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51화 (51/200)

제51화.

“마영준 어디 있어?”

지난번 가게를 찾아왔던 덩치 큰 사내와 머리에 왁스를 잔뜩 발라 심하게 세운 사내, 그리고 새로운 등장인물이 둘 더 보였다.

“나 여기 있소.”

“어? 손님이 와있었네? 어떻게 돈은 장만했으려나?”

“지금 은행 가서 바로 부칠 겁니다. 그러니, 내 가게에서 당장 꺼져!”마영준의 눈과 목에 핏발이 제대로 생겼다.

흠칫 놀랄 만큼 진정한 좀비의 비쥬얼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생각지 못한 전개 때문인지 왁스 사내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뭐? 돈을 갚겠다고? 에이, 설마 이자를 보낸다는 말은 아니겠지?”

마영준이 보란 듯이 콧바람을 세게 일으키며 비웃어 주었다.

“지금 바로 정확히 1억 보내주지. 못 믿겠으면 따라오든지.”

항상 두 배 세배 걷잡을 수 없는 이자를 요구하는 그들에게 목줄 묶인 강아지처럼 끌려갔었다.

지금 그들에게 소리치는 이 순간이 얼마나 속이 시원한지는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이런 경험을 하게 해준 서인우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 마음을 담아 서인우를 바라보자, 마치 말을 안 해도 안다는 듯 서인우가 화사한 미소를 품은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럼 지금 바로 가실까요?”

사내들은 깡그리 무시한 채 서인우가 마영준에게 먼저 나가라는 손짓을 보였다.

“잠깐!”

왁스 사내가 서인우 일행 앞을 막아섰다.

“넌 뭐야? 지금 나랑 여기 이 마영준이랑 할 얘기가 있으니까 어린놈은 좀 빠져있어.”

“아, 그럴까요? 그럼 나중에 김형식 회장한테 정강이 좀 걷어 채일 텐데요.”

“뭐? 이 새끼가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김형식 회장이 분명히 마영준 셰프님 옆에 있던 젊고 잘생긴 남자가 누구였는지, 누가 그 돈을 해줬는지 물어볼텐데..”

서인우가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안 궁금하면 말고. 우리는 이제 은행 가서 처리할 거 처리하고 커피나 마시러 갑시다.”

그새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가 된 왁스 남자가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이건 내가 생각한 시나리오가 아닌데…. 부모, 친구 누구 하나도 도와줄 사람 없다는 거 뻔히 아는데, 넌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이야?”

“김형식 회장한테 전해. [서풍]의 서동수 아들 서인우라고.”

더 할 말이 없다고 판단한 서인우가 먼저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길 때였다.

어깨가 유독 넓은 사내가 거칠게 서인우의 어깨를 밀쳤다.

“에구, 미안하게 됐시다. 내가 어깨가 워낙 넓어서 사람들하고 자꾸 부딪치네.”

“앞으로 조심하면 되겠네요. 그럼.”

다시 한 걸음 떼려 하자 조금 전과 똑같이 사내가 어깨를 들이밀려 했다.

그 순간 이준형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김 기자, 난데 내가 영상 하나 보낼 테니까 이거 너희 방송국 뉴스 시간에 올려줘. 중요한 제보니까 9시 뉴스에 나가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어깨 사내가 움찔하더니 왁스 사내를 힐끗 쳐다봤다.

왁스 사내가 바닥에 다시 한번 침을 뱉더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도 시끄러워지는 건 딱 질색이야. 아직 돈이 들어온 건 아니니까 좀 기다려 보자고.”

그 말에 어깨 사내와 새로운 등장인물이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만들어 주었다.

가게를 막 빠져나오려는데 이준형이 다시 몸을 돌렸다.

서인우와 마영준이 무슨 일인지 놀라서 쳐다보고 있었다.

“영수증.”

“뭐?”

“원금을 다 갚았다는 영수증이 있어야 우리도 돈을 보낼 거 아닙니까? 댁들을 어떻게 믿고 그 큰돈을 보내요?”

왁스 사내가 기분 나쁘다는 듯이 눈을 치켜떴다.

작게 찢어진 눈에 흰자위만 가득한 모습이 섬뜩한 느낌까지 들었다.

말은 강하게 하고 있지만, 이준형의 꽉 쥔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돈 먼저 보내. 그럼 바로 영수증 만들어 줄 테니까.”

