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10층 회장실 문밖에서 잠시 옷매무새를 점검하던 차상철이 노크를 하며 들어갔다.
“회장님, 오전 회의에서 말씀 못 드린 부분이…. 아, 손님이 계셨네요.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차 팀장, 이리 와서 앉게.”
긴 테이블 위에 녹차 두 잔이 놓여 있고, 김형식과 김서원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자네. 우리 딸 처음 보는 건가?”
“아, 네. 독일에서 음악 공부 중이시다고 들었습니다.”
“지난달에 완전히 귀국했네, 둘이 인사하지.”
갈색 웨이브 단발 머리에 옅은 화장으로 앳돼 보이는 김서원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서원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판매분석팀장 차성철입니다. 귀국하신 지 몰랐습니다.”
김서원이 뭔가 말을 하려 입술을 움직이자 김형식이 잽싸게 먼저 입을 열었다.
“피아노만 치고 있기에는 아까운 인재라 지금 내가 설득 중이네. 자네가 일을 좀 가르쳐 보면 어떨까 싶은데.”
“아빠, 제 앞길은 제가 정해요.”
김서원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한눈에 어떤 상황인지 바로 파악이 된 차성철이 옅은 미소를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분 좀 더 시간이 필요하신 것 같습니다. 한가지 말씀드릴 건 기회가 된다면 우리 회사에 바로 적응하실 수 있도록 가르쳐드릴 자신은 있다는 겁니다. 그럼 좋은 결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회장실을 나서는 차성철의 눈에 오묘한 빛이 서렸다.
다시 둘만 남은 회장실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너 또 도망칠 셈이냐? 이제는 성인인데, 너도 판단이 설 거 아니냐?”
평소 회의할 때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어조로 김형식이 물었다.
“자식들이 진정으로 뭘 원하는지, 어떻게 하는 게 자식들을 위한 건지 한 번이라도 고민해 보신 적 없으시죠?”
“배부른 소리... 니들이 내가 이뤄놓은 발판 아니면 어디 한걸음이라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누구 덕에 편하게 사는줄도 모르고...”
“그 발판 이제 더는 밟지 않겠다고요. 오빠 하나로는 만족하지 못하세요?”
김형식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 딸 김서원을 응시했다.
“너든 원상이든 힘 있는 놈이 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어. 내가 어떻게 해서 이뤄놓은 것들인데, 단지 자식이라고 해서 너희들한테 거저 얻게 되는 건 하나도 없을 거란 말이다.”
“네. 그러시겠죠. 이번 기회에 확실히 말씀드리죠. 저는 제 능력으로 바닥부터 시작할 겁니다. 그러니, 그 기회 오빠한테 다 주시라는 말입니다.”
“욕심도 없고 미련한 것. 자기가 가진 게 뭔지도 모르고 건방지게…. 좋아, 당분간 눈감아 주지. 어디 세상 무서운 맛 좀 보고 기어들어 오든지.”
테이블 아래 가지런히 모은 김서원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단둘뿐인 자식도 능력에 따라 평가하고 인정하는 아버지.
그 아버지 곁에서 어떻게든 가진 걸 놓지 못해 안달하는 오빠.
오늘은 그 둘 다 끔찍하게 느껴졌다.
* * *
“사장님, 빨리 나와서 이것 좀 보세요.”
“다운 씨, 왔어? 별일 없었지? 혹시 전에 그 남자 찾아오거나 하진 않았지?”
“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우리 가게 이제 망했어요.”
테이블 위에 냅킨을 펼쳐 놓고 부지런히 접고 있던 이준형도 놀라 단숨에 튀어나왔다.
“왜? 무슨 일인데 잘나가는 우리 가게가 망해?”
“이 영상 좀 보세요. 지금 인터넷에 난리에요.”
정다운이 보여준 영상에는 비록 눈을 까만 선으로 가렸지만, 어딘지 익숙한 모습의 중년 여성이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러니까 남편분이 식당에서 요리를 먹고 장염에 심하게 걸려 죽다 살아났다는 말이죠?”
“그렇다니까요. 얼마나 고생했는지... 난 남편을 잃는 줄 알고 ..흑흑.”
여자의 목멘 소리가 그대로 방송에 흘러나왔다.
“그 식당이 바로 얼마 전 방송에서 인기리에 막을 내렸던 [중화요리 최고의 고수를 찾아서]의 최종 우승자 서모씨의 식당이라고 했는데 확실한가요?”
