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마영준의 눈이 두 배는 커져 곧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 돈이 얼마인지나 알고 하는 얘기야?”
“은행에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1억이 필요하다고. 그 돈이 안 되면 부모님과 같이 일하는 직원 모두 굶어 죽는다고….”
“액수를 다 듣고 지금 나를 찾아왔단 말이야? 서인우 지금 제정신이 아니군. 나 같은 사람을 뭘 믿고...”
서인우가 앞에 놓인 잔을 한 번에 다 비웠다.
“음식이요.”
“뭐?”
“오전에 해주신 완탕면을 보고 알았습니다. 셰프님이 얼마나 요리에 열정이 있으신지, 그리고 [서풍] 요리에 정말 진심이라는 것까지요.”
마영준은 입만 꾹 다문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서인우의 요리를 보며 지난날 잊고 있었던 요리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난 건 오히려 마영준 자신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서인우가 자신의 요리에서 열정을 알아봐 주다니...
처음부터 좋은 인연으로 만났다면 정말 멋진 선후배가 됐을텐데...
마영준의 눈이 후회로 가득했다.
그런 마영준의 표정을 살피던 서인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저한테 털어놔 보시죠. 마셰프님과 김형식 회장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었는지...”
마영준이 반쯤 남은 술잔을 들어 깨끗이 비우고는 재킷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 녹음된 음성파일을 재생시켰다.
지난 경연대회에 마영준이 심사위원으로 합류하기 전 김형식과 나눈 대화부터 마지막 결승전을 앞두고 둘이 나눈 대화까지 모두 녹음되어 있었다.
이마에 깊게 주름이 파일 정도로 인상을 쓰고 있는 서인우를 보며 마영준이 고개를 떨구었다.
“정말 내가 너무 비참하고 창피해 얼굴을 못 들겠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할 테니, 나 같은 사람은 이제 무시해버려.”
마영준의 눈시울이 붉게 변했다.
서인우는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자신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마영준이 왜 그렇게까지 눈에 보이게 낮은 점수를 주고 혹평을 해댔는지...
그런 그가 마지막 결승전에서 만점을 주고 지금 어떤 곤욕을 치르고 있는지…. 이제 다 알 것 같았다.
“지금 너무 힘드시겠지만,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이제 다 까발려진 상태니 더 숨겨서 뭐 하겠어? 뭐든 아는 건 다 알려줄 테니 편하게 말해.”마영준은 이제 다 포기한 듯한 얼굴로 빈 잔에 맥주를 채웠다.
“저희 아빠와 김형식 회장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서동수 셰프님...”
마영준은 그냥은 안 되겠는지 따라 놓은 술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만가복]으로 사업을 크게 일으킨 김형식 회장이 아무리 용을 써도 그 맛은 서동수 셰프님을 따라가지 못했지.”
잔뜩 상기된 얼굴의 서인우가 마른침을 삼켰다.
“김형식 회장은 절대 누구한테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야. 방송에서나 인터넷에서 서동수 셰프님 요리에 대한 극찬이 쏟아지면서 요리 비법을 알려달라고 매일같이 찾아와 떼를 쓰고...”
순간 당시가 떠올랐는지 흥분한 듯한 마영준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심지어 비밀 레시피가 분명 있을 거라고 사람을 시켜 서동수 셰프님을 협박했던 일도 있었어.”
“네? 협박까지 했단 말입니까?”
“아마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나도 김형식 회장에게 보고할 일이 있어서 갔다가 통화하는 걸 우연히 들어서 알고 있는 거라서...”
마영준이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알고 있는 줄 꿈에도 모를 거야. 그 사실을 발설했다면 나는 어쩌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서인우, 이 얘긴 절대 비밀로 해야 할 거야.”
서인우는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럼 저희 아빠 돌아가신 날에 관해서도 뭐 알고 계신 게 있으신가요?”
“미안하네. 나도 사고 후에 늦게 소식을 듣고 정말 많이 힘들었어. 셰프님 사고 당일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어.”
