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산 바로 아래에 선 택시에서 검은색 양복을 입은 서인우가 손에 꽃을 한 다발 들고 내렸다.
가게를 열고 처음 쉬는 날이었다.
산에 올라가며 검은색 구두에 점점 진흙이 묻기 시작했다.
한참을 올라가 커다란 나무 아래에 서서 들고 온 꽃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재킷 주머니에서 소주를 꺼내 나무 아래를 빙글 돌면서 뿌렸다.
“아버지, 저 인우 왔어요.”
나무 아래 푸릇푸릇하게 조금씩 자라난 잔디를 보니 추운 겨울이 사라지고 완연한 봄이 온 게 실감이 났다.
“아빠. 아빠는 세상에 없는데...이 세상은 하나도 변한 게 없네. 이렇게 어김없이 봄도 다시 찾아오고...”
인우는 남은 소주에 긴 한숨을 타서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빠, 매일매일 나 지켜보고 있는 거지? 내가 아빠의 [서풍]을 그리워하는 많은 사람에게 추억을 선물해주고 있는데, 위에서 보고 있는 거지?”
인우는 나무를 바라보며 아빠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빠의 웃음 짓던 눈과 아들을 부르던 다정한 목소리,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던 아빠의 손, 그 모든 기억이 점점 흐릿해짐을 느끼며 가슴이 저리는 것 같았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남은 소주를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고는 다시 한번 고개를 뒤로 젖히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후...”
한숨을 뱉으며 쳐다본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참 징그럽게 높다. 아빠! 너무 멀다. 그런데, 아빠가 남기고 간 선물 덕분에 난 매일 아빠를 만나는 것 같아.”
인우는 중식도와 아빠 얘기를 나누며 추억에 젖었던 순간들을 다시 떠올렸다.
그러면서 동시에 다음엔 꼭 가방에 중식도를 넣어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옛친구를 만나는 기쁨을 선사해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나무 아래 잔디를 여기저기 어루만지며 한참을 앉아 있다 하늘이 붉게 물드는 걸 보며 산에서 내려왔다.
오랜만에 아빠를 만나고 온 인우는 다른 날보다 더 이른 새벽공기를 맡으며 오늘 장사를 위해 장을 보고 있었다.
아빠의 거래 노트에 적혀 있던 수산시장의 오 사장님과 눈물의 상봉을 한 뒤로 인우는 해물은 무조건 그 가게에서 그날그날 제일 싱싱한 것으로 사는 걸 고집했다.
“내가 우리 직원 시켜서 보내줄게. 한 시간이라도 더 자라니까.”
오 사장은 새벽시장을 나온 인우에게 해물을 건네며 말했다.
“아저씨, 나중에 제가 엄청나게 성공하면 직원 보낼게요. 그때도 지금처럼 해주셔야 해요.”
“그야 당연하지, 더 신경 써서 해줄 테니 보란 듯이 성공만 해.”
가게로 돌아와 냉장고에 해물을 정리하고 주방과 홀을 청소했다.
“오늘도 기운차게 하루를 시작해 볼까?”
인우의 말에 중식도가 바로 반응을 보였다.
-나야 항상 스텐바이지.
감자와 양파, 양배추를 빠른 속도로, 그러면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크기로 잘라 각각의 통에 넣어 냉장고에 준비해 두었다.
고기와 해물 등도 정리해서 각각 준비해 두고 그제야 의자에 앉아 잠시 쉬고 있었다.
9시가 되려면 아직 30분도 넘게 남았는데 정다운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다운 씨. 일찍 왔네. 잠시만.”
인우는 카운터 옆 서랍장에서 뭔가를 꺼내 다운에게 내밀었다.
“여기 다운 씨 명찰이랑 앞치마. 이제 다운 씨가 우리 가게 정식 직원 1호야. 잘 부탁합니다.”
검은색 명찰에 금색으로 직원 정다운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진한 커피색 앞치마는 고급 카페에서 본 것같이 깔끔하게 허리에 묶는 스타일이었다.
차이점은 허리 쪽에 금색으로 가게 이름 [서풍TWO]가 멋지게 찍혀 있었다.
다운은 고개를 반쯤 숙이며 인사한 후 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명찰과 앞치마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이 이제 어엿한 [서풍TWO] 의 직원답게 보였다.
“아침엔 간편하게 중국식 달걀 볶음밥 먹자. 괜찮지?”
