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대한민국 중식계에서 가장 크고 유명하다는 [만가복] 회장이 번호표를 받아 기다렸다 음식을 먹고 갔다.
그 사실이 [서풍TWO]에 이상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쟤 왜 저러냐?
‘내 요리를 배우고 싶다니까 좀 봐줘.’
-자꾸 안될 때마다 짜증 내니까 그러지. 한마디 해주고 싶은데...참 그것도 안 되고.
주방에 준비된 중식도를 손에 들고 씩씩거리고 있는 정다운이 양파를 썰며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다.
“사장님. 이제 재료는 다 준비됐어요.”
“그럼 오늘은 불맛 내는 걸 연습해 보자. 화력을 최대로 하고 웍을 기울여서 불이 붙으면 재빠르게 저어 그 불을 끄는 거야.”
옆에서 바로 시범을 보이는 서인우의 웍에 크게 불길이 일었다.
순간 뒤로 몸을 빼고 있는 정다운의 눈에 두려움이 가득해 보였다.
“할 수 있겠어?”
“그럼요. 이 정도는 껌이죠.”
자신 있게 대답한 정다운이 웍을 기울여 재료에 불이 붙자 그대로 웍을 잡은 손을 놓아버렸다.
“꺄악.”
동시에 비명이 주방에 가득했다.
제대로 불이 붙은 재료는 이미 까맣게 타버렸다.
-요리는 아닌 것 같으니까 그만 손을 떼라고 전해라.
“뭐야? 무슨 일이야?”
잠시 쉬고 있던 준형이 소리에 놀라 뛰어 들어왔다.
“왜 우리 주방에서 소방 훈련을 하고 있냐? 정다운 진짜 요리 계속 배울 거야?”
“그런다니까요. 남의 일에 신경 꺼요.”
“이게 왜 남의 일이야? 내 가게가 홀랑 불타게 생겼는데?”
정다운이 재주도 좋게 눈의 흰자위를 잔뜩 보이며 이준형을 노려봤다.
“나도 요리 잘하고 싶다고요. 사장님처럼 요리로 돈 많이 벌고 싶단 말이에요. 할 수 있어. 나 잘 할 수 있어요.”
-아니, 너는 아니라고 본다.
‘열심히 하면 못할 것도 없지.’
-그건 어느 정도 기본기가 있을 때 말이지. 채소를 장작 패듯이 썰어놨는데, 불에 태워 증거인멸을 해버려서...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고 항상 말하던 분은 어디 가셨나?’
-쟤는 백날 아침 해도 안된다니까.
정다운이 다시 채소를 다졌다.
“뭐 하려고?”
“오늘은 내가 볶음밥 만들 테니까, 그걸로 일찍 저녁 대신 먹어요.”
서인우와 이준형의 얼굴에 시커먼 먹구름이 가득했다.
열심히 채소를 다져 볶음밥을 만드는 정다운 곁에서 인우를 끌고 멀찍이 떨어진 준형이 작게 귓속말을 했다.
“여기 네 주방에 먹고 죽을 수도 있는 뭐 그런 재료는 없지?”
“걱정하지 마. 다 신선하고 좋은 재료만 있으니까.”
“나 배탈 났다고 하고 피할까? 엄마가 탄 음식 먹으면 암에 걸린다고 했는데...”
인우가 피식 웃고는 다운의 요리를 지켜봤다.
곧 저녁 장사 준비를 해야 하는 인우가 내준 귀한 1시간이 거의 다 되어갔다.
그래도 방금 많이 놀랐는지 불맛 내는 건 포기한 듯했다.
최대한 혼자 해본다고 나가 있으라는 말에 멀리 떨어져 있던 인우는 묵묵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한참이 걸려 다 완성했는지 접시 세 개에 볶음밥을 담아 다가온 정다운의 얼굴에 처음으로 생기가 넘쳐 보였다.
“너무 맛있어서 자꾸 해달라고 조르지 마세요.”
“응, 그래. 안 그럴게.”
빛보다 빠른 이준형의 대답에 정다운이 또다시 무시무시한 흰자위를 보이며 노려봤다.
저러다 눈이 뒤집히지 싶을 만큼 검은 눈동자를 찾기 힘들었다.
서인우가 먼저 숟가락을 들자 억지로 같이 손을 뻗는 이준형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크게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은 인우가 아무 말 없이 밥을 꼭꼭 씹었다.
표정의 변화가 거의 보이지 않자 더욱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준형이 숟가락 끝에 밥알을 세어 올렸다.
“누가 밥을 이렇게 먹어요?”
순간 준형의 숟가락을 뺏어 듬뿍 볶음밥을 담아 다시 쥐여준 정다운이 기분 나쁜 표정을 얼굴 전체에 드러냈다.
