?”
“네?”
“순댓국 못 먹죠? 중간에 말리려다가 그냥 모른 척했어요.”
“그걸 어떻게...”
제시카가 역시 하는 표정으로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외국 가기 전 고등학교 때 오빠가 일부러 순댓국을 사줬어요. 내가 못 먹는 거 알고 놀리려고.”
“그래서요?”
“뭐 오늘 이준형씨처럼 거기 있는 모든 걸 다 때려 넣어서 오기로 먹었죠. 그리고 배탈이 나서 이틀 고생했어요.”
이준형이 슬그머니 손을 올려 배를 문질렀다.
“그럼 오늘도 일부러 드신 거예요?”
“아니에요. 외국에서 입맛이 변했죠. 나이가 든 걸 수도 있구요. 지금은 아무것도 넣지 않고 그 본연의 맛을 즐길 정도로.”
그렇게 피나는 노력을 했건만 결국 다 들켜버린 이준형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내가 좀 귀하게 자라서 냄새가 강한 음식을 잘 못 먹어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는 얼굴은 전혀 귀해 보이진 않았다.
울렁거리는 이준형의 속을 개운하게 가라앉혀 줄 커피를 들고 서인우가 다가왔다.
“음, 커피 향 정말 좋다. 내꺼 빨리 줘라.”
시원한 아이스 커피를 원샷으로 들이붓는 이준형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커피 잘 마실게요. 그럼 저는 다시 현장으로 갑니다.”
휴무일 하루 만에 작업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부담이 잠시 앉아 있을 여유를 주지 않는 듯했다.
오후에 전기를 맡은 새로운 인원이 하나 더 투입되었다.
곧이어 밖에서 요란한 기계 소리와 뚝딱뚝딱 망치 소리가 들렸다.
“속은 괜찮냐?”
“이 커피가 살렸다.”
“우린 방송 계획을 좀 짜야 할 것 같다.”
“그래야지. 이번 방송이 우리 가게에 찾아온 절호의 기회인데….”
이준형이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요 며칠 박정원 셰프님이 하시는 동네 식당 프로그램을 좀 찾아봤거든.”
“나도 틈틈이 찾아봤어. 요리하는 모습부터 손님들 인터뷰까지 아주 자세하게 나오더라.”
“맞아, 저번 요리대회 때 보여준 것처럼 네가 요리하는 모습을 주로 보여주자. 그 전에 새벽 시장에서 장 보는 모습부터 보여주면 좋을 것 같아.”
갑자기 말이 없어진 서인우가 아래로 향해 있던 시선을 이준형에게로 옮겼다.
“진정성을 보여줘야 해. 우리가 요리에 얼마나 진심인지, 그리고 손님들이 [서풍TWO]를 얼마나 믿고 좋아해 주는지 그걸 꼭 보여주고 싶어.”
지난 방송들을 찾아보고, 방송의 방향을 잡아 가고 있는 사이 입구 반대편에 어릴 적 많이 본 빨간 벽돌이 차곡차곡 쌓여 올라갔다.
가운데를 네모반듯하게 비워두고 계속해서 천장 유리까지 닿도록 옆면을 벽돌로 쌓았다.
“정말 제대로 레트로인데? 나 어릴 적 살던 빨간 벽돌집 생각난다.”
“저 가운데는 왜 비워 놨을까?”
“글쎄. 완성되면 알 수 있겠지.”
곧이어 천장 위쪽에 천막 장식이 시작됐다.
빨간색, 하얀색, 초록색 패턴으로 천장을 전부 천막으로 덮자 그늘을 만들어 줌과 동시에 촌스러운 듯하면서 힙한 느낌을 제대로 살려 주었다.
“점점 근사해진다. 제시카 씨 생각보다 더 능력 있는 것 같은데, 안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이다. 우리 가게를 찾는 손님들의 나이가 더 어려질 것 같다.”
종일 분주한 제시카가 전기 담당 직원에게 뭐라 구체적으로 지시하고는 급히 어딘가로 사라졌다.
한참 뒤 커다란 박스 두 개를 들고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서인우와 이준형이 달려 나가 박스를 받아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이건 뭡니까?”
“인테리어의 완성은 조명이죠. 할로겐 등하고 빨간 벽돌 위에 설치할 포인트 등이에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중에 다 완성되면 보여드리죠.”
전기 기사가 미리 뺴놓은 전선에 제시카가 사 온 전등을 하나씩 연결해 설치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려 할 때쯤 아침 일찍부터 정신없이 시작했던 인테리어 작업이 막바지에 들어간 듯했다.
전등까지 설치하고 폴딩도어를 여러 번 테스트 한 뒤 업체 직원들이 모두 장비를 챙겨 돌아갔다.
제시카만 혼자 남아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제 좀 어두워졌으니까 여기 스위치로 조명을 켜볼까요?”
서인우가 제시카의 말에 따라 스위치를 누르자 메인 엘이디 등과 다운 라이트 등이 동시에 켜지며 밝고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다시 끄고, 옆에 있는 스위치 눌러 보세요.”
이번에는 이준형이 스위치를 눌렀다.
빨간 벽돌 위에 노란 포인트 등이 켜져 다시 없는 레트로 감성을 만들어 주었다.
“어때요?”
“너무 맘에 듭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저도 맘에 들어요. 시간이 별로 없었는데, 생각한 대로 잘 나와서 다행이에요.”
이준형이 궁금했는지 아직 오픈하지 않은 박스를 가리켰다.
“그럼 나중에 보여준다던 이 박스에는 뭐가 들어있습니까?”
제시카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