“네, 저희도 그 방송을 워낙 좋아했어요. 특히 최종 우승자가 직접 하는 가게라고 해서 일부러 찾아갔는데...”
“그렇군요. 치료 후에 다시 그 식당을 찾아갔다고 들었는데요... 그때 제대로 사과나 보상을 받지 못하셨던 건가요?”
중년 여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너무 화가 나고 억울해서 다시 찾아갔는데, 세상에 자기네는 매일 아침 장을 봐서 신선한 재료만 쓴다고 재료구매 영수증까지 보여줍디다.”
“아, 그랬군요. 그게 사실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제보자분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저희 부부 강남에 집도 두 채나 있고 돈이라면 있을 만큼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말하겠습니까?”
사회자가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제보자분을 믿습니다.”
“오늘 이 방송에 나온 이유도 하나입니다. 우리는 어떤 보상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처럼 유명세만 믿고 그 식당을 찾아갔다가 혹시라도 건강을 해치는 사람이 나올까 걱정될 뿐입니다.”
“그렇군요. 진실은 결국 밝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식당 사장인 서모씨가 이 방송을 보고 있다면 진실을 꼭 밝혀주시고 여기 이 제보자분께 진심 어린 사과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영상이 끝나자 이준형이 흥분해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이거 그때 그 아줌마지? 분명히 인우 네가 사과하고 보상해준다고 했는데, 도망치다시피 가게를 나가놓고 인제 와서 완전 딴소리야. 정말 어이가 없네.”
“우리 가게는 신선한 재료를 가장 중시하는 곳이야. 저런 소문이 퍼진다면 타격이 크겠는데...”
서인우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있었다.
“사장님. 저 아줌마 말이 절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어요? 혹시 안 좋은 해물이 섞인 건 아닐까요?”
“절대 아니야. 매일 새벽에 내가 직접 보고 사는 해물이야. 그리고, 남은 재료를 다음 날 쓴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그럼 이 아줌마 뭘까요? 보상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왜 방송에까지 이렇게 거짓을 말하는 걸까요?”
답답했다.
하루에 네 시간도 못 자면서 매일같이 새벽 시장을 다니며 직접 구입한 재료로 정말 열심히 요리했다.
최선을 다한 요리 경연대회의 우승과 신선한 재료로 성실하게 만든 요리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는데….
다른 것보다 직접 만든 음식을 먹고 누군가가 죽다 살아났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더 화가나 미칠 것만 같았다.
“이건 아니다. 절대 이래서는 안 돼! 저 제보자 다시 한번 만나봐야겠다. 준형아.”
“무슨 얘기인지 알아들었어.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조금 전 사회자가 말한 것처럼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는 법이다. 그러니, 우리가 쫄 필요는 없지 않냐?”
“응, 내가 걱정하는 건 딱 하나야. 아빠가 평생 지켜온 [서풍]의 이미지를 내가 더럽히게 될까 봐 그게 걱정될 뿐이다.”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자.”
“그럼 절대 그런 일은 없어야지. 저 사람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반드시 밝혀낼 거다.”
오히려 이준형과 정다운을 안심시켜주고 주방으로 돌아온 서인우는 조금 전 본 영상을 다시 떠올렸다.
-왜 이렇게 심각하냐?
“사부, 내가 만든 요리를 먹고 장염에 걸려 죽다 살아났대.”
-누가? 어느 미친놈이 그런 거짓부렁을 지껄여대?
“잠과 씨름하면서 매일 새벽시장에 다녔는데...갑자기 어깨에 힘이 쫙 빠진다.”
-아는 사람이야? 너한테 무슨 악감정이라도 있는 거냐?
“처음 보는 사람이야. 특히 난 거의 주방에만 있으니까 그 사람이 밥 먹는 걸 본 적도...”
-왜? 본 적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너 지금 나랑 장난하냐? 궁금해 죽겠네. 뭐? 뭔데?
“CCTV. 그 사람이 정말 우리 식당에서 식사한 사람이라면 분명 홀에 있는 CCTV에 찍혀있을 거야.”
-그렇지. 야, 너 좀 멋진데?
정신없이 주방에서 뛰어나간 서인우가 이준형과 정다운을 다급하게 불렀다.
“왜? 심심하냐? 그 영상 때문인가보다. 손님이 뚝 끊기긴 했다.”
“그게 아니라...”
“그럼, 생각해보니까 상한 재료를 쓴 것 같아? 그런 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 방송에 나온 그 아주머니 며칠 전에 남편하고 우리 식당에 왔던 사람 맞지?”
