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50화 (50/200)

제50화.

“계약서를 지금 당장 만들라는 얘기야?”

“친구야, 난 뛰어난 스펙의 네 능력을 믿어. 난 요리에만 전념하면 되는 거지?”

“사고는 자기가 쳐놓고 나한테 수습하라는 거냐?”

“분명 우리한테 엄청난 성공의 기회를 안겨줄 거야. 자신 있어.”

“그놈의 자신은...”

서인우가 환하게 미소를 날렸다.

“웃지 마, 시간도 없고, 머리도 복잡하단 말이야.”

“커피 맛있게 내려줄게. 능력자 친구.”

이준형이 흰자위를 잔뜩 드러내며 서인우를 노려봤다.

왠지 따끔거리는 뒷통수를 긁적이며 주방으로 들어간 서인우는 그라인더로 커피를 갈았다.

고소하고 향긋한 커피 향이 온 주방에 가득했다.

그때였다.

중식도가 뱅그르르 돌더니 서인우 앞에 멈춰 섰다.

-잘한 결정이다.

“응? 뭐가?”

-그 심사위원. 정말 열심히 살고 능력도 뛰어난데, 김형식의 손바닥 안에서 헤어나오질 못했어. 인우 너한테 큰 힘이 될 거다.

인우는 말없이 그저 놀란 눈으로 중식도를 한참 쳐다봤다.

-나 멋졌어? 왜 그렇게 오래 쳐다보는데?

“사부! 도대체 사부의 능력이 어디까지 인거야? 얼마나 아는 거냐고?”

-자꾸 알려고 하지 마. 그러다 다쳐.

“장난하지 말고. 정말 사부는 신(神)인 거야? 도깨비 뭐 이런 거?”

-나도 세상 모든 일을 다 알지는 못해. 순간순간 보이는 게 다야.

인우는 중식도를 요리조리 꼼꼼하게 살펴봤다.

-뭐하냐?

“혹시 말이야. 내가 없을 때는 사람으로 변하고 뭐 그러는 거 아니야? 멀리 날아갔다 온다거나.”

-너 어제 잠 못 잤다고 했지? 지금 눈뜨고 꿈꾸냐?

“너무 신기하잖아. 움직이는 것도 말하는 것도 믿기지 않았는데, 이제 내가 말하지 않은 것도 다 알고 말이야.”

-그냥 범상치 않은 인물이 네 곁에 나타났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잘해.

서인우는 계속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직접 보고 듣고도 믿기지 않는 상황에 아빠도 똑같은 경험을 했을 거라 생각하니 그저 경이로울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계속해서 중식도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데 정다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가움에 홀로 달려 나간 서인우는 정다운이 다른 날보다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는 게 신경 쓰였다.

“다운 씨 왔네.”

말없이 고개만 까닥하는 정다운의 눈이 붉게 충혈되고 살짝 부어있었다.

‘이럴 때는 아는 척하지 않는 게 도와주는 거겠지?’

“다운 씨. 어제 라면 먹고 잤어? 눈이 퉁퉁 부었...”

조금 전까지 능력자라고 칭찬해 줬던 거 바로 취소다.

이준형은 머리도 좋고, 계산도 빠르고, 컴퓨터도 능하고 정말 다재다능한데, 딱 하나 눈치가 없다.

서인우가 급하게 팔을 잡아끌자 그제야 눈치를 챈 이준형이 무슨 일인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정다운을 힐끗힐끗 쳐다봤다.

정다운이 앞치마와 명찰을 가지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야, 다운 씨. 운 거 같지?”

“그런 거 같으면 좀 모른 척 해주지.”

“식구라며? 관심을 가져야 식구지.”

“이럴 때 상대방의 기분을 배려해 주고 기다려줘야 진정한 식구인 거야. 궁금하다고 다 알려고 하지 말고.”

입을 삐죽거리고 서 있던 이준형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난 남자 형제만 있어서 여자들 감성은 정말 어렵더라. 우리 엄마만 해도 그래.”

“뭐가?”

“아빠가 잘못했다고 그러면 뭘 잘못했는지 아냐고 따지고, 아빠가 뭣 때문에 미안하다 사과하면 알면서 그런 짓을 했냐고 따진다니까.”