“헉!”
볶음밥을 입에 넣자마자 준형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맛있죠? 놀랐어요?”
“응. 정말 놀랍다.”
“그럼 많이 먹어요.”
“너 어떻게 이 꼬들밥으로 이런 떡을 만들 수가 있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뭐요? 떡이요?”
정다운의 흰자위가 다시 등장할까 말까 폼을 잡는 사이 서인우가 웃음을 내보였다.
“기름을 과하게 많이 넣었고, 국자로 툭툭 밥알을 쳐주라고 했더니 너무 눌렀다. 중식 볶음밥의 핵심은 밥알이 탱글탱글 살아있는 건데...”
“차라리 떡을 배워보면 어때?”
“이 아저씨가….”
결국 정다운의 흰자위가 다시 등장했다.
“시간이 좀 짧았던 거 인정요. 다음 주에 다시 만들어 줄게요.”
“안 그래도 될 것 같은데...”
준형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뭐요? 다시 말해봐요.”
“어? 다음 주를 기대한다고.”
정다운이 그래도 나름 만족스러운지 다음 주에 대한 기대 가득한 얼굴로 주방을 나갔다.
-쟤 나는 절대 손대지 못하게 해라. 칼날이 어디로 향할지 나도 장담 못 한다.
‘걱정하지 마. 사부는 나 외의 다른 사람은 절대 손 못 대.’
-그러니까 나는 영원히 너에게 구속되는 거라는 거지…. 아름다운 구속?
‘뭐래?’
-넌 가끔 나를 들었다 놨다 해. 이런 요리의 고수가 아니라 밀당의 고수구나?
‘됐고, 저녁 준비나 하자고.’
인우는 기름을 한 사발 마신 것처럼 아직 입안에 느끼함이 남아있자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준형처럼 직접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다음 주 맛볼 정다운의 요리가 겁이 나기 시작한 건 사실이었다.
* * *
자리에 앉아 멍하니 빈 찻잔만 바라보고 있던 김원상은 아버지의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답답했다.
마영준과 아버지 김형식 사이에 뭔가 있을 거라는 짐작은 했지만, 그가 몇 년을 고생해 정상의 자리에 올려놓은 메뉴를 빼앗을 계획을 세우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도 못 한 일이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남의 가게 메뉴를 왜 따라 해야 하는데요?”
“그 가게 차릴 때 마영준 그자가 나한테 빚을 많이 졌지. 이제는 그 빚에 이자가 불어 그자 능력으로는 절대 갚지 못할 줄 알았는데.. 그 가게를 접수 할 절호의 기회였단 말이야.”
“그래서, 이번 경연대회에서 서인우를 떨어트리라고 그를 조종한 겁니까? 그 모든 과정이 아버지가 짜놓은 판이었다는 얘기냐고요?”
김형식이 돋보기를 벗어 테이블에 던졌다.
“멍청한 놈. 줄을 섰으면 제대로 바짝 달라붙어 있어야지…. 어디서 주제에 양심을 내세우고 말이야.”
마영준이 갑자기 마지막 결승전에서만 서인우의 요리를 인정하고 만점을 줬었다.
그게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고...
둘만의 계약을 져버리고 양심을 되찾은 결과가 밤낮으로 요리 연구하며 이제 어느 정도 인기와 인지도를 얻은 그의 가게를 빼앗길 뻔했다.
아마도 그 가게를 내 손으로 빼앗고 내 것으로 만들라고 했겠지...
순간 머리가 띵하고 아파져 왔다.
요리에 얼마나 많은 열정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열심히 얘기해 주었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의 인생이 걸린 가게잖아요?”
“네 놈은? 네 인생은 상관없어?”
“여기서 갑자기 내 인생이 왜 나옵니까?”
김형식이 한겨울 북풍보다 더 차가운 시선으로 김원상을 바라봤다.
“내가 마지막으로 너에게 주는 기회다. 이번에 서인우 그 놈 때문에 그 가게를 접수 못 했지만, 절대 이대로 놔둘 수는 없어.”
“아버지!”
“아직 후계자 자리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걸 기억하라고. 서원이가 들어와서 너도 긴장하고 있을 텐데... 안 그래?”
아니라고!
그 애 정도는 무시하고 내가 차지할 수 있다고...
크게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서원이 이름에 입안이 타들어 가는 자신을 느끼며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참 잔인하시네요.”
“아주 현실적이고 냉철한 거지. 내가 어떻게 이루어놓은 회사인데...네가 이 모든 걸 이끌어 갈 수 있는 그릇이라는 걸 이 기회에 증명해 보이라고.”
“좋습니다. 아버지가 원한다면 기꺼이 맹수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잔인한 놈이 되어 드리죠.”
