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56화 (56/200)

제56화.

“어서 오세요.”

어깨에 닿는 밝은 갈색의 단발머리에 유난히 눈이 맑고 예쁜 여자 손님이 들어와 앉았다.

“여기 백 짬뽕 곱빼기 하나요.”

“네? 곱빼기요?”

흰색 면티를 슬랙스에 넣어 입고 체크무늬 재킷을 입은 호리호리해 보이는 몸매의 여자 입에서 나온 곱빼기라는 말에 이준형이 놀라 물었다.

“네, 공기밥도 하나 추가요.”

분명 다른 일행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주문지를 걸었다.

조금 전 그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이 음식이 나온 후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증명됐다.

어디서 면치기를 전수받아 왔는지 그릇에서 나온 면이 끊이지 않고 후루룩 여자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여기 소문대로 정말 맛있네요. 이런 국물에 밥을 안 말아 먹으면 그건 범죄예요, 범죄.”

그러면서 동시에 밥을 한 공기 다 말아 마치 첫 식사인 듯 먹어대는 여자가 그저 신기했다.

숨어있는 밥알까지 다 찾아 먹고 난 여자가 티슈로 입을 닦고는 간단히 화장을 고치고 계산을 했다.

“국물을 남겨서 죄송해요. 좀 전에 빵을 먹어서...안 그랬으면 국물까지 깨끗이 마셔 주는건데...”

계산을 위해 카드를 받으며 준형은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이게 빵을 먹어 실력 발휘하지 못한 거라고? 각 잡고 먹으면...아! 이 여자, 무섭다!’

“잘 먹었습니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문을 열고 나갔던 여자가 문이 닫히자마자 다시 열고 들어왔다.

“뭐 놓고 가신 거라도?”

준형의 질문에 여자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어깨에 메고 있던 커다란 가방에서 명함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인테리어 상담 원하신다고 연락받고 왔습니다. 제시카에요.”

“와, 대박!”

정다운이 이준형의 입을 틀어막을 새도 없이 말이 밖으로 나와 버렸다.

“조금 전에는 손님 모드, 이번엔 업무 모드입니다. 사장님 이신가요?”

“아니요, 아, 맞아요.”

“네?”

“저랑 음식을 담당하는 셰프겸 사장이 한 명 더 있습니다. 전화는 그 친구가 했구요.”

정다운이 의자를 당겨 주었다.

“우선 여기 앉으세요. 제가 사장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을 하는 정다운의 눈이 쉬지 않고 제시카의 헤어스타일과 옷, 신발 등을 스캔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어딘지 자기와 다르게 세련되 보이는 제시카의 외모가 퍽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고로 이쁜 애들하고는 친하게도 지내지 말라고 했는데...

주방으로 뛰어 들어간 정다운이 서인우를 불렀다.

“사장님, 인테리어 하는 사람 왔어요. 멋만 내고 일 잘하지 못하게 생겼어요.”

“뭐? 외모만 보고 어떻게 알아?”

“그냥 딱 보면 견적 나오죠. 뭐. 그냥 저는 반대에요.”

서인우는 정다운이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홀로 나간 서인우를 보자마자 제시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인테리어 전문업체 [바램 인테리어] 제시카입니다.”

“안녕하세요. 전화했던 서인우 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사업 파트너 이준형 이라고 합니다.”

제시카가 내민 손을 재빨리 잡아채며 이준형이 인사를 건넸다.

“전화 받을 때, 마침 근처에서 점심 해결하려고 맛집 찾던 중이었어요.”

“시간이 벌써 2시가 넘었는데 아직 점심 전이세요? 그럼 식사부터 하세요. 제가 서비스로 드리겠습니다.”

얘기하는 동안 계속 눈과 입으로 뭔가를 말하려 하는 이준형이 이상하게 느껴진 서인우가 물었다.

“너 어디 아프냐? 눈 아파?”

제시카가 큰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혀 알 길 없는 서인우는 둘의 얼굴만 계속 번갈아 쳐다봤다.

“조금 전 백 짬뽕 곱빼기 먹어 치운 사람입니다. 여기 동업자분한테는 말씀드렸지만, 국물이 정말 끝내줬습니다.”

제시카가 그새 다 소화된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러셨군요? 미리 말씀 하셨으면 서비스로 대접 했을 텐데요...”

“같이 작업하게 되면 그럴 기회는 많이 있겠죠? 정말 매일 매일 먹고 싶은 맛이에요.”

