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47화 (47/200)

제47화.

요리 경연대회 마지막 날 들은 박정원 심사위원의 말과 며칠 전 차은석 셰프로부터 들은 말들이 김원상의 머릿속에 청소기 속 먼지처럼 돌돌 엉켜있었다.

‘도대체 아버지는 그동안 무슨 일들을 벌였던 것일까?

누군가의 희생으로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다면 과연 나는 그 길을 마다할 수 있었을까?’

김원상은 오늘은 꼭 아버지 김형식을 찾아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어떤 협박을 해도 굴하지 않으리라 맘먹고 도착한 10층 회장실에는 이미 손님이 와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가까우면서 달갑지 않은 손님이.

“오빠, 오랜만이네. 이게 몇 년 만이지?”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한 씨컬 단발에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익숙한 얼굴은 하나밖에 없는 동생 김서원이 분명했다.

“너. 너 언제 들어온 거야?”

“오늘이 딱 일주일 됐네. 아빠 먼저 만나고 오빠 가게 가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같이 보게 됐네. 반갑다.”

반갑다는 김서원은 상대방의 감정이 어떠한지 전혀 관심 없다는 듯 아주 짧은 시간의 눈 맞춤으로 끝이었다.

‘재수 없는 계집애. 평생을 그곳에서 살면서 외국 남자 만나 가정을 꾸리고 산다는 소식을 들을 줄 알았는데... 도대체 갑자기 귀국한 꿍꿍이속이 뭔 거야?’

“거기 그렇게 계속 서 있을 거냐? 왔으면 앉아!”

김형식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김원상을 바라봤다.

아버지 바로 곁에 앉은 동생 김서원의 자리 맞은 편으로 앉으며 천천히 그녀를 살펴보았다.

확실히 처음 유학을 떠났던 그때보다 성숙한 외모에 세련미까지 더해져 근사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 넘치는 눈빛에 아무 잘못한 거 없이도 주눅이 들었다.

“들어온 지 일주일 됐다면서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야?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인데, 너 정말 서운하다.”

“서운해할 것 없다. 나도 지금 처음 보는 거니까.”

“네? 그럼 들어온 지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어디서 뭐 했답니까?”

김서원이 피식 웃으며 앞에 놓인 복숭아 향이 진한 차를 마셨다.

“이제 막 말씀드리려던 참이야. 오빠도 차 한잔해. 영국에서 사 온 차인데, 부드럽고 향이 좋아.”

자리에서 일어선 김서원이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 비서실 직원하고 뭐라 얘기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작은 잔 세트를 들고 들어왔다.

“뭐 하는 짓이냐? 그런 건 비서를 불러서 시켜야지?”

김형식이 잔뜩 언짢은 얼굴로 김서원을 쳐다봤다.

“여기가 내 회사에요? 아빠 회사에서 내가 왜 직원을 시켜? 난 그런 거 딱 질색이에요.”

아버지의 호통에 조금도 흔들림 없이 할 말 딱딱하고 바로 찻잔에 차를 따르는 동생의 모습이 짜증이 나지만 부러웠다.

“한국 도착하자마자 처리할 일이 있어서 대전에 이틀 부산에 삼 일 다녀왔어요. 오늘은 집에 들어가서 며칠 엄마 밥 먹을 거야.”

“네가 무슨 일이 있어서 지방을 다녀와? 너 혹시 외국에서 무슨 사고라도 치고 들어온 건 아니지?”

내가 오빠인 줄 알아?

김서원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는데, 왜 동생이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건 나중에 기회 되면 말하도록 하고... 엄마 요리는 여전히 안 늘었어요? 나 정말 오랜만에 집밥이 너무 먹고 싶은데...”

“이번 메이드가 요리를 잘해. 오후에 짐 가지고 들어와. 같이 저녁 먹게.”

“그럴게요. 가져갈 짐은 없고 엄마 얼굴도 보고 저녁도 먹으러 일찍 갈게요.”

대화 중간에 낄 틈을 열심히 찾고 있던 김원상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어디에 묵고 있는데? 집 놔두고 호텔에 있는 거냐?”

“돈 아깝게 호텔에는 왜 가? 나 오전에 원룸 계약하고 여기로 바로 온 거야. 집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랑 사는지 등 관심은 사절입니다.”

