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토요일 저녁 6시가 넘어가면서 김원상의 [만가복]에는 여전히 많은 손님이 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오늘 예약 손님은 몇 팀 남아있지?”
안내 직원에게 질문을 하며 김원상의 눈은 홀의 빈 테이블 개수를 세고 있었다.
“7시에 두 팀 예약이 남아있습니다.”
“예약도 줄고 있는 상황인가?”
“아무래도 가까이에 경쟁업체가 생기니 손님 수가 준 건 사실입니다. 그래도 아직 많은 손님이 꾸준히 찾아주십니다.”
“하필 가까이에 가게를 내서 말이야, 이런 상도덕도 모르는 새끼 같으니라고.”
김원상은 더 거친 욕지거리가 나올 것 같아 말끝을 흐렸다.
“어서 오세요.”
안내 직원이 손님을 맞으러 입구로 향하고 김원상이 막 뒤를 돌아본 순간이었다.
“오빠!”
“네가 내 가게에 웬일이냐?”
김원상의 동생 김서원이 머리를 뒤로 넘기며 밝게 웃고 있었다.
“근처에 일이 있어서 왔다가….”
“서원이 너 설마 진짜 다시 안 나갈 거냐?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지?”
“나 완전히 들어왔다니까! 오빠. 이제 내 나라에서 뼈를 묻을거야.”
“세계 어느 곳에서 죽어도 네 뼈는 내가 이 나라에 묻어줄 수 있는데...”
웃으면서 내뱉은 김원상의 말이 전혀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짬뽕이나 한 그릇 줘. 맥주 한 병이랑.”
“아직 해도 안 떨어졌는데, 술 마시게?”
“그래서 술 안 마시고 보리 음료 마시잖아. 시원한 거로 부탁해.”
주문을 넣으며 김원상의 얼굴에 짜증이 밀려왔다.
공부든 그림이든 동생을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던 김원상이 야심 차게 술로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무참하게 깨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인간미라고는 일도 없는 계집애. 뭐든 좀 모자라야 정이가지.’
빨갛고 해물이 가득 올라간 짬뽕이 나오자 오랜 외국생활에서 항상 얼큰한 국물을 그리워했던 생각에 김서원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와, 이 맛은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아.”
“아빠는 다시 만나봤고?”
“응, 어제 잠깐 생존 인사드리고 왔어. 아빠 욕심은 여전하시던데. 오빠 가게 근처에 경쟁업체가 생겼다며? 아빠가 은근 신경 쓰이시는 모양이더라.”
“별거 아니야. 젊은 놈 하나가 차린 작은 가게야. 우리 [만가복]하고는 비교가 안 되지. 너도 알지? [서풍] 서동수 아저씨 아들이래.”
“진짜? 그래서 이름이 [서풍TWO]였던 거였어?”
김서원은 어릴 적 아빠를 통해 들어봤던 서동수라는 이름을 듣자 오늘 만나고 온 서인우의 이름이 그제야 생각났다.
‘그 사람이 서동수 아저씨 아들이었어? 그래서 가게 이름도 그렇게 지은 거였구나.’
오늘 일 때문에 미팅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제시카, 아니 김서원은 [서풍TWO] 라는 가게에, 아니 더 정확히는 서인우 라는 사람에게 관심이 생겼다.
“넌 남자친구는 없어? 독일에서 멋진 놈하고 같이 들어올 줄 알았는데.”
“난 요즘 일과 연애 중이라. 그러는 오빠는?”
“나야 너무 많아서 문제지. 그런데, 일과 연애 중이라는 건 무슨 소리야? 너 어디 취직했어?”
김서원은 대답 대신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묘한 미소만 보였다.
“나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뭐가 됐든 나랑 부딪치는 일만 만들지 마라.”
“사람 일은 알 수 없지. 상황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장담 못 하는 거 아니겠어?”
맥주 한 병을 가볍게 마시고 김서원이 가게를 나가자
김원상의 표정이 매우 복잡해 보였다.
‘평생 외국에서 살 줄 알았는데, 왜 돌아와 귀찮게 하는 거지? 내 자리를 노리고 온 거라면 재미없어지는데.’
“아빠, 난 그냥 음악 하면서 조용히 살고 싶어요. 이런 큰 회사 운영할 자신도 없고, 무엇보다 오빠하고 후계자 자리를 놓고 싸우고 싶지 않아요.”“원상이 저놈은 너처럼 사람을 아우르는 힘이 없어. 야망만 가득해서 결국 성공한다 해도 주위에 따르는 사람이 없을 거다.”