서인우는 털털하며 밝고 활발한 제시카가 편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중요한 건 감각과 가격이겠지.

자리에 앉자마자 제시카가 테블릿을 펼쳤다.

“제가 대전에서 소개받은 분 말씀 듣고 우선 몇 가지 스타일을 만들어 봤어요. 한 번 보시고 얘기하시죠.”

제시카가 보여준 화면에는 마치 외국에 있는 바닷가 샌드위치 집이나 호프집 같은 입구 모양이 3D로 펼쳐져 있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장통 입구에 젊고 잘생긴 두 남자가 운영하는 최고의 중화요리 집. 뭔가 특색을 잘 살리면 젊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장소로 인식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것도 좋지만...”

서인우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가장 중요한 건 기다리는 손님들이 여름에 시원하게 햇볕을 가릴 수 있고, 겨울에 조금이라도 찬바람을 가릴 수 있는 겁니다.”

제시카가 얘기하는 서인우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 남자 손님을 대하는 마음이 진심이네. 어려 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진지한 면이 있는 남자인데?’

“당연히 저는 때와 장소를 가리는 인테리어를 합니다. 실용성이 떨어지는 인테리어는 이 곳 [서풍TWO]에 어울리지 않죠.”

제시카가 준비해 온 디자인의 기능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두 번째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데요, 준형이 너는 어때?”

이준형은 테블릿보다 제시카의 설명하는 얼굴을 더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그래, 그걸로 하자.”

영혼 없는 대답이 나오자, 바로 테이블을 닦고 있는 정다운을 불렀다.

“다운씨. 여기 좀 와봐.”

정다운이 내심 궁금했는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여기 디자인 중에서 마음에 드는 스타일 있어?”

“저도 이 두 번째 꺼가 제일 좋을 것 같아요. 이 가게는 의도치 않게 레트로 감성이 물씬 묻어나서요.”

“정다운 씨라고 했나요? 이쪽에 감각이 있으신 것 같네요. 저도 같은 생각 했어요. 컨셉을 잡고 꾸미지 않았는데 레트로 감성이 아주 잘 살아나는 가게라고요.”

자기 의견에 동의를 표했는데도 뭔가 불만이 있어 보이던 정다운이 말을 이었다.

“워낙 구린 시장통에 쓰러져 가는 가게라서 그래요. 그걸 사장님 음식솜씨 하나로 살리는 중이죠.”

“무슨 요리 경연대회 최종 우승자라던데...맞죠? 맛보니 맞긴 맞는 것 같아요.”

이준형이 이제 자기가 나설 차례인가 하는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중화요리 최고의 고수를 찾아서]라는 요리 경연대회 최종 우승자 서인우. 그게 바로 이곳 셰프입니다. 방송 안 보셨나 보네요?”

“아, 제가 외국에서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요.”

“그 얘기는 그만하고... 그럼 컨셉은 정해졌고, 중요한 건 견적이네요. 이렇게 만들면 얼마나 비용이 들까요?”

“제가 현재 1인 사업자라 그 어느 곳보다 싸고 튼튼하고 편하게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제작 업체와 일대일로 가격 단판 딱 해서 견적 바로 쏘아드리죠.”

힘들다는 인테리어 업계에 홀로 뛰어든 여자.

서인우는 제시카라는 사람이 어쩌면 자기처럼 인생에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원시원하네요. 그럼 견적 받아보고 다시 얘기하도록 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일어서서 나가려는 제시카에게 서인우가 한 마디 더했다.

“다음에 견적 보낼 때 제일 좋아하는 메뉴 하나 같이 적어 보내요. 그리고, 식사하시지 말고 오시구요.”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방금 먹고 또 먹을 수 있으니까요. 하하.”

제시카가 다시 한번 큰소리로 웃어 보이고는 인사를 하고 가게를 빠져나갔다.

“저 여자 지금 한 말 진심이야.”

“무슨 말?”

“먹고 바로 또 먹을 수 있다는 거.”

인우가 별 싱거운 소리 한다는 표정으로 주방으로 몸을 돌렸다.

“네가 못 봐서 그래. 면치기 신공에다가 국물에 밥 한 공기 뚝딱 말아서 한 톨도 안 남기고 먹었어.”

“잘 먹어서 다행이네. 맛있었다는 거 아니겠냐?”

“허리가 한 줌이던데... 어디로 들어가는 건지...”

정다운이 일부러 더 액션을 크게 하며 테이블을 닦았다.