서인우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힘든 얘기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사고 전까지 아빠는 항상 든든하게 옆에서 저를 지켜주며 끝까지 같이 할 거라는 철없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잠시 북받쳐 올라오는 감정을 억지로 끌어 내리는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후회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이제 더는 후회하지 않고 아빠의 [서풍]을 이어가며 멋지게 살 겁니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지 않나? 지금처럼만 해. 이제야 말하지만, 정말 최고의 열정과 끝내주는 요리 솜씨였어.”
“감사합니다. 그래서 제가 일으키는 [서풍]의 새로운 바람에 마영준 셰프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게 제 조건입니다.”
서인우의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마영준이 고개를 비스듬히 한 채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제가 1억 빌려드리겠습니다. 당연히 정확하게 계약서도 작성할 거고요. 조건은 셰프님 스타일 대로 맘껏 운영하시고, 가게 이름만 [셰프의 주방 × 서풍]으로 하죠.”
“그리고?”
“오늘 완탕면처럼 [서풍]을 추억할 수 있는 메뉴를 두 가지만 추가해 주세요. 조건은 이것뿐입니다.”
마영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아직 젊어서 세상을 잘 모르나본데... 1억이라는 큰 돈을 손익계산도 따져보지 않고 그렇게 함부로 아무한테나 빌려주고 그러면 위험하다고.”
“오늘 종일 셰프님의 이 가게를 조사하고 고민해서 내린 결정입니다. 당연히 이자도 정확히 받을 거고요. 꼼꼼히 계약서 작성해 내일 점심시간 지난 후 다시 오겠습니다.”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의 마영준이 서인우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저 제대로 성공해볼 생각이라서 손해 보는 일은 절대 안 합니다. 이제 셰프님도 제 식구로 합류하게 된 겁니다. 어떻습니까? 같이 바람 한 번 일으켜 보시겠습니까?”
그저 요리에만 진심인 아직 어린 애송이라 생각했던 서인우가 유난히 강한 눈빛을 보이며 새로운 바람을 예고했다.
마영준은 왠지 그 바람이 틀림없이 크게 부는 날이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정말 나를 믿고 그 큰돈을 투자해 준다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일해 서인우 씨가 말하는 그 바람에 반드시 일조하도록 하지. 그건 내 이름을 걸고 장담해.”
“이름을 거는 걸로는 안 되겠는데요?”
“응?”
마영준이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모든 건 정확히 서류로 남겨야죠. 내일 계약서 작성하도록 합시다.”
“지금 이 상황에 농담이 나오나?”
“전 항상 유쾌한 게 좋아서요.”
* * *
아침 일찍 [서풍 TWO]의 주방에서는 경쾌한 도마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사 준비를 위해 양배추를 신나게 썰고 있었다.
“사부!”
-한참 신나게 일하고 있는데 왜 불러?
“전에 [만가복] 김형식 회장 얘기한 적 있었지? [서풍]에 매일같이 왔었다고 했었는데...”
-말도 마. 무슨 거머리도 아니고, 서동수가 그놈 때문에 맘고생 좀 했지.
인우는 어젯밤 마영준과 얘기를 나눈 후 한참을 잠 못 들고 뒤척였다.
중식도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김형식이 비밀 레시피를 찾기 위해 협박까지 했다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 사람한테 아빠가 협박도 받은 적 있다고 하던데?”
-아, 그때 생각하니까 또 혈압 오르네. 밤늦게 네 아빠 혼자 가게 정리하고 있을 때 덩치 큰 남자 둘이 왔었어.
“그래서?”
-비밀 레시피를 달라고 윽박지르더니, 만약 나중에 비밀 레시피가 있는 게 밝혀지면 가족들이 무사하지 않을 거라고 소리를 지르고 갔어. 그때 서동수 눈빛이 정말 힘들어 보였어.
인우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족을 걸고 협박을 하다니...
-그때 네 아빠가 안 말렸으면 칼부림 크게 났다. 내가 워낙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그런데 사부!”
-또 뭐?
“아빠는 사고 날까지 김형식 회장하고 친하게 지내셨어. 매달 하는 등산도 꼬박꼬박 참석하고.”
-서동수는 항상 나를 만난 행운에 감사하며 죽을 때까지 친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질 거라 했어.
“협박까지 하는 사람이 도대체 뭐가 고마운데?”