서인우도 어릴 적 엄마와 아빠가 다툴 때 많이 들었던 레퍼토리라 그저 웃고만 있었다.

“그래서 요즘 우리 아빠는 매일 쇼파 제일 끝에 앉아계셔. 그것도 우리 집 해피랑 같이.”

“그건 또 왜?”

“쇼파 끝자리가 부엌에서 사각지대라고, 그리고 해피랑 같이 있으면 엄마가 해피보고 웃는다고. 우리 아빠 불쌍하지 않냐?”

친구 이준형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훅 부러운 마음이 솟아났다.

어딘지 모르게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듯한 느낌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앞치마를 단정하게 묶고 나온 정다운은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다운 씨. 커피 한 잔 줄까?”

“오늘은 괜찮습니다.”

분명히 이 시간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왔을 거다.

안 그래도 삐쩍 마른 얼굴에 핏기마저 사라진 듯 보였다.

주방으로 들어간 서인우는 냉장고 옆 서랍에서 며칠 전 사놓은 코코아를 꺼내 우유를 데워 따뜻하게 세 잔 만들었다.

분명 정다운 에게만 주면 그 이유를 꼬치꼬치 물으며 자존심 상해할 게 뻔했다.

“우리 이거 한 잔 마시고 시작하자.”

“우리가 초딩이냐? 무슨 코코아를...”

서인우의 눈총을 맞은 이준형이 말꼬리를 내리며 잔을 가져갔다.

“사실 나 코코아 아주 좋아하는데, 마시멜로우는 없냐? 그걸 넣어야 진짜 코코아인데...”

정다운이 슬그머니 앞에 놓인 코코아를 가져가 한 모금 마시더니, 입가에 진한 초코 거품이 잔뜩 묻은 이준형을 보고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내 입술에 거품 묻으니까 시크릿 가든의 현빈 같냐?”

“드러워요.”

정다운의 짧고 강한 한마디에 남은 코코아를 벌컥벌컥 마셔버린 이준형이 냅킨으로 입을 거칠게 닦았다.

“나도 거울 보거든. 그냥 웃자고 한말인데...”

좀 심했다 싶었는지 정다운이 일어서며 한 마디 툭 던져줬다.

“그래도 입술 모양은 현빈하고 비슷했어요.”

이준형이 서인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거 칭찬이지?”

“현빈한테 소송당할까 걱정된다.”

“에이 씨. 이렇게 나오면 나 계약서 작성 안 한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현빈하고 비슷한….”

“됐어. 이미 김 다 샜어.”

한바탕 웃고는 점심 장사 준비를 시작했다.

정다운의 얼굴도 조금 편안해진 듯 보였다.

* * *

김형식이 책상 서랍 안쪽에 깊이 넣어놓은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하루 남았는데 진행 상황은?”

-은행 대출도 다 막히고, 아는 사람도 없어 혼자 쩔쩔매고 있습니다.

“내일 시간 되면 애들 서너 명 더 데리고 가서 완전히 끝내버려.”

-포기 각서에 도장 쾅 찍어서 가져다 바칠 테니 걱정하시지 말고 기다려 주십시오.

김형식의 입꼬리가 실실 올라가기 시작했다.

“실수 없이 해결해!”

-네, 믿어 주십시오.

핸드폰의 전원을 꺼 다시 서랍 깊숙이 넣은 김형식은 내일이면 알짜배기 가게가 하나 손에 들어온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지금 마영준의 상황에서는 1억이 아니라 천만 원도 마련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걸 알고 시작한 일이었다.

‘멍청한 놈.’

김형식이 높다랗고 커다란 가죽 의자를 휙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원상이놈한테 그 가게를 잘 이끌어 보라고 하고, 서원이가 회사를 한 번 꾸려나갈 기회를 만들어 봐야겠어. 둘이 경쟁을 붙여봐도 재미있을 것 같단 말이야.’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식도 가차 없이 자를 수 있는 김형식은 둘 중 누가 더 많은 능력을 보일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똑똑.

비서가 노크한 후 아들 김원상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앉아.”

김원상이 인사하며 숙인 허리를 바로 세우고는 테이블 안쪽으로 들어가 앉았다.

“마영준 내일이면 가게를 비우게 될 거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갑자기 마 셰프님이 왜요?”

