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58화 (58/200)

제58화.

아주 잠깐 사이에 독한 술 냄새가 홀에 가득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자고짜 욕지거리를 해댔다.

“이년 어디에 숨었어? 빨리 안 나와?”

“어르신 무슨 일이시죠? 누굴 찾으시는 건가요?”

나갈 준비를 하며 홀 정리를 마저 돕고 있던 서인우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화장실에서 앞치마와 명찰을 떼고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나오던 정다운이 사시나무 떨듯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저기 있네. 네가 매일 늦게 들어오는 게 이놈들 때문이야? 이놈들하고 무슨 사이야?”

“아저씨가 무슨 상관이에요? 여기 내가 일하는 직장이에요. 이러지 말고 나가서 얘기해요.”

정다운의 목소리가 힘없이 떨려왔다.

사납던 눈빛은 겁에 잔뜩 질려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정다운 씨 손님이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여기 사장 서인우라고 합니다.”

사장이라는 말에 눈빛이 달라진 남자의 목소리가 한 층 가라앉았다.

“여기 사장이라고? 이 가게도 당신 꺼고?”

“그건 아닙니다. 월세 내고 일하고 있습니다.”

“뭐? 이 후진 가게 살 돈도 없는 놈이 무슨 사장이라고 거들먹거리고 있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정다운이 남자의 팔을 잡아끌었다.

“나가자고요. 밖에 가서 얘기하면 되잖아!”

울부짖다시피 소리를 지르는 정다운의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살짝 밀면 쓰러질 듯 온몸이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

‘잘 아는 사람인가? 아저씨라고 불렀는데...’

인우는 정다운이 남자를 불렀을 때 호칭을 정확히 기억했다.

분명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았지만, 그걸 물어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빨리 나가요!”

다시 한번 힘껏 남자를 잡아당기자 남자가 거칠게 팔을 휘저었다.

그 바람에 정다운이 휘청거리며 테이블 위로 쓰러졌다.

서인우가 잽싸게 팔을 잡아 얼굴을 박지는 않았지만, 하마터면 이마가 찢어질 뻔했다.

“어르신, 차분히 앉아서 말씀하시죠? 무슨 일이신지….”

“무슨 일? 저년이 이번 달에는 아직 생활비를 안 가져왔다고. 한 달은 됐다던데 늦게까지 일하면서 월급을 왜 안 줘? 어리다고 무시하는 거야 뭐야?”

정다운의 눈에서 결국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뚝뚝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평상시 까칠하고 자존심 강하게 보였던 그녀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서인우는 남자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한 달은 됐다던데? 그건 누군가한테 들었다는 얘기인데….’

“죄송하지만, 정다운 씨 가족 되십니까?”

“아니에요. 몇 달 동안 본적도 없어요.”

정다운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년이 키워준 아버지한테 버릇없이 뭐라고 하는 거야? 내가 가족이 아니면 누가 가족이야?”

“우리 엄마랑 2년 살고 헤어져 놓고 무슨 가족이라는 거에요? 이제 제발 우리 모녀 괴롭히지 말고 놔달라고…. 제발...”

급기야 정다운이 오열을 하기 시작했다.

작은 어깨가 한없이 흔들리는 모습이 보는 이들의 가슴을 후벼파는 것 같았다.

“정다운 씨. 이쪽으로 와 있어.”

서인우가 정다운을 자기 뒤쪽으로 당겨 숨겼다.

“정다운 씨가 여기서 일하는 건 어떻게 아신 거죠?”

“뭐? 너 지금 나 취조하는 거야?”

“그냥 질문하는 겁니다. 분명 다운 씨가 말하지 않은 것 같은데...”

정다운이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년이 튀어봤자 내 손바닥 안이지. 내가 어디라도 찾을 수 있다고.”

“그러니까요. 어떻게 아셨냐고 묻는 겁니다.”

“그냥...”

남자가 머뭇거리며 얼른 답을 내놓지 못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럼 다시 묻죠. 지금 한집에 살고 있나요?”

“아니에요. 저는 엄마랑 남동생이랑 셋이 살아요.”

정다운이 서인우 등 뒤에 바짝 붙어서 말했다.

“그렇다면 정다운씨가 나가고 들어오는 걸 본 적도 없을 텐데, 여기서 일하는 걸 어떻게 아셨는지 정말 궁금하네요.”