-어쩌면 내가 김형식이나 또 다른 친구, 그렇게 둘 중 한 명에게 갔을 수도 있다고 여러 번 얘기 했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그 시작은 잘 몰라.
언젠가 [양자강]의 최형만 아저씨가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이번 휴무일에는 아저씨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가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게 문이 거칠게 열리고 이준형이 급하게 들어왔다.
“서인우, 주방에 있냐? 너 빨리 나와봐.”
목소리에 다급함이 느껴졌다.
주방에서 중식도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서인우가 이준형의 급한 말투에 피식 웃음을 보였다.
-호떡집 불났냐? 아침부터 저놈은 왜 이리 호들갑이야?
“아까 한 얘기 저 친구도 다 알아.”
-저놈이 흥분해서 쳐들어간다고 하면 내가 그때 못한 칼부림을 제대로...
“됐고, 나 홀에 나갔다 오면 탕수육 고기나 썰어 놓자고.”
-알았으니까, 저 시끄러운 놈 입 좀 막아라.
서인우가 주방에서 막 나가려는데 성격 급한 이준형이 주방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앉아서 얘기하자.”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자마자 이준형이 서인우의 눈을 빼꼼히 쳐다봤다.
“커피 내려줄까?”
“커피고 뭐고 어젯밤에 한 얘기 다시 정리해 보자. 그러니까 너를 물 먹인 그 심사위원이 알고 봤더니 [만가복] 김형식 회장의 심복이었다.”
“심복은 아니고, 이용당한 거지.”
“여튼 그런데 결승전 때 양심에 가책을 느껴 김형식한테 배신을 때리고 널 만점을 줬지. 그래서 그 일로 지금 협박을 당하고 있고, 여기까지 맞냐?”
서인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거기까지는 이해 완료. 그런데, 그 심사위원이 [셰프의 주방]을 차릴 때 김형식으로부터 돈을 빌렸고, 착실히 갚고 있었는데 갑자기 남은 원금을 갚으라고 했다는 거지?”
“응, 일주일 안에 1억을 갚으라고 했대. 못 갚으면 가게 계약서를 넘기라고.”
“이런 양아치 같은... 지금 그 가게가 몇 년 사이에 얼마나 올랐는데... 완전 도둑놈 심보네.”
“중요한 건 마영준 셰프가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고 며칠을 찾아다녔는데, 김형식 회장이 이미 다 손을 썼나 봐. 고스란히 가게를 넘겨줘야 할 상황이더라고.”
이준형이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자 다시 생각을 정리하자. 그 사람 사정은 알겠는데, 넌 뭘 믿고 그 큰돈을 빌려준다는 거야?”
“마영준 셰프가 [서풍]의 완탕면을 완벽하게 만들어 내더라. 그뿐 아니라 나도 어제 종일 조사해봤는데, 그 사람 요리에 대한 열정이 정말 장난 아니야. 모든 메뉴를 직접 다 연구하고 개발했더라고.”
“요리에 진심인 거 인정. 그런데, 네가 1억을 투자하면 너한테 생기는 이익이 뭔데?”
서인우가 잠시 말을 멈췄다.
“가게 이름에 [서풍]을 넣기로 했어. 내가 [서풍]의 바람을 다시 일으키는 일을 같이하기로 했다. 이제 마영준 셰프도 우리 식구가 되는 거야.”
“네가 급한 불 꺼주고 식구로 받아들여 주면서까지 넌 뭐를 얻는 거냐고? 난 그 부분에서 이해가 안 돼 잠도 설쳤다.”
“방금 말했잖아. 식구를 얻는다고. 같이 바람을 일으키고 성공할 사람을 얻는 거라고.”
이준형의 눈썹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네 말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1억은 너무 큰 돈이야. 물론 나도 좀 알아보니까 그 사람 실력도 좋고 특히 [셰프의 주방]은 이미 핫해져서 망할 것 같지는 않아. 하지만...”
“내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인 돈을 투자하는 거니까 당연히 불안하지. 절대 손해 봐서는 안 되고.”
“그래, 잘 아는구만.”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네 능력이 필요한 거야. 손익계산 잘 따져서 계약서 꼼꼼하게 작성해줘. 오늘 브레이크 타임에 다녀올거야.”
“뭐? 오늘?”
이준형의 동공이 널을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