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이 요리는...”
“맞아요. [서풍]의 인기 메뉴 중 하나인 완탕면. 아침 대용으로 먹기 정말 좋은 메뉴이지.”
“정확히는 먹어봐야 알겠지만, 모양이 아빠가 해주신 거와 정말 비슷합니다.”
“그럴 테지. 레시피를 직접 알려 주셨으니까... 이건 경연대회에서 내가 보인 행동에 대한 사과의 뜻으로 받아들여 주면 좋겠네.”
“네?”
서인우는 완탕면의 비쥬얼을 보고 놀란 것보다 더 크게 놀라 자기도 모르게 소리가 커졌다.
마영준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선 따뜻할 때 먹어봐요. [서풍]의 맛이 나는지...”
서인우는 잠시 멈췄던 시선을 다시 테이블로 옮긴 후 조심스럽게 국물을 떠먹어보았다.
깔끔하면서 담백하고 시원한 국물맛이 예전에 아빠가 해주던 맛 그대로였다.
새우 완자를 얇은 피로 감싼 작은 만두를 먹어보았다.
새우와 고기가 섞여 있는 완자의 탱글탱글한 식감이 일품이었다.
“정말 맛있습니다. 예전에 아빠가 해주신 맛이랑 정말 똑같은데요?”
“서동수 셰프님 내가 정말 존경했던 분이셨어. 내가 이 가게를 열게 될 때까지 많은 도움을 주셨었지.”
“그런 인연이 있으신지 몰랐습니다.”
“인연인지 악연인지 알 수는 없지. 내가 서인우씨 심사를 맡게 된 걸 보면 말이야.”
서인우는 마영준의 말이 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조금 전 은행에서 건넨 갑작스러운 사과도 지금 툭툭 던지는 말들도 다 무슨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것 같았다.
“셰프님. 사실 은행에서 하시는 말씀 본의 아니게 다 들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거죠?”
“뭐요? 휴...”
마영준이 두 손으로 얼굴을 두 번 쓸어올리더니 한숨을 크게 쉬었다.
“이거 한참 후배한테 창피하게 됐네.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김형식 회장님 이름도 들리던데요?”
“그 인간...하나만 충고하지.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김형식, 아니 [만가복]하고는 절대 엮이지 말아요. 나처럼 인생 꼬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서인우는 궁금함이 점점 더 커졌지만, 마영준의 표정이 워낙 심각해 보여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알겠습니다. 한가지, 먼저 경연대회 때 말씀을 하셨는데, 제 점수를 낮게 주셨던 이유, 그 이유만은 꼭 듣고 싶습니다.”
“그 이유...”
마영준이 하던 말을 잠시 멈췄다.
“방금 말했잖아요. [만가복]하고 엮이지 말라고. 나도 처음엔 서인우씨가 [서풍]의 서동수 셰프님 아들인 걸 몰랐으니까... 알았다면, 절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텐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만가복]하고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아빠 친구인 김형식 아저씨가 [만가복] 회장님 이라는 것도 이번 대회에서 처음 알았단 말입니다.”
“친구? 김형식 회장이 서동수 셰프님 친구라고?”
마영준이 심하게 콧바람을 일으키며 비웃었다.
“서동수 셰프님을 그렇게 괴롭혔는데, 그게 친구가 할 짓인가?”
“괴롭히다니요? 두 분이 30년 친구십니다. 뭔가 잘 못 알고 계신 거 아닙니까?”
“부모만 자식을 모르는 게 아니네. 자식들도 부모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야.”
“좀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지금 셰프님 상황이랑 김형식 회장님이 무슨 연관이 있는건지...그리고 왜 제게 일부러 점수를 낮게 주신 건지 말입니다.”
“다음에 기회되면... 내가 오늘은 마음도 심란하고 정신이 너무 없어. 이제 일어나요. 나도 정리할 것들이 많아.”
서인우가 뭔가 더 말을 이어가려 하자, 마영준이 먼저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착잡한 표정이 더는 말을 붙일 수 없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오픈 시간이 다 되어 간 것을 깨닫고 급히 가게로 돌아온 서인우를 이준형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주방까지 좇아 들어왔다.