“내가 오늘 몰래 뒤따라왔어. 됐어?”

“그러세요? 그럼 어디서부터 어떻게 따라오셨는데요? 게다가 출근할 때 뒤따라왔으면 지금까지 어디 계셨습니까?”

“지금 뭐 하는 거야?”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버럭 화를 냈다.

“누굽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정다운 씨가 여기서 일한다고 알려준 사람이 누구냐는 말입니다.”

서인우의 목소리가 홀 전체에 크게 울렸다.

항상 밝게 웃고 자상한 말투로 얘기했던 서인우가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본 정다운이 바짝 긴장한 듯 더 찰싹 달라붙었다.

등 뒤에서 여전히 떨고 있는 정다운을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에이 씨, 그런 건 모르겠고, 이 년 월급이나 달라고. 안 그러면 내일부터 여기 못 나오게 할 거니까.”

“아저씨가 뭔데 내 직장을 맘대로 나와라. 마라 하는 거예요? 우리 엄마를 그렇게 만들었으면 됐지, 왜 나한테까지…. 흑 흑..”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은 정다운이 무릎 사이에 머리를 박고 울었다.

웅크린 모습이 마치 길잃은 어린 새처럼 안쓰러웠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고 싶었던 거구나.

저 남자한테서 빨리 도망치고 싶어서...

“아직 법적으로 내가 네년 아버지야. 뭐든 내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알아들어?”

“정말 싫어. 그냥 확 죽어버리고 싶다고...흑흑.”

서인우 옆에서서 아무 말없이 묵묵히 듣고 있던 이준형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새 티격태격하며 정이 많이 들었었나보다.

“정다운씨 우리가 도와줄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아저씨.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빨리 여기서 나가요.”“뭐? 돈을 줘야 나가지. 신고하려면 해!”

남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바닥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그 모습을 본 서인우가 핸드폰으로 번호를 누르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십니까, 윤 형사님. 저희 가게에 술을 마시고 난동 부리는 사람이 있어서 신고하려고 합니다.”

“내가 뭐? 저년 아버지라니까!”

남자가 눈치를 슬금슬금 보더니 몸을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서인우의 통화는 계속됐다.

“가까운 마포 경찰서로 신고 접수됐다고요? 알겠습니다. 도착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서인우를 노려보더니 잽싸게 입구로 향했다.

“내가 오늘은 가는데, 이 년 앞으로는 여기 안 나올 거야. 그렇게 알고 월급 준비해놔.”

들어올 때 휘청거리던 모습과는 완전 딴판으로 백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냅다 달려가는 모습이 어이가 없었다.

“다운 씨, 괜찮아?”

“에이씨, 쪽팔려... 정말 죽고 싶어요.”

“제일 좋은 나이에 죽긴 왜 죽어? 요리 배우고 싶다면서? 성공해서 돈 많이 벌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성공하는 게 복수하는 거야.”

서인우가 하는 말에 유독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이준형이 말을 덧붙였다.

“나가자. 시원하게 맥주 한잔하면서 방법을 논의해 보자. 그런데, 윤 형사는 누구야?”

“아, 나도 너한테 배웠지.”

“응?”

드르륵.

순간 거칠게 문이 열리고 난데없이 이모 딸 지영이 모습을 나타냈다.

“오빠, 무슨 일이야?”

“너 겁도 없이 여기로 달려오면 어떻게 하냐?”

“나 근처에서 친구들하고 놀고 있었어. 오빠 전화 받고 이게 무슨 일인가 했는데, 그 남자가 이년 저년 하는 거 듣고 뛰어왔지. 분명 다운 씨한테 무슨 일 있는 것 같아서.”

“그럼 윤 형사님이 바로 지영씨였어?”

“나도 갑자기 떠오른 사람이 지영이밖에 없어서...”

“이놈 봐라. 그새 배워서 써먹네.”

둘의 대화를 못 알아들은 지영과 다운이 서로 눈으로 물었다.

‘뭔 소리래?’

‘나도 몰라요.’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다운 씨 괜찮은 거야?”

“얘기가 길어요. 우선 나가서 한잔하면서 얘기합시다.”

가까운 호프집으로 들어온 서인우 일행은 서로 눈치만 보며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속에서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뜻밖에 정다운이었다.

