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63화 (63/200)

제63화.

“당분간 사람들 만날 생각도 하지 말고, 비밀 유지 확실하게 해. 특히 [서풍]에서 연락 오면 절대 받지 말고. 알아들어?”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그나저나 이 일은 누가 시킨 겁니까?”

“당신들이 그거 알아서 뭐하게? 알려고도 하지 마. 모르는 게 신상에 더 나을 거니까.”

피부가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남자가 부부를 향해 소름 끼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부부가 동시에 몸을 부르르 떨더니 남자가 건네는 봉투를 챙겨 사라졌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남자가 핸드폰을 꺼내 통화버튼을 눌렀다.

“처리됐습니까?”

-네, 사장님. 확실히 입단속 시켜놨으니 이 일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좋아요. 난 그저 황 부장만 믿어요.”

-감사합니다. 뭐든 시키실 일 있으시면 말만 하세요.

“어떤 상황에서도 황 부장 입을 통해서 비밀이 새어 나가는 일은 절대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부분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전 맡은 일 외에는 전혀 알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럼 또 연락하죠.”

-알겠습니다.

핸드폰의 종료 버튼을 누르고 잠시 주변을 둘러본 김원상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가게로 들어갔다.

오승연 홀 매니저가 다른 여직원 하나와 구석에서 수다를 떨고 있다가 흠칫 놀라는 표정을 보였다.

“오 매니저. 무슨 얘기 하고 있었는데, 놀라고 그래요?”

“아, 그게...”

“뭔데요? 혹시 나 없을 때 내 흉이라도 본 겁니까?”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사실 시장 근처 [서풍] 있잖아요. 서인우 셰프가 하는 식당요.”

“거기가 왜요?”

오승연이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거기 손님 하나가 요리를 먹고 장염이 심하게 걸렸다는 영상이 나왔었는데, 그 이후로 손님이 뚝 끊겼다네요. 경쟁업체라 좋아해야 하는데, 그 사장님이 그럴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거든요.”

“그럴 사람이 어디 따로 정해져 있나요? 어쩌다 보니 실수한 거겠죠.”

“매일 새벽마다 싱싱한 재료를 사들여 장사한다고 했다는데, 저는 그 사람 눈이 정말 진실되어 보였거든요.”

진실되어 보여?

잘생긴 외모에 현혹되어 정신을 못 차리더니만.

“손님이 거짓말할 리는 없고, 아마 재료에 안 좋은 해물이 섞여 있었을 겁니다.”

“너무 안됐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맛집으로 한창 뜨고 있었는데….”

김원상의 눈치를 짧게 살피던 오승연이 재빨리 태도를 바꿨다.

“하긴 우리 가게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곳이라 경쟁업체도 아니에요. 그래도 우리한테는 잘된 일인 거죠, 뭐.”

그렇게 말은 하고 있지만, 표정은 안타까움이 뚝뚝 묻어나왔다.

내심 의도한 대로 일이 잘 돌아간다는 걸 확인한 김원상은 속이 다 후련했다.

뭔가 하나하나 계획대로 진행되어 가는 것 같아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 * *

서인우는 핸드폰에 저장된 제시카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서풍 TWO]의 서인우입니다.”

-네, 결정은 하셨나요?

“결정은 했는데,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살살 물어요. 아프지 않게. 하하.

혼자 말하고 혼자 웃고 있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서인우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살살 안 되겠는데요. 워낙 급한 일이라서요.”

-무슨 일이신데요?

“혹시 입구 인테리어 공사를 최대한 빨리 진행하면 며칠 걸릴까요? ”

-오늘 당장 제작 주문 넣고 최대한 빨리해도 다음 주 화요일이나 수요일 가능하겠는데요?

“조금 더 당겨서 월요일 휴무일에 공사 가능할까요?”

-그렇게 빨리는 힘들 텐데...

“이럴 때 제시카 씨 능력을 보여주세요.”

그 말이 제시카의 열정에 불을 지폈다.

-까짓거 해보죠, 뭐. 그럼 지금 당장 가서 정확한 치수부터 재야겠어요. 금방 날아가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뒤를 돌던 서인우가 놀라 뒷걸음질 쳤다.

“너 언제부터 내 뒤에 붙어있었냐?”

“통화 내용을 들어보니 제시카 같은데?”

“응, 우리 입구 공사 바로 시작하려고. 촬영 전에 공사해서 우리가 손님들에게 얼마나 진심인지 어필 좀 해야겠다.”