“저 때문에 안 그러셔도 됩니다.”
“그럼 나 혼자 먹으라고? 아니면, 나도 굶을까?”
당황한 다운이 인우의 속내를 알아보려는 듯 한참 쳐다봤다.
“여기서 식사하는 거 불편해? 아마 곧 준형이도 등장할걸. 항상 셋이 아침 먹고 시작하면 좋을 것 같은데…. 선택은 정다운 직원이 하도록 해.”
“내가 아침을 먹고 오는지 굶고 오는지 어떻게 알아요?”
다운의 눈매가 또 사납게 변했다.
수시로 변하는 감정이 위태위태해 보였다.
“나도 다운 씨 나이엔 아침 잘 안 먹었어. 그래서 그냥 짐작한 거뿐이야. 다시 말해 아무 의미 없이 가볍게 아침이나 같이 먹고 시작하자는 거라고.”
일부러 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인우를 한참 요리조리 쳐다보던 다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못 먹는 음식 없어요. 메뉴는 사장님 편하게 하세요.”
인우가 피식 웃어 보이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사부, 파만 좀 잘게 다져야겠어.”
-뭐하게?
“달걀 볶음밥.”
-너 요즘 갑자기 아침 잘 챙겨 먹네. 항상 커피만 마시던 놈이.
“건강 챙겨야지. 그래야 더 힘내서 성공할 거 아니야?”
-그래, 식구 챙기는 마음도 네 아빠랑 똑같다.
“응?”
-새 직원 먹이려고 그러는 거 내가 모르는 줄 아냐? 넌 아무리 용을 써봐도 이 사부 손바닥 안이야.
“정말 귀신이네.”
-어! 가게에 진짜 귀신 들어왔다.
“뭐?”
-밥 축내는 귀신 있잖아, 네 친구 왔어. 다른 놈도 하나 끌고 왔는데? 얼른 나가봐.
“아이씨 깜짝이야.”
인우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바라본 홀에 준형이 누군가와 함께 모습을 나타냈다.
익숙하고 반가운 얼굴이었다.
* * *
갈비 밥 재료를 준비해 [만가복]으로 향하는 김원상이 신호에 멈춘 차 안에서 뭔가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었다.
뒤에서 울리는 경적에 놀라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계속 며칠 전 차은석 셰프가 한 말이 떠올랐다.
뭔가 불만에 찬 표정과 많은 걸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이 묘하게 기분 나쁜 인상으로 남아있었다.
주차 후 짐을 가지고 홀에 들어가자 오승연 홀 매니저가 달려와 인사했다.
“점장님, 나오셨어요? 이건 뭐예요?”
손에 잔뜩 들고 있는 짐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지난 번 방송에서 선보였던 갈비밥을 정식으로 올려볼까 해서요. 오늘 차은석 셰프와 같이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정말요? 너무 잘됐어요. 요즘 손님들이 많이 찾으시거든요.”
김원상은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 같아 배시시 웃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보조 셰프 김지호에게 뭔가 설명을 하는 차은석 셰프 가까이 다가갔다.
“지금 좀 한가한 시간이죠?”
“저녁 장사 때까지는 그렇죠.”
“전에 말한 갈비 밥 오늘 만드는 법 보여줄 테니 차 셰프가 더 나은 아이디어 있으면 보충해도 좋아요.”
차은석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김원상을 한참 쳐다봤다.
“뭐? 왜 그렇게 쳐다봐요? 나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닙니다. 물론 내 요리에 자신도 있고.”
김원상이 준비해온 재료를 조리대에 올려놓은 후 가방에서 앞치마를 꺼내 단단히 묶었다.
대회가 끝난 뒤 오랜만에 중식도를 손에 쥐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중식도를 손에 쥔 채 조리대 앞에 서니 다시 요리에 대한 열정이 꿈틀거렸다.
“그럼 시작해 볼까? 방송 봤으면 잘 알겠지만, 제일 먼저 찹쌀을 불려놔야 해요.”
차은석이 옆에 나란히 서서 똑같이 찹쌀을 씻어 물에 담갔다.
그리고는 등갈비를 도마 위에 올려 칼집을 내준 뒤 하나하나 먹기 좋게 썰었다.
“여기에 간장, 후추, 설탕, 청주 등을 넣고 버무려요.”