“은행에서 무슨 일 있었어?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거냐?”
“아, 은행...”
인우는 주머니에 구겨 넣은 번호표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은행 가는 길에 누굴 좀 만나서….”
“누구? 옛 여친이라도 만났냐?”
“여친은 무슨...요리 경연대회 때 심사위원이었던 마영준 셰프님 만났다.”
“그래서? 너 물 먹이려던 그 자식을 그냥 놔뒀단 말이야?”
“먼저 다가와 사과하더라. 경연대회 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 같아.”
이준형은 여전히 씩씩거렸다.
“피치 못할 사정은 무슨…. [만가복]에서 심어놓은 사람이라는 소문이 자자 했는데...”
“그런 소문이 있었냐?”
“댓글에 장난 아니었지. 너무 티 나게 네 점수는 낮게 주고 [만가복] 아들한테는 계속 높은 점수를 줬으니까. 재수 없는 새끼.”
“준형아!”
“왜 갑자기 목소리를 깔고 그러냐? 무섭게.”
서인우가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이준형 또한 그새 진지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만가복] 김형식 회장하고 우리 아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아. 그걸 좀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네 아버지하고?”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서인우의 눈빛에 전과 다르게 차가운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 * *
원금을 회수하겠다고 협박한 날이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마영준은 맘 편히 돈을 부탁할 친구 하나 없다는 사실이 지난날들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했다.
‘모레까지 1억을 장만하지 못하면 분명히 이 가게 명의를 뺏으려 들겠지. 난 꼼짝없이 피땀 흘려 일군 가게를 뺏기는 거고...’
마치 생각을 읽고 있었다는 듯이 반갑지 않은 이름을 내뱉으며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어떻게 준비는 하고 있나? 이제 이틀 남았는데...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은행이랑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으니, 일주일만, 아니 며칠만 더 시간을 주세요.”
-괜히 힘 빼지 말고, 돈이 준비 안 됐으면 계약서를 넘겨야지 어쩌겠어. 이 돈을 쓸 때 갚을 계획도 없이 썼나 보지?
“분명 이자만 차근차근 내면 아무 문제 생기지 않는 돈이라고 했단 말이야. 이거 김형식 짓이지?”
수화기 너머로 실실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누구요? 난 내 돈하고 내 돈 빌려 간 놈들 이름밖에는 몰라. 이제 꼬박 48시간 남았수다. 곧 보자고.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기분 나쁘게 들리다 전화가 끊겼다.
한때는 자신만의 가게를 열어 꿈을 펼치게 도와준 김형식을 위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었다.
마영준이 오랜 시간을 들여 연구한 요리 레시피들을 협박과 회유로 하나씩 하나씩 뺏어가기 전까지는...
이대로 그동안 피땀 흘리며 일군 것들을 하루아침에 뺏길 수는 없었다.
마영준은 핸드폰을 들고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한 뒤 통화버튼을 눌렀다.
“접니다.”
-누구신가?
“이제 아주 모르는 사람 취급하시겠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 남았나? 그때 한강에서 입장 정리가 다 된 거로 아는데?
“회장님 입장 정리에 내 가게 정리도 포함된 줄 미처 몰랐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작게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소름이 오소소 돋은 마영준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도 사람은 정리하지 않은 걸 감사하게 생각해. 정읍에 계시는 부모님 걱정도 해야지.
갑자기 툭 튀어나온 부모님이라는 단어에 마영준의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지금은 굽혀야 할 때였다.
“회장님, 제가 실수한 게 있다면 다시 바로 잡도록 하겠습니다. 노여움 푸시고, 저에게 시간을 좀 더 주세요.”
-실수? 그거 아나? 깨진 접시는 다시 붙여서 못 쓴다는 거.
“그러시지 마시고 일주일만 시간을 더 주세요. 아니, 단 며칠이라도.”
-[셰프의 주방]이라고 했나? 그 가게는 내가 잘살려 보지.
뚝!
더 말 붙일 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김형식이 마지막 남긴 말이 계속 귓속에 벌이 들어간 것처럼 윙윙거렸다.