버럭 할 거로 예상했던 김형식이 조용히 듣고 있다 의외로 웃음을 내보였다.

“독립하고 싶었으면 미리 말을 하지. 네 몫으로 사둔 한남동 아파트에 입주만 하면 되는데...무슨 답답하게 콧구멍만 한 원룸이야? 당장 계약 해지해. 해약금은 내가 줄 테니까.”

“다시 말하지만, 내 거처에 대해 어떤 간섭도 절대 사절입니다. 그것만 지켜준다면 다시는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살 거예요.”

마치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다시 돌아가 버리겠다고 협박이라도 하는듯한 동생의 말투가 기가 막혔다.

“너 외국 생활 오래 하더니 버릇이 나빠졌구나. 아주 시건방을 떨고 있네.”

“맞아, 외국에 오래 살면서 적어도 오빠처럼 아빠 그늘에서만 살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지. 나는 누구 딸이 아닌 내 능력으로 살 거니까.”

김원상이 보란 듯이 기분 나쁘게 웃었다.

“네까짓 게 무슨 능력으로? 아, 초등학생들 뭐 피아노 레슨이라도 하려고?”

말을 마치고 실실 웃고 있는 김원상을 향해 한껏 여유 있는 미소를 지어 보이던 김서원이 일부러 후루룩 소리를 내며 차를 마셨다.

“그 긴 시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하나하나 알게 되는 날이 오겠지.”

부연 설명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무슨 소린지 똑바로 말해? 설마 여기로 들어오겠다는 말은 아니지?”

“여기 아빠 회사?”

김서원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아빠가 워낙 집요하게 부탁을 하셔서 고민 중이야.”

“너? 진심이야?”

“그러니 나 자꾸 자극하지 마!”

여전히 시선은 찻잔을 바라보며 김서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만들 못해? 오랜만에 만나서 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 그것도 회사에서?”

김형식이 호통과 함께 김원상을 노려봤다.

“오라비라는 놈이 크게 생각하고 볼 줄도 모르고 눈앞 그릇에만 급급한 꼴이라니….”

“내가 아니라, 서원이 쟤가….”

“닥쳐! 서원이 넌 잠시 앉아 있고, 원상이는 마영준 만난 얘기나 하고 돌아가.”

항상 그랬었다.

단 둘뿐인 피붙이 김원상과 김서원이 부딪치는 날이면 한 번도 그의 편에서 얘기를 들어준 적 없었던 아버지.

학창 시절부터 시작된 편협한 시선이 이제 절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포기하려던 무렵에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동생.

그런 동생한테 한때 감사함을 느꼈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정식으로 내 자리를 욕심내 보시겠다?

그건 안 되지.

내가 이 자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참아내며 버텨왔는데….

김원상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구르기 시작했다.

* * *

생에 처음으로 가게를 열었고, 그 가게에서 같이 일할 직원이 생겼다.

[서풍 TWO]의 정식 직원 1호인 정다운.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여자아이가 너무나도 익숙하게 손님을 대하고, 카운터를 보는 모습이 서인우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

또래 친구들은 대학 신입생이라고 신나게 캠퍼스를 돌아다닐 텐데...그저 목표가 돈 많이 버는 거라던 정다운이 안쓰러웠다.

대기업 취업을 접고 같은 꿈을 꾸기로 한 친구 이준형을 위해, 스무 살의 당찬 직원 1호 정다운을 위해...

무엇보다 아빠의 [서풍]이름에 청춘을 건 자기 자신을 위해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시 한번 다졌다.

직원 1호에게 6개월 후 지금 월급의 두 배를 주기로 약속했다.

미친 듯이, 젊음을 다 때려 넣고 영혼까지 죄다 갈아 넣으며 일할 거다.

하지만, 세상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이제는 어느 정도 알아가는 인우였다.

모닝커피를 기분 좋게 마시고 막 가게를 나서는데 이준형이 들어왔다.

“나 지금 왔는데 넌 어디 가는 거냐?”

“은행에 좀 다녀올게.”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몇 가지 알아볼 게 있어서.”

“알았다. 빨리 다녀와. 정다운이랑 둘이만 있는 거 좀 그래. 난 어린 데 왜 걔가 무섭냐?”

“오늘 늦게 출근한다고 해서 나가는 거니까 편하게 있어.”

“그래, 청소나 하고 있어야겠다.”