“아니, 영수증을 먼저 보여주세요. 그걸 확인하고 돈을 부칠 겁니다.”

서인우가 차분한 어조로 당당하게 맞섰다.

왁스 사내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뭔가 계획대로 되지 않아 불안한 듯 보였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핸드폰을 들고 가게 밖으로 나간 왁스 사내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구석을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이 새끼가 이 번호로 전화하지 말라고 했는데, 잊어버렸어?”

-아, 아닙니다. 회장님. 지금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뭐가? 마영준이 계약서를 넘길 수 없다고 하나?”

-아니, 그게 아니라... 원금을 갚겠답니다.

“뭐라고? 그놈이 무슨 재주로?”

-옆에 다른 놈이 도와주는 것 같았습니다

김형식의 미간이 순간 일그러졌다.

“다른 놈?”

-혹시 회장님 [서풍]의 서동수 아들이라던데, 서인우라고... 저도 지금 생각났는데 그때 요리 경연대회...

“닥쳐.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미련하게.”

-죄, 죄송합니다.

수화기 너머로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늘만 넘기면 되는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그게 회장님. 서인우 옆에 또 한 놈이 우리 모습을 다 찍어서 방송국 친구한테 보냈습니다. 여차하면 뉴스에 내보낸다고.

“뭐? 이 멍청한 새끼. 일을 그렇게밖에 처리 못 해?”

-은행도, 친구나 부모도 다 막아놔서 절대 돈을 장만할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저 서인우라는 놈이 나타나서 일이 꼬여 버렸습니다.

“서인우 이 새끼, 재수 없게 사사건건 나랑 엮이는군. 가만히 놔두면 안 되겠어. 오늘은 우선 철수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또 뭐?”

얼굴도 보지 않고 통화만 하고 있는데도 왁스 사내가 쩔쩔매고 있었다.

-원금을 다 갚을 테니 정확한 영수증을 해달라고...

“이런 제길. 하.”

한숨을 짧게 내쉰 김형식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선 처리해 주고 철수해.”

-네, 뒤탈 없이 잘 해결하고….

뚝!

전화가 끊겼다.

습관인 듯 바닥에 다시 침을 퉤 뱉은 왁스 사내가 주변을 쓱 둘러보고는 다시 마영준의 가게로 향했다.

“김형식 회장이 뭐라고 합디까?”

“무슨 소리야? 그 사람이 누군데 자꾸 말하고 그래? 난 그런 사람 모른다고.”

“여튼 확실한 영수증 확인되는 즉시 바로 원금 갚도록 하겠습니다.”

왁스 사내가 서인우를 잡아먹을 듯하게 눈총을 쏘아댔다.

그리고는, 어깨 사내에게 고갯짓하자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작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들었다.

마영준 역시 지난 번 정리해 둔 남은 원금 액수가 찍힌 영수증을 꺼내 꼼꼼하게 비교하고 확인했다.

그새 믿음이 생겼는지, 이준형에게 다시 한번 확인을 부탁했다.

어깨에 힘이 스멀스멀 들어가기 시작한 이준형이 두 개의 영수증을 하나하나 샅샅이 확인했다.

“내용 확인됐습니다. 인우야, 네가 은행 가서 돈 부치고 연락해주면 우리가 여기서 영수증 확인하고 남은 빚 다 없애버리도록 할게.”

“그래, 수고 좀 해줘.”

서인우가 가게를 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사내들의 표정이 한 판 신나게 놀러 왔다가 김이 팍 새버린 모습이었다.

10분쯤 흘렀을까?

서인우로부터 전화가 들어오고 정확히 1분 후에 사내에게 문자가 하나 날아 들어왔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김형식의 차명 계좌에 입금이 확인됐다는 문자임이 틀림없었다.

다시 10분쯤 후에 서인우가 돌아올 때까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던 사내들이 쭈뼛쭈뼛 가게를 나섰다.

그냥 가기 서운했는지 한마디 남기고.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야. 내가 지켜볼 거야.”

사내들이 우르르 가게를 나가고 나자 마영준이 서인우로부터 받은 입금 확인 영수증과 남은 빚이 모두 청산됐다는 영수증을 번갈아 쳐다봤다.