차은석은 역시 전문 요리사답게 한 번 쓱 보고는 바로 똑같이 음식을 만들어 냈다.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고 있던 김원상이 불린 찹쌀을 너무 곱지 않게 밀어 가루를 만들고 그 위에 양념한 갈비를 골고루 묻혔다.
그리고는 찜기에 가지런히 담아 찌기 시작했다.
고기가 잘 익는 동안 웍에 고추기름을 넣어 채소를 매콤하게 볶아냈다.
“이렇게 매콤한 채소볶음이 세트로 같이 나가는 메뉴입니다.”
“상상되는 맛이기는 한데, 그러면서 호기심이 생기는 요리이기도 하네요.”
“원래 아는 맛이 무서운 거거든.”
주방에 달짝지근한 갈비찜 냄새가 가득했다.
냄새에 마치 끌려들어 온 듯 오승연이 연신 코를 킁킁거리며 주방으로 들어왔다.
“점심 먹은 지 얼마 안 됐는데, 갑자기 식욕이 확 땅기는데요. 팀장님 이거 완성되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요?”
김원상이 시간을 체크했다.
“이것도 고민거리이긴 합니다. 중식은 스피드가 생명인데, 이건 아무래도 갈비찜이나 마찬가지라서 시간이 오래 걸려요. 그걸 보완할 아이디어가 필요한데...”
“예약 한정판매.”
오승연이 손가락을 탁 튕기며 김원상을 바라봤다.
“하루에 양을 정해놓고 예약할 때 미리 주문을 받아서 판매하는 거 어때요? 왠지 리미티드라고 하면 더 사고 싶어지는 심리를 이용해서.”
“예약을 통해 미리 만들어 놓을 수도 있으니까 시간도 단축하고?”
“그렇죠.”
차은석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아이디어 같은데요? 갈비만 미리 재어 놨다가 예약 시간에 맞춰 찌면 될 것 같습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김원상이 찜기의 불을 끄며 접시에 잘 쪄진 등갈비와 매콤한 채소를 담아 차은석과 오승연에게 전했다.
다른 조리대에서 채소를 손질하고 있던 김지호 보조 셰프도 불러서 평가를 부탁했다.
“드디어 그 유명한 갈비 밥을 먹어보는 거예요?”
오승연이 손뼉을 쳐가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냥도 먹어보고, 채소 곁들여서도 먹어봐요. 평가는 냉정해야 하는 거 알죠?”
“그럼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갈비를 벌써 뜯기 시작한 오승연의 말이 갑자기 확 걱정하게 만들었다.
‘설마 점장인 나한테 혹평을 하진 않겠지? 아니, 할 게 있으면 해보라고 해. 난 자신 있으니까.’
김원상도 자신이 만든 갈비를 들어 입에 넣고 채소볶음을 얹어서 또 한 입 먹었다.
아무래도 긴장을 덜 해서 그런지 지난번 경연대회 때보다 더 맛있게 만들어진 것 같았다.
모양도 맛도 만족스러웠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 또한 나쁘지 않아 보였다.
“점장님. 이거 너무 맛있는데요? 우리 빨리 메뉴에 올려요. 가격은 얼마에 하면 좋을까요?”
오승연이 아직 입에 남은 갈비도 씹으랴 질문도 하랴 입이 바쁘게 움직였다.
“뭐 더 보충할 아이디어는 없나요? 이대로 가면 되겠습니까?”
차은석이 마지막으로 양념에 찹쌀밥을 쓱쓱 비벼 한 입 먹고 신중하게 음미했다.
“찹쌀을 약간만 간 이유가 있군요. 적당히 씹히는 식감이 좋습니다. 더 많이 갈면 떡 같은 느낌이 들어 별로일 것 같아요.”
차은석의 평가에 동의한다는 듯이 김지호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요리 같으면서 또 한 편으로는 밥과 같은 느낌, 그래서 갈비밥인가 보네요. 정말 맛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건 신선한 등갈비를 사들이는 것과 잡냄새 안 나게 밑 손질을 하는 것 같습니다.”
차은석의 마무리를 짓는 멘트가 이어졌다.
“그럼 이대로 가는 걸로 정합니까? 다른 의견 덧붙일 건 없다는 말이죠?”
김원상이 나머지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쳐다보며 한껏 고조된 음성으로 물었다.
그리고는 신나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순간이었다.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주방 입구 쪽에서부터 호통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