“조금 전 그 아저씨 저 고등학교 막 입학할 때쯤 엄마가 일하던 곳에서 만난 사람이에요. 그때는 외롭고 힘든 엄마한테 잘해줬다고 그랬는데...”

“그럼 재혼하신 거야?”

“재혼이랄 것도 없이 혼인신고만 하고 살았는데... 저 인간이 술만 먹으면 개가 됐어요.”

“뭐? 뭐가 돼?”

생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있던 이준형이 놀라 물었다.

“술만 마시면 엄마한테 손찌검했고, 난 동생하고 도망가기 바빴어요.”

그 누구도 차마 아무런 리액션을 하지 못했다.

한참 인생을 꿈꾸고 이쁠 나이에 맞는 엄마를 보며 도망다녀야 했던 정다운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

“다들 그렇게 볼 거 없어요. 오래 걸렸지만, 곧 서류 정리 될 거니까요.”

“그래? 아까 그 사람이 아직 법적으로 자기가 아버지라고 떠들던데?”

“이혼을 안 해줘서 오래 걸렸어요. 결국 엄마...”

정다운이 목이 메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힘들면 아무 얘기 안 해도 돼.”

지영이 다운의 등을 토닥였다.

“처음이에요. 남한테 우리 집 얘기를 하는 건... 그래도 얘기하니까 속은 후련하네요.”

“그 남자가 다운 씨 지금 사는 집이 어딘지 알아?”

“이사하고 한 번도 찾아온 적은 없었는데…. 여기를 알아낸 것 보면 집도 금방 알아낼 것 같아요.”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가자. 내가 독립해서 혼자 산다고 했지? 편하게 지내도 되니까 부담은 갖지 말고.”

지영이 일부러 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고마워요. 그래도 엄마랑 동생 걱정돼서 집에 들어가 봐야 해요.”

“그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서인우의 발언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 그게 무슨 소리야?”

“좀 전에 그 남자 누군가한테 다운 씨가 여기서 일한다는 얘기를 듣고 온 것 같았어. 그 누군가가 우리 가게 위치까지 알려줬을 거고.”

“너 그래서 자꾸 가게를 어떻게 알고 왔냐고 물었구나?”

굳은 표정의 서인우가 정다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운 씨가 여기서 일을 못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일 거야. 나한테 타격을 줄 심산이니까 다른 가족들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정다운이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엄마가 결국 진단서를 제출해 이혼이 진행된 이후로는 한 번도 만난 적 없었어요. 너무 갑자기라 더 놀라기도 했었고요.”

이준형이 뭔가 눈치를 챈 듯 서인우를 쳐다봤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이미 알겠다는 눈치였다.

“이런 개새...”

“누구? 누구 얘기 하는거야?”

지영이 궁금한 듯 계속 다그쳤다.

“그럴 일이 있어, 지금은 그렇고 나중에 얘기해줄게.”

“오빠 무슨 일 있었어? 뭐 위험하고 그런 건 아니지?”

“그런 거 전혀 없어. 너도 알겠지만 우리 가게 지금 아주 핫해. 기다리는 손님들이 많아서 입구 쪽에 손님 대기하는 그늘막을 만들 생각이다.”

서인우가 애써 밝게 얘기를 하는데도 윤지영이 연신 의심의 눈초리로 둘을 쳐다봤다.

“별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혹시라도 이모나 이모부한테 오늘 있었던 일 말하지 말고.”

“그건 걱정하지 마. 아빠가 알게 되면 바로 서울로 올라오실 거니까. 다운 씨, 한잔해. 시원하게 마시고 집에 가서 우리끼리 2차 하자.”

“에이, 치사하게. 우리도 끼워주면 안 되나?”

“응, 안 돼.”

지영과 다운이 택시를 타는 걸 지켜보고 나서야 준형이 다급하게 물었다.

“김형식 짓으로 생각하는 거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난 번 마셰프님 일로 나에 대한 감정이 더 안 좋아졌겠지.”

“혹시 며칠 전에 왔을 때 다운 씨에 대해 알아낸 건가?”

“그런 사람이야 돈 쓰면 뭐든 못하겠냐?”

“우리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

“그래야지. 그 사람보다 더 힘을 키워야지. 꼭 그렇게 만들 거다.”

서인우의 눈에 강한 의지가 불꽃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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