“남의 여자 허리는 언제 또 유심히 봐서는... 변태같이...”

“뭐? 나 그런 사람 아니야? 어디서 사람을 변태로 몰아?”

“아니면 다행.”

한마디 툭 던지고 급히 화장실로 몸을 피한 정다운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유심히 보았다.

삐쩍 마른 얼굴과 몸.

날씬하다면 조금 전 그 여자보다 더 날씬한데…. 전혀 멋지거나 섹시하지 않았다.

괜한 자격지심에 속이 상한 정다운이 살짝 틀어진 명찰을 바로 잡고는 저녁 장사 준비를 시작했다.

“사장님, 만두는 현재 얼마나 가능하죠?”

“오늘 5인분 남아있어.”

“저녁 장사 시작하자마자 끝나겠네요. 알겠어요.”

만들어 놓은 만두의 양을 확인하고 있는 인우의 옆에 언제 나타났는지 이준형이 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서 있었다.

“곧 저녁 손님 들이닥칠 텐데 왜 정신이 나가 있냐? 그것도 내 영역에서.”

“우리 만두 포장 판매해 볼까?”

“포장 판매?”

“응, 가게가 작아서 한정판매를 하고 있지만, 우리 가게 이름 걸고 만들어서 전국에 택배 판매를 한다거나…. 아니면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팔면 어때?”

인우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나쁘진 않은데...지금 가게 장사로도 너무 바빠. 손이 부족해.”

“네가 만두소만 대량으로 만들어 놓으면 알바를 더 구하든, 어머니나 가족들 도움을 좀 받아서...”

“그래, 한번 고민해보자.”

“내가 오늘 퇴근 후에 인건비, 재료비 다 따져서 손익계산서 뽑아볼게. 이해타산이 맞아야 하는 거니까.”

이준형이 주방을 나가자 중식도가 뱅그르르 돌다 인우 앞에 멈춰 섰다.

-나를 아주 과로사시킬 작정이군.

“사부, 내가 [서풍TWO]라는 이름으로 가게를 시작하면서 꼭 지키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어.”

-넌 자꾸 쑥스럽게 왜 그래... 나도 알아. 네가 나를 얼마나 생각하고 아끼고...

“몇 년이 지나도 절대 변하지 않는 맛. 난 그걸 꼭 지킬 거야.”

-응? 네가 지키고 싶다는 게 그거였어?

인우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그러려면 사부를 꼭 지켜야겠지.”

-이건 뭐 대놓고 화도 못내겠고... 내가 졌다.

중식도와 잠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주문이 들어왔다.

웍에 불길이 확 일며 매콤한 짬뽕을 만들어 내고, 튀김옷을 입힌 돼지고기를 기름에 넣어 화려한 꽃이 피면 새콤달콤한 소스에 볶아 탕수육을 만들었다.

잠시 쉴 틈도 없이 요리를 만들어 벨을 누르면 정다운과 이준형이 번갈아 가며 서빙을 했다.

그렇게 한 참 음식을 만들어 대고 있는데 이준형과 정다운의 인사하는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어서 오세요.”

그 소리와 동시에 홀이 시끌시끌해졌다.

“저 사람...”

“박정원이다. 맞지?”

“우리 사진 찍자. 네가 얘기해봐. 얼른.”

재빨리 주방으로 들어온 정다운이 서인우를 급하게 불렀다.

“사장님, 밖으로 좀 나와 보세요. 박정원 사장님 오셨어요.”

박정원 사장님?

우리 직원 1호 정다운은 이제 언니나 오빠, 선배라는 호칭보다 사장님이라는 호칭이 편한가 보다.

아직 어색하기만 해야 할 호칭인데….

그런 생각을 짧게 끊고 홀로 나가자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던 박정원의 얼굴이 보였다.

특유의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손님들의 요구에 맞춰 사진을 찍어 주고 있었다.

그때였다.

“꺅! 서인우다. 정말 서인우 맞네.”

40대로 보이는 여자들 네 명이 앉아 있던 테이블이 난리가 났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박정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서인우에게로 모여들었다.

잠시 뻘쭘해진 박정원이 어색하게 쓴 입맛을 다셨다.

옆에 서 있던 이준형이 슬쩍 한마디 건넸다.

“그 기분 익히 잘 압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말을 하는 이준형의 표정도 과히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박정원이 조용히 서인우를 기다렸다.

가지고 온 커다란 박스는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런데, 이건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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