김서원이 6년 전 독일 유학을 결심했을 때 아빠 김형식 회장과 나눈 대화를 우연히 들었던 김원상은 항상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살아왔다.
한 해 한 해 외국 생활에 적응하며 잊혔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돌아온 김서원이 다시 눈엣가시가 되어 버렸다.
* * *
박정원이 가지고 온 박스를 열어 보였다.
그 안에는 밀봉 포장된 우동면 비슷한 것이 들어있었다.
“이게 우리가 같이 만든 새우면이야. 아직 겉봉투 제작은 안 들어갔어. 우선 테스트를 좀 해봐야겠지?”
서인우는 자신이 만들었던 것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어진 새우면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럼 재료를 넣어 탕을 만들어 이 면을 넣으면 된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지, 그래서 오늘 원조인 서인우 셰프가 직접 테스트해보라는 얘기야. 뭔가 보완이 필요하면 대량 생산 전에 보완해야지.”
이준형이 밀봉 포장된 면을 꼼꼼히 살피며 물었다.
“밀키트로 만드실 생각이신 거죠?”
“그래. 역시 사업이나 영업 쪽은 여기 파트너가 확실히 전문이군. ”
신나 어깨를 으쓱해 보인 이준형이 얼른 면을 테스트해 보라고 인우를 재촉했다.
주방에 혼자 들어온 서인우가 채소와 해물을 손질해 탕을 만들 준비를 했다.
-백짬뽕이냐?
“사부, 면은 이걸로 할 거야.”
서인우가 손에 들고 있는 새우면을 흔들어 보였다.
-배 나온 심사위원이랑 사업 진행 중이군. 매번 직접 만들어 먹는 거와 얼마나 비슷할지 나도 궁금하기는 하네.
해물과 채소를 센 불에 볶아 시원하면서도 칼칼한 탕을 만들어 거기에 박정원이 만들어온 새우면을 넣었다.
면과 채소를 골고루 여러 개의 그릇에 담아 홀로 가지고 나왔다.
“그럼 한 번 시식해 볼까?”
박정원이 음식이 담긴 그릇을 가져가자 서인우, 이준형 그리고 정다운이 각각 자기 몫의 그릇을 가져갔다.
약간 상기되어 있는 박정원이 먼저 면을 집어 입에 넣었다.
후루룩 소리만 들어도 면이 얼마나 탱탱한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테이블 여기저기서 후루룩 면발 올라가는 소리가 경쾌했다.
“인우야. 이거 네가 만들어 준 거랑 거의 비슷해. 면이 탱글탱글하고 맛있어.”
“사장님, 이게 정말 밀가루가 안 들어간 면이라고요?”
정다운의 질문에 서인우가 답은 이 사람한테 들으라는 듯이 시선을 박정원한테 보냈다.
“서인우 셰프가 알려준 레시피에서 조금도 빼거나 더하지 않았네. 이건 서인우의 새우면이야. 어때? 이 정도면 성공인 것 같지?”
서인우가 다시 면을 집어 입에 넣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탱글한 식감과 동시에 새우 향이 느껴졌다.
예민한 그의 미각에도 밀가루 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새우면의 식감도 은은한 새우 향도 제가 만든 면과 같습니다. 단지...”
인우가 잠시 말을 멈추자 박정원을 비롯해 모두 긴장해 침을 삼켰다.
“단지 바로 만든 면이 아니다 보니 신선도를 어떻게 유지 할 것인지와 밀봉된 봉투를 뜯었을 때 나는 냄새가 좀 거슬리긴 하네요.”
“그 냄새는 좀 더 보완해볼 생각이고, 유통기한만 지켜주면 문제없어.”
이준형이 남은 국물까지 다 비운 후 티슈로 입을 닦았다.
“만약 제가 밀가루를 못 먹거나,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저는 무조건 이걸 사 먹을 것 같습니다. 단, 중요한 건 가격이죠. 가격이 모든 걸 결정할 것 같습니다.”
“맞아. 그래서 오늘 테스트도 하고 가격도 정해야 해서 내가 온 거야. 우선 맛이나 식감은 문제 없고...”
이준형이 고개를 끄덕이다 순간 멈췄다.
“면만 파는 상품하고 밀키트로 파는 상품, 이렇게 두 가지로 나가면 어떨까요?”
“새우면, 백 짬뽕 이렇게 두 가지 상품 말이지?”
“네, 식당에서는 새우면으로 그들만의 요리를 할 수 있을 것이고, 가정집에서는 밀키트로 새우면 백 짬뽕을 만들 수 있게 말입니다.”