“그래, 잘 생각했어. 이번 가게 촬영에 우리 모든 걸 걸어야 할 것 같아.”

“다른 건 몰라도 오해는 없애줘야지. 누가 한 짓인지도 밝혀내야 하고.”

CCTV를 노려보는 서인우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시장에서 일하며 늦은 점심을 해결하던 단골손님들은 고맙게도 [서풍 TWO]를 계속 찾아주었다.

“우리는 여기 젊은 사장 믿는구먼. 먹어보면 바로 알 수 있는 걸 그따위 영상 하나 때문에 오기 꺼린다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가 몰러.”

“하모. 우리 같은 장사꾼은 사람 눈 보면 딱 안다 아이가. 그저 겉모습만 중시하는 사람들이 그런 영상 따위에 넘어가는 거재.”

드문드문 오는 손님이지만, 다들 서인우와 이준형, 정다운의 등을 토닥이거나 손을 잡아 주며 한 마디씩 건네주었다.

이렇게 믿고 찾아와주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오해는 없애버리고 누명에서 벗어나고 말 거다.

막 나간 손님에게 인사하고 테이블을 닦고 있던 정다운의 옆으로 뭔가가 빛처럼 휙 움직였다.

이준형이었다.

제시카가 오는지 입구만 지켜보고 있더니 그녀의 모습이 살짝 보이자마자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네, 잘 지내셨어요? 결정을 생각보다 빨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멋지게 만들어 볼게요.”

일하기 편한 청바지에 맨투맨 티를 안에 입고 야상점퍼를 걸친 제시카는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활동적으로 보였다.

“빨리 오셨네요?”

주방에서 나온 서인우가 제시카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급하다면서요? 오늘부터 날밤 새워야 할지 몰라요. 우선 사이즈부터 재도록 하겠습니다.”

제시카가 가방에서 줄자와 노트, 팬을 꺼내 들고 가게 입구로 향했다.

그 뒤를 졸졸 쫓아간 이준형이 제시카가 사이즈를 재는 걸 도왔다.

“사장님, 아저씨 꼭 저 여자 비서 같지 않아요? 입이 찢어져서 귀에 걸렸어요. 아주.”

“누군가 도와주면 좋지 뭐. 내가 빨리해달라고 부탁한 거라서 사이즈를 정확하게 재야 한다고 했어.”

설명해도 둘을 바라보는 정다운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안 도와주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덕분에 더 정확하게 쟀네요.”

“뭐든 시켜주세요. 아, 내 말은. 우리 가게니까요. 잘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준형이 고장 난 인형처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여름이면 딱 날파리가 들어가기 좋은 모양새였다.

“사이즈 정확하게 쟀으니까 저는 바로 제작 들어갑니다. 가서 업체 사장님 쫄라야 해요. 최소 일주일은 시간 드려야 하는데...”

“난처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희가 급한 사정이 생겨서요.”

서인우가 거듭 고개를 숙이며 미안한 마음을 표했다.

“하지만, 내가 그 정도 능력은 됩니다. 가서 어떻게든 제작 마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전 바로 가볼게요.”

“벌써 가십니까? 뭐 또 사이즈 재거나 필요한 작업은 없나요?”

“네, 빨리 가서 바로 시작해야 원하시는 날짜에 맞춰 드릴 수 있거든요.”

가게를 나가는 제시카를 향해 서인우가 고개를 숙였다.

“저희 사정 맞춰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첫 거래인만큼 더 신경 써서 해보겠습니다. 믿고 맡겨주셔서 저 또한 감사합니다.”

기분 좋은 미소를 날리며 뒤돌아 급히 뛰어가는 제시카를 이준형이 아쉬운 듯 목을 쭉 빼고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은 커피 한 잔도 안 마시고 가네.”

서운함이 잔뜩 묻어나는 이준형의 목소리를 들으니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추진력이 대단한 것 같다. 사실 좀 무리 될 거라는 거 예상하고 던져본 거였는데….”

“제시카 씨 업체 사장한테 한 소리 듣는 거 아니냐? 설마 미인계를 쓴다거나 뭐 그러진 않겠지?”

이준형의 얼굴에 금세 근심이 가득했다.

“아저씨. 저 사람이 어린 애예요? 누가 보면 아저씨 딸 걱정하는 것 같네.”

“뭐? 딸? 무슨 그런 말을...하긴 딸 만들고 싶은 여자긴 하지. 흐흐.”