젊은 사람들을 타겟으로 새로운 퓨전 요리를 개발하기 위해 지난 몇 년간 하루도 제대로 쉰 날이 없었다.
비록 빚이 아직 남아있지만, 아들이 서울에서 큰 식당을 운영한다는 자랑으로 동네잔치까지 열었던 부모님을 언젠가는 서울로 모시고 올 생각에 링거까지 맞아가며 일했다.
그때 김형식의 제안에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마셰프의 열정과 실력을 내가 높이 사서 주는 기회야. 지금 싸게 나왔을 때 가게를 열어 직접 꿈을 키워 보라고.”
“그래도 그렇게 큰돈을 빌리면 빨리 갚을 수 있다는 대답드리기 힘듭니다.”
“나한테 그게 무슨 큰돈이라고…. 성공할 자신 없나? 처음에는 이자나 꼬박꼬박 내라고.”
서울에 올라와서 제일 잘한 일이 김형식을 만난 일이라고 생각하며 얼마나 감사해했던가?
그 시커먼 속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문 앞에 걸린 임시휴업 팻말이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 불안했다.
9시가 넘어가면서부터 마시기 시작한 술이 벌써 빈 병만 두 개였다.
빈속에 독한 소주를 들이마셔도 취하지도 않았다.
이미 번화한 거리에 하나둘 불이 꺼지고 포근한 안락처를 찾아 정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내일이 오는 게 두려워 취하지도 가게를 떠나지도 못하고 술만 마시고 있는 마영준의 눈에 입구 쪽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눈에 띄게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가 계속해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흐릿한 시야를 없애기 위해 눈을 연신 깜빡거리며 다가간 그곳에 오전에 봤던 서인우가 서 있었다.
“마영준 셰프님. 문 좀 열어보세요.”
분명 정신은 멀쩡했는데, 다리가 풀려 흐느적거렸다.
힘겹게 걸어가 굳게 잠긴 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도 마치 봄 햇살처럼 밝은 미소를 보이며 서인우가 안으로 쏙 들어왔다.
“안 그래도 술 한잔하고 싶어서 안주 준비해왔는데, 벌써 많이 드셨네요?”
“내가 오늘은 맨정신으로 보낼 수가 없어서...”
서인우는 준비해온 안주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비닐봉지에서 맥주를 꺼내 놓았다.
마영준 앞에 뒹굴고 있는 소주병을 보고는 바로 주방으로 들어가 유리잔을 두 개 들고나왔다.
“누구 허락받고 남의 주방에 함부로 들어가? 거긴 신성한 내 영역이라고…. 물론 오늘까지지만….”
마영준이 슬픈 눈으로 말끝을 흐리며 마시던 소주병을 다시 입에 가져갔다.
“제가 이모부한테 배운 비율대로 맛있게 말아 드릴 테니 제 잔 먼저 받으세요.”
“오늘 나한테 왜 이래? 사람 자꾸 미안하게….”
“우리 아버지와 인연이셨으면, 저하고도 인연인 겁니다. 그래서, 제 요리의 심사도 맡으셨던 거고요.”
마영준이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악연이라니까…. 하마터면 나 때문에 대회에서 밀릴 뻔하지 않았나? 내가 싫을텐데...”
“싫다기보다는 오기가 생겼었죠. 마영준 심사위원에게 반드시 만점을 받아내겠다 각오하고 더 열심히 준비 했습니다.”
“그랬군. 결국 서인우씨는 성공했고, 난 그 10점이 이렇게 내 인생을 말아먹게 됐고 말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전부터 계속 생각하고 생각했습니다. 마셰프님이 하신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말입니다. 저에게 일부러 낮은 점수를 준 게 김형식 회장의 지시였습니까?”
흠칫 놀란 듯한 마영준이 얼굴만 굳어진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아니, 뭐라 말해도 결국 내가 한 짓이야.”
“그 일로 지금 협박을 받는 거고요?”
마영준이 대답 대신 서인우의 눈을 한참 바라봤다.
그리고는 말없이 잔을 들이켰다.
“그 돈 제가 해드리죠.”
“뭐?”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