* * *

은행에 도착해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고 있던 서인우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저절로 시선이 옮겨졌다.

대출 상담 코너에 앉아 있던 마영준이 얼굴이 벌게진 상태로 잔뜩 흥분해 있었다.

“지금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은행 문 열자마자 뛰어왔습니다. 내 가게를 담보로 대출을 받으려고 하는데 며칠째 뭣 때문에 안된다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고객님. 지난번에 설명해 드린 것처럼 고객님의 신용도에 문제가 있어 대출은 어렵습니다.”

“서울로 올라와서 5년 넘게 정말 성실하게 피나는 노력을 하며 일군 내 일터입니다. 계약서도 여기 있지 않습니까?”

상담하는 여직원의 얼굴이 난처한 듯 보였다.

“이거 김형식 짓이지? 내가 찾아오면 대출 못 받게 하라고 누가 지시한 거 아니냐고요?”

“고객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신용도에 문제가 있어서 대출이 불가능하다는 점 외에는 다른 이유 없습니다.”

“한 번만 다시 알아봐 주세요. 이거 대출 못 받으면 우리 부모님도 나를 믿고 종일 고생하는 우리 직원들도 다 굶어 죽는단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저희도 방법이 없습니다.”

마영준의 얼굴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모레까지 1억을 장만해야 하는데...

마영준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간신히 생활하는 시골에 계신 부모님, 내 일처럼 성실히 일해주는 직원들 얼굴이 눈 앞을 가렸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 힘없이 일어선 마영준이 터덜터덜 흔들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며 은행 문을 향했다.

“마영준 심사위원님 맞으시죠? 안녕하세요, 서인우입니다.”

갑자기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사람을 쳐다보는 마영준의 동공은 이미 영혼이 빠져나간 듯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아, 네. 여기서 보네요. 잘 지냈어요?”

“네. 저도 이 근처에 조그맣게 가게를 냈습니다.”

“축하해요. 서인우씨는 실력도 있고, 성실해서 분명히 성공할 겁니다. 그럼.”

은행 문을 열던 마영준이 다시 몸을 돌렸다.

“서인우씨. 경연대회에서는 정말 미안했습니다.”

“네?”

“자세히 얘기할 수는 없지만, 그냥 사정이 있었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내가 준 점수들은 다 잊어버려요. 서인우씨 요리 실력은 정말 최고였습니다.”

힘겹게 그 말을 남기고 마영준이 은행을 나섰다.

멀리 보이는 그의 뒷모습이 위태위태해 보였다.

서인우는 손에 들고 있던 번호표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는 마영준을 따라갔다.

넋이 빠진 듯 걷고 있던 마영준이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혹시 나 따라오는 건가?”

“네. 전부터 마영준 셰프님 가게에 꼭 가보고 싶었습니다. 오픈 시간 전에 잠시 구경해도 될까요?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뭐 안 될 것도 없지. 앞으로 기회가 없을 수도 있으니 같이 갑시다.”

말을 하는 내내 마영준의 눈동자는 마치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아무런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눈을 보자 문득 엄마가 떠올랐다.

더는 예전의 생기있는 눈빛을 보여주지 않는 엄마가...

얼마 가지 않아 마영준이 운영하는 [셰프의 주방] 입간판이 보였다.

건물 1층에 자리 잡은 제법 규모 있고 깔끔한 식당이 여느 중화요리 집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가게가 너무 깔끔하고 멋지네요.”

“그런가요? 곧 문 닫을 수도 있으니 실컷 봐둬요. 인테리어 하나하나 내가 직접 알아보고 한거니까...”

서인우는 좀 전에 은행에서 들은 얘기들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눈치만 보고 있었다.

“서인우 씨. 잠시 기다려 줄 수 있어요?”

“네?”

“오픈 준비하려면 바쁘겠지만, 내가 간단한 요리 하나 만들어 대접하고 싶은데...”

“준비 다 해놓고 나와서 아직 시간 있습니다. 저도 셰프님 요리 꼭 먹어보고 싶었는데, 저야 영광이죠.”

“무슨 영광까지...조금만 기다려요.”

은행에서와 다르게 재빠른 움직임을 보이며 마영준이 주방으로 사라지자 인우는 가게 내부를 꼼꼼하게 살폈다.

그가 모습을 다시 나타내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영준이 앞에 내려놓은 접시를 본 순간 서인우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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