“이제 조금씩 마음에 들려 하는군. 넌 내 아들이라 날카로운 송곳니를 지니고 있어. 더는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고.”
김원상이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만가복]이라는 무게를 실어 한 번에 몰아붙여. 꿈틀거리지 못하게.”
“그러죠. 지금 아버지가 나한테 하는 것처럼 그렇게 꼼짝 못 하게 몰아붙이겠습니다. 됐습니까?”
다시 돋보기를 쓴 김형식이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행동으로 보여. 그게 힘이야.”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회장실을 빠져나온 김원상은 곧장 한강으로 향했다.
답답한 마음을 잠시라도 가라앉히고 싶었다.
대회를 통해 잠시나마 요리에 열정을 되살리게 됐던 지난날들이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아버지를 거역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괜한 화풀이로 잔잔하게 반짝이는 한강 물에 돌을 집어 던졌다.
멀리 날아가지도 못하고 물속으로 빠져 사라져 버린 돌멩이가 자신의 모습 같아 씁쓸했다.
* * *
토요일 바쁜 점심시간이 지나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부리고 있던 서인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모부, 안녕하세요.”
-지금 좀 한가한 시간이지?
“네, 커피 마시며 쉬고 있어요.”
-지난번 말했던 가게 그늘막 설치하는 거 말이다. 아직 내 도움은 안 받는다고 했고, 대신 이 가게를 조금이라도 돋보이게 해줄 사람 하나 소개해 줄 테니 그건 거절하지 말아라.”
“무슨 말씀이세요?”
-가게가 작고 낡았지만, 손님들 기다리는 공간을 좀 색다르게 꾸미면 그게 또 포인트가 될 수 있지 않겠냐?
인우가 마치 마주 보고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우리 가게의 트레이드 마크가 될 수도 있고요.”
-최근에 내가 알아본 사람인데, 제시카라고 이미 인테리어 쪽에서 새롭게 뜨고 있는 사람이야. 문자로 이름하고 핸드폰 번호 줄 테니까 연락해봐.
“외국인이에요?”
-이름은 외국 이름인데 한국 사람이야. 얼마 전에 예쁜 카페 인테리어 보고 알아본 사람인데, 규모는 작은데 센스 있게 잘하는 곳인 것 같더라.
“연락해볼게요. 감사합니다, 이모부.”
-그래, 수고해라.
통화하면서 마신 커피가 바닥을 드러내자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있던 인우에게 준형이 다가왔다.
“무슨 전화야? 우리 가게 트레이드 마크 뭐 어쩌고 하던데... 그건 나 아닌가?”
“죽을래?”
준형이 피식 웃고는 설명을 요하는 눈빛을 쏘아댔다.
“지난번 이모부가 말씀하신 거 있잖아. 가게 입구에 손님들 기다리는 그늘막 같은 공간 만들자는 얘기.”
“아, 기억나. 누구 소개해주신다는 거야?”
“이모부가 알아보신 사람이라고 이름하고 번호 주셨어.”
인우가 문자를 다시 확인하는 걸 지켜보던 준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시카? 왠지 아이돌 같은 이름 아니냐? 젊고 예쁜 여자면 무조건 하는 걸로.”
“지금 알바 면접 보냐? 인테리어 컨셉이랑 가격이 맞아야 하지.”
“얼굴 이쁘면 그런 건 다 맞추면 되는 거야.”
옆에서 듣고 있던 정다운이 이준형을 노골적으로 노려봤다.
괜히 헛기침하며 서인우에게 바짝 붙은 이준형이 계속 고갯짓을 했다.
“뭐?”
“지금 통화해봐.”
“안 급해.”
“너 요즘 우리나라가 아열대 기후로 바뀌고 있는 거 알아 몰라? 곧 더워질 텐데... 비도 많이 올거고... 하루라도 빨리 설치해야지. 우리 가게를 찾아주시는 고마운 손님들을 위해서.”
이준형의 등살에 결국 이모부에게 받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혹시 인테리어 하시는 제시카 씨 인가요?”
-네. 그런데요?
“안녕하세요. 대전 윤동현 씨 소개로 전화 드렸습니다.”
-아, 말씀 들었습니다. 이 번호로 주소 좀 찍어주세요. 마침 근처라 가게도 미리 볼 겸 한 번 가볼게요.
“알겠습니다. 주소 바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핸드폰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이준형이 물었다.
“뭐래?”
“가게로 온대.”
“지금?”
“몰라, 아무 때나 오겠지 뭐. 근처라고 하던데.”
서인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간 이준형이 머리에 물을 묻혀 넘기고 나타났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던 정다운이 한마디 툭 뱉었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뭐?”
“아, 혼잣말이에요.”
이준형이 씩씩거리며 정다운을 노려보고 있는 순간 가게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