바보 같은 웃음소리를 실실 흘리는 이준형을 혼자 두고 서인우는 주방으로 정다운은 카운터로 각자 돌아갔다.

주방으로 들어온 서인우가 작은 소리로 사부를 불렀다.

“사부, 우리 다음 주에 방송에 나갈 것 같아.”

-뭐야? 또 대회에 나가냐?

“그건 아니고, 우리 가게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나가서 가게 홍보도 하고, 억울한 누명도 벗고 하려고.”

-그럼, 이 사부가 멋진 모습을 많이 연출해 줘야겠군. 원하는 퍼포먼스 있으면 말만 해.

“이미 지난번 대회에서 사부와 나의 활약은 충분히 보여준 것 같은데? 이번엔 우리 가게의 메뉴와 손님 접대, 청결 상태 등을 주로 찍을 것 같아.”

중식도가 빙글빙글 돌았다.

-내가 이런 퍼포먼스 보여주면 이 가게가 훨씬 유명해지지 않을까?

“꿈도 꾸지 마. 담당 피디 기절하는 거 볼 생각 아니면... 아마 시청자들이 기겁하고 도망가겠지.”

-나는 언제까지 장막 뒤에 숨어있어야 하나? 이제 무대에 직접 나설 때도 된 것 같은데...

“사부, 그럼 나 서운해.”

-갑자기 뭔 소리?

“내가 사부를 믿고 인정하는데, 나 하나로 부족한 거야?”

중식도가 인우의 팔을 찰싹 쳤다.

-모올랑.

하마터면 큰소리로 웃을뻔했다.

잠시나마 피곤함을 잊게 해준 중식도가 고마웠다.

시장 단골손님들과 젊은 사람들이 간간이 찾아오며 며칠이 지나고 제시카와 약속한 월요일 휴무일이 되었다.

서인우는 아침 일찍 일어나 어제 들어온 문자를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내일 오전 9시부터 인테리어 작업 시작하려 합니다. 쉬는 날 피곤하시겠지만, 멋지게 변할 가게를 생각하며 일찍 나오셔서 문 열어 주세요. -제시카.]

오전 9시?

4시면 일어나 새벽시장을 가는 인우에게는 이미 대낮이나 마찬가지인 시간이다.

그나마 밀린 잠을 충전하고 일어나보니 7시.

피곤해도 빼먹지 않는 아침 조깅을 마치고 들어와 개운하게 샤워를 했다.

편한 청바지에 회색 후드 집업을 걸치고 핸드폰으로 확인한 시간이 8시 30분 이었다.

‘지금 가면 시간을 맞출 수 있겠군.’

서인우가 향한 곳은 [서풍 TWO]가 아닌 고소한 빵굽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 동네 유명 빵집이었다.

호밀로 만든 깜빠뉴가 나오는 시간 8시 30분.

부지런한 사람만이 먹을 수 있는 이 집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였다.

아직 온기가 느껴지는 갓 구운 빵을 넉넉히 사서 들고 가게로 향했다.

도어락으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막 들어가려 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 이거 빵냄새인데..와, 정말 세상 행복해지는 냄새.”

“아침 전이죠? 커피랑 같이 먹자고 방금 구운 거 사 왔습니다.”

“정말요? 안 그래도 아침에 밥만 먹고 디저트를 못 먹고 왔는데, 너무 잘됐다. 얼른 들어가요. 후딱 먹고 작업 시작해야 해요.”

안으로 들어가며 서인우는 방금 제시카가 한 말이 너무 웃겨서 삐져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이제 9시인데, 밥만 먹고 디저트를 못 먹었다니...

보통 저 나이 때 사람들은 남녀 할 거 없이 아침을 잘 안 먹는 거로 알고 있었는데, 사람이 다 제각각이라는 걸 또 한 번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서인우는 커다란 접시를 꺼내 사온 빵들을 올려 놓고 주방으로 들어가 커피를 내렸다.

그라인더로 커피 가는 소리 사이로 제시카의 목소리가 겹쳐 잘 들리지 않았다.

“... ... 되요?”

“네? 못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먹고 있을게요.”

아!

먼저 먹어도 되냐고 물었나 보다.

설마 아침밥을 먹었는데 배가 고픈건 아닐테고, 빵을 진심으로 엄청 좋아하는 여자인가?

커피를 내려 나오는 서인우를 보자 제시카가 양손을 들어 쌍 따봉을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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