눈시울이 붉어진 마영준이 서인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제 정말 [서풍]의 새바람을 일으킬 수 있도록 내가 목숨을 걸고 일해 보여줄 거야. 날 믿어 준 오늘이 절대 후회되지 않게 최선을 다할걸세. 정말 고맙다.”

“그럼 오늘 이후로 제가 편하게 선배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야 당연하지. 일도 인생도 다 선배니까 앞으로 선배다운 면모를 보이기 위해 애쓰도록 하지.”

이준형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냥 있을 그가 아니었다.

“그럼 선배님은 내일부터 다시 영업 하셔야 하니까 준비하시고, 저희는 저녁 장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잔 거 하게….”

“선배님 어제도 과음하셨다. 다음에 하자.”

서인우가 급히 말을 끊었다.

“아니야, 이런 날은 기념해야지. 영업 끝나고 전 직원 우리 가게로 와. 내가 솜씨 좀 발휘해 볼 테니까.”

“전 직원이라고 해봤자 우리 둘에 여직원 하나입니다. 여직원은 저희 가게에 모셔서 소개해 드리도록 하죠. 오늘은 저희 셋이 가볍게 한잔하면 좋겠는데요.”

서인우는 오전에 봤던 어두운 정다운의 표정을 떠올리며 오늘은 일찍 퇴근시켜줘야겠다 마음먹었던 참이었다.

“그럴까? 그럼 오늘은 가볍게 한잔하지. 내 감사의 뜻과 젊은 사업가 둘과의 인연을 기념하면서 말이야.”

“좋습니다. 그럼 일 마무리 하는 대로 오겠습니다. 파이팅 하십시오.”

마영준이 서인우의 손을 다시 한번 잡았다.

“정말 진심으로 고맙다. 평생 잊지 않을게.”

서인우 또한 그의 손을 맞잡았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시작한 10년 계획에 선배님도 이제 함께하시는 겁니다. [서풍]의 바람이 어디까지 불게 될지 지켜봐 주세요.”

서인우와 이준형은 가게를 나오며 두 번 세 번 인사하는 마영준을 뒤로 하고 바쁜 걸음으로 [서풍 TWO]로 향했다.

“준형아, 좀 전에 방송국 누구한테 전화한 거냐? 너 아는 사람이 기자야?”

“아, 우리 엄마.”

“뭐?”

“급한 대로 전화했다가 미친놈이라고 욕 엄청나게 먹었다. 그 덩치들이 핸드폰 확인할까 봐 심장 쫄려 죽는 줄 알았다.”

둘이 낄낄대고 웃다 가게에 도착해보니 정다운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쟤 눈빛 왜 저러냐? 너 먼저 들어가.”

“다운 씨. 우리가 좀 늦었지? 그 사이 손님이 온 건 아니고?”

“다행히 손님은 없었어요. 그런데, 손님 올까 봐 내가 얼마나 떨었는지 알아요?”

서인우가 백만 불짜리 미소를 띠어 보냈지만 그닥 효과가 있지는 않았다.

“안 되겠어요.”

“응? 뭐가?”

“이런 때를 대비해서 나도 요리를 좀 배워놔야겠어요.”

그 손목에 그 성질로?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 기회 되면 내가 하나씩 가르쳐 줄게.”

“그 말 꼭 지켜요. 그리고 아저씨.”

슬금슬금 반대편으로 돌아서는 이준형을 불러 세웠다.

“어? 나 아저씨 아니라니까. 그런데 왜?”

“저 냅킨 아저씨가 접었어요?”

“그럼, 내가 어제 다운 씨 퇴근하고 다 접어놨지? 나 좀 멋지지 않냐?”

하지만, 정다운의 반응은 달랐다.

“모양이 반대잖아요? 아저씨 바보야? 내가 한 시간 내내 다시 접었어요. 정말 도움이 안 돼.”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다운 씨가 접어놓은 거 펼쳐서 보며 따라 했단 말이야.”

“반대편에서 보고 따라 했으니 거꾸로 접지. 문과생 맞네.”

“아!”

조금 전 마영준의 가게에서 덩치들과 대치 상황에 멋진 모습을 보였던 서인우와 이준형은 간데없고, 조그마한 정다운 앞에서 잔뜩 움츠린 어깨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모습이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미안해. 앞으로는 제대로 할게.”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새침하게 돌아서는 정다운도 웃음을 참는 듯 보였다.

서인우는 그들과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정말 좋았다.

이제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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