이준형이 박정원과 서인우를 번갈아 쳐다봤다.
“우선 상품이 완성되면 우리 가게에서 이 새우면으로 만든 백 짬뽕을 새로운 메뉴에 넣어 판매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인우의 말에 박정원이 같은 뜻을 표했다.
몇 가지 보완하고 가격이 정해지면 바로 상품화해서 우선 두 사람의 가게에서 판매를 시작해 보기로 했다.
“그럼 이 새우면의 이름은 [박정원 × 서풍의 새우면]으로 하면 어떨까 하는데?”
“네, 그렇게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럼 빨리 움직여야겠군.”
박정원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제 마감 시간 아닌가?”
“네, 천천히 정리 해야죠.”
“그럼 다들 수고하고, 최종 완성품 나오면 다시 오도록 하지.”
박정원이 가게를 나가고 서둘러 정다운을 퇴근시켜야 했다.
8시에는 반드시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오늘따라 늦게까지 같이 있겠다고 고집을 피워 1시간이나 더 늦어졌다.
항상 정식출근 시간보다 몇 시간이나 일찍 나오는데, 이렇게 퇴근까지 늦어져 서인우는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몰랐다.
“다운 씨, 너무 늦었다. 빨리 집에 들어가. 그리고, 내일은 오후 늦게 나오고.”
“사장님. 저 [서풍TWO] 직원 1호 맞죠?”
“그럼, 직원 1호이면서 우리 식구지.”
“그럼 제가 일찍 나오든 늦게 퇴근하든 신경 꺼줘요.”
“응?”
서인우는 이제 정다운의 말투에 어느 정도 적응했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적잖이 당황한 서인우가 정다운이 던진 말의 의미를 파악해보려 애쓰고 있었다.
“나 솔직히 여기 일 돈 때문에 시작했어요. 물론 지금도 돈 버는 게 가장 큰 목표이구요.”
“그럼, 당연하지. 나도 악덕 사장 절대 사절이다.”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서인우가 좀 더 쉽게 설명해 주면 안 되겠냐는 표정으로 정다운을 쳐다봤다.
“사장님하고 끝까지 같이 일해보고 싶어요. 돈이 될 것 같단 말이에요.”
말을 하는 정다운의 비쩍 마른 볼이 붉게 상기됐다.
진심이 느껴졌다.
“고맙다. 우리 제대로 사고 한 번 쳐보자. 나 자신 있어. 열심히 할게.”
“좋아요. 대신 약속은 꼭 지켜요.”
“당연하지, 6개월 후 월급 두 배 인상 조건. 내가 반드시 지킨다.”
“하나 더요.”
“더?”
정다운이 두 손으로 요리를 만드는 모습을 흉내 냈다.
그 순간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이준형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요리 가르쳐 준다는 약속, 잊은 건 아니죠?”
“그럼, 당연하지.”
인우는 이준형의 못마땅한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그럼 내일 점심은 내가 다시 볶음밥으로..”
“나 내일 점심에 약속있는데.”
이준형이 허겁지겁 말을 뱉었다.
“알았어요.”
크게 안도의 숨을 몰아쉬고 있는 이준형을 향해 정다운이 한마디를 더해주었다.
“그럼 내가 만든 볶음밥은 내일 저녁으로 하죠.”
세상이 무너졌다.
이준형의 얼굴이 딱 그랬다.
뭔가 다른 핑곗거리를 찾고 있는 이준형의 어깨를 서인우가 툭 쳤다.
“내일 저녁 기대하자.”
이제 그냥 포기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준형이 멍하니 하늘만 바라봤다.
“다운 씨, 이왕 늦은 거 정리하고 같이 들어가자.”
“그래요.”
“그럼 가볍게 맥주 한잔, 콜?”
그새 얼굴에 화색이 돈 이준형이 둘을 향해 간절한 눈빛을 쏘아댔다.
“오늘 새우면 사업 기념으로.”
“그렇게 이것저것 기념 찾다간 매일 술 마시자 하겠네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정다운 또한 나쁘지 않은 표정이었다.
“우리 직원 1호가 원하신다면 나도 콜.”
서인우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듯한 정다운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맥주 한잔하자고 제안한 건 난데, 왜 내가 꼭 사정하는 것 같냐? 기분 이상하네. 나 삐졌어. 안 마셔.”
“그래? 그럼 다운 씨 우리 어디로 갈까?”
서인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준형이 테이블을 정리했다.
“다운 씨, 뭐해? 빨리 정리해야 술 마시러 가지.”
한바탕 웃음소리가 크게 울리고 난 홀에 드르륵 입구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년 어디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