“내가 거기에 가서 음식을 먹어보고 맛을 연구해 보라고 한 게 어떤 의미인지 짐작도 못 하고 있었던 거냐?”

“그야 요즘 워낙 잘나가니까….”

“모자란 놈. 거기가 잘나간다고 너한테 그따위 가게 흉내나 내고 있으라고 하는 줄 알았어?”

김원상은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마영준 셰프의 가게에 가서 인기 많은 음식을 먹어보고 연습해 보라고 하더니 그 가게가 내일로 끝이라니?

“아버지, 아니 회장님.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겁니까?”

“네 밥그릇 챙겨주고 있는 거 모르겠냐? 이제 [만가복]이 아닌 그곳에서 네가 하고 싶은 요리를 해보라는 얘기야.”

김원상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분명 아들을 위해 그런 판단을 하지는 않았다는 건 극명한데, 왜 하필 마영준의 가게인지...그리고 그 많은 해 가만있다가 서원이가 들어온 바로 지금 이 시점인지...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럴 능력이나 되고? 잔말 말고 마영준의 가게를 맡아 어떻게 꾸려나갈 건지나 고민해!”

역시나.

항상 아버지가 정해준 길을 제대로 걸으라는 채찍질만 있었다.

넘어져도 절대 손 한번 잡아 주지 않는 아버지.

김원상은 이번엔 보란 듯이 성공해 보이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 * *

하루 사이에 마영준의 얼굴이 좀비가 되어있었다.

눈 밑은 피가 모자란 사람처럼 시커멓게 변해 있었고, 밤새워 마신 술이 물로 변했는지 턱에는 수염이 꽤 자라 있었다.

“마영준 셰프님, 약속한 대로 계약서 작성해 왔습니다.”

밤늦게까지 서인우가 한 말을 무시하지도 믿지도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마영준이 귀신을 본 듯 놀라 소리쳤다.

“뭐?”

“어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손익계산 철저히 따져서 계약서 작성해 올 거라고요. 우선 계약서부터 꼼꼼하게 살펴보세요. 설명은 여기 이 친구가 해줄 겁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자 이준형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서인우 친구이자 [서풍 TWO]의 동업자 이준형입니다.”

마영준이 부스스 몸을 일으키자 이준형이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렸다.

“조건은 어제 이 친구한테 들으셨죠?”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있던 마영준이 계약서를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어제 한 말이 진심이었다고? 내가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데?”

이준형이 뭔가 할말이 많은 표정으로 서인우를 바라봤다.

“이 돈 제 가게 늘릴 돈입니다. 정말 소중한 돈이라는 말입니다.”

여전히 믿기지 않는 얼굴을 한 마영준의 눈에 서서히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여기 계약서를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셰프님의 명성과 [서풍]의 명성에 조금이라도 누가 된다거나, 전처럼 성실하게 요리에 임하지 않는다면 원금을 당장 회수할 것입니다.”

“그건 정말 걱정 안 해도 돼. 난 내 목숨만큼 요리를 사랑한다고.”

이준형이 자세한 설명을 더 했다.

“저희 쪽에서도 담보는 하나 잡아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당연합니다.”

“만약 6개월 이상 이자가 밀린다거나, 잠적한다거나 하면 이 가게 소유권이 50프로는 서인우 에게 있다는 조항을 넣었습니다.”

마영준이 살짝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저는 셰프님을 믿습니다. [셰프의 주방×서풍] 이라는 새로운 간판을 달고 최선을 다해 신나게 요리해주실 거라는 걸요.”

“날 믿어줘서 고맙습니다. 오늘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서인우의 손을 잡은 마영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갈라졌다.

걱정만 하다 밤을 새운 듯한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럼, 여기 계약서에 도장 찍으시고, 저와 같이 은행에 가셔서 기분 좋게 처리하도록 합시다.”

마영준이 꼼꼼하게 다시 계약서를 살펴본 후 도장을 찍자 이준형이 마지막으로 계약서 두 개를 붙여 간인을 찍은 후 하나씩 나눠주었다.

“그럼 앞으로 마셰프님의 새로운 바람을 기대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내가 서동수 셰프님을 추억하며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준형이 챙겨온 도장과 계약서를 가방에 막 넣으려고 할 때였다.

거칠게 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쩌렁쩌렁한 사내의 음성이 가게 전체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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