“눈을 가렸지만, 목소리나 말투로 봐서 그때 그 아줌마 맞아. 남편이 장염에 걸려 죽다 살아났다고 했던 말도 똑같고. 그런데 왜?”
서인우가 대답 대신 시선을 돌려 CCTV를 바라봤다.
“사장님 정말 천재예요. 그 사람이 진짜 우리 식당에서 음식을 먹었는지 확인해보면 알겠네요.”
“그런데, 언제인지 정확한 날짜도 모르고...하루 종일 찍혀있는 영상을 언제 다 일일이 확인하냐?”
“그건 걱정하지 마. 며칠이 걸리든 몇 주가 걸리든 내가 잠을 안 자고 찾아낼 테니까.”
서인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홀을 둘러보았다.
“점심시간인데 아직 손님이 없네. 방송 영향으로 봐야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서풍]이라는 이름을 걸고, 자신의 가게와 마영준의 가게 거기다 박정원과 함께하는 새우면까지 날개를 달고 비상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요식업에서 가장 치명적인 재료의 신선도를 문제삼아 이렇게 발목이 잡히게 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햇다.
인우는 한참 바쁠 시간이지만 텅 비어있는 홀을 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 *
“방송 보셨습니까?”
-그래. 이제 좀 머리를 쓰는구만. 역시 싸움은 붙여야 맛이라니까.
“지금 그 영상의 여파로 그놈 식당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 정도로는 부족해. 이참에 가게 문을 닫아 버릴 방법을 찾아보라고. 전에 말했지만, 꼼짝 못 하게 확실히 밀어붙여야 해. 알아들어?
“저도 이미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가 원하는 맹수가 되겠다고. 누구든 내 앞길에 방해된다면 다 잡아먹을 테니 염려 마십시오.”
-이제야 이 자리의 윤곽이 좀 잡히는군.
김원상은 아버지의 말에 진저리를 쳤다.
열심히 성실하게 사는 청년의 앞길을 막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전에는 듣지 못한 칭찬을 들었다.
이게 내가 선택한 길이니 더 이상 망설이지 않을거다.
결국은 힘센 자가 살아남는 법이니까.
지끈지끈 두통이 또 밀려왔다.
차에서 내려 가게로 들어간 김원상은 지난 번 오승연 홀 매니저한테 받은 두통약을 하나 입에 털어 넣고 앞치마를 챙겨 주방으로 향했다.
“점장님 오셨어요?”
보조셰프 김지호가 반갑게 다가왔다.
멀리서 쳐다보고 있던 차은석 셰프는 고개를 까닥여 보이고 뭔가를 바쁘게 하고 있었다.
“한가한 시간이라 메뉴 개발 좀 하려고... 여기 신경쓰지 말고 볼일 봐.”
“네, 점장님.”
마영준의 [셰프의 주방]에서 맛본 음식들을 하나씩 제것으로 만들어 볼 생각이다.
우선 그곳의 시그니처 메뉴인 치즈 탕수육을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탕수육은 이미 자신있는 메뉴이고, 어떻게 하면 치즈와 탕수육 기름이 느끼하지 않게 느껴질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분명 그날 먹어본 치즈 탕수육은 조금도 느끼한 맛이 없었어. 소스가 달라서일까?’
김원상은 우선 돼지고기에 평상시보다 생강을 더 많이 첨가해 재어 놓았다.
그리고는 소스를 먼저 만들기 시작했다.
기존 탕수육 소스보다 뭔가 더 상큼하고 고소하게 느껴졌던 그날의 기억을 되살리며 소스를 만들었다.
[만가복]메뉴의 하나인 사천탕수육 소스를 하나 만들어놓고, 또 다른 작은 후라이팬에 기존 소스에 레몬을 더 추가해 새콤달콤한 레몬 탕수육 소스를 만들었다.
밑간이 된 돼지고기에 튀김 반죽옷을 입혀 바삭하게 튀겨낸 후 바로 녹인 치즈를 위에 부었다.
그리고는 두 개 버전으로 만들어놓은 소스를 하나씩 번갈아 가며 찍어 먹어보았다.
사천 소스는 매콤해서 느끼함을 없애 주었고, 레몬 소스는 새콤달콤한 게 기존 탕수육을 먹는 느낌을 그대로 줄 수 있어서 나쁘지 않았다.
그때였다.
그림자가 다가오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돌려 보니 차은석 셰프가 김원상이 만든 메뉴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