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점심 장사 시작하기 전에 부드럽게 먹고 시작합시다.”
“뭐야? 아침이야, 점심이야?”
“늦은 아침?”
“난 아침 많이 먹었는데….”
어제와 다르게 오늘 갑자기 내온 음식에 잠시 눈치를 살피던 준형이 인우가 내려놓은 게살수프를 앞으로 가져가며 냄새를 맡았다.
“아침 먹었는데도 이 냄새 맡으니까 식욕이 확 도네. 그럼 한 번 먹어볼까?”
인우가 다운의 앞으로 그릇을 밀어주었다.
“점심에 손님 많으면 제때 식사 못 할 수도 있어. 우선 이거라도 먹어둬야 든든해.”
다운이 처음 보는 음식인 듯 그릇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게살수프인데, 이게 워낙 만들기 간단해. 다음엔 맛있는 요리 해줄게.”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음식을 먹기 시작하자 머뭇거리던 다운이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조금 떠 입에 넣었다.
잠시 움찔하던 다운이 다시 게살수프를 크게 떠서 먹었다.
자꾸만 피어나는 미소를 억지로 숨기려 애쓰는 듯 다운의 볼이 실룩거렸다.
“어때? 맛있지? 앞으로 11시 출근이지만, 오늘처럼 일찍 나와. 맨날 나 혼자 아침 대충 때우는데 같이 먹자. 시간당 근무수당은 정확하게 쳐 줄거야.”
“됐어요.”
“나 혼자 먹으니까 너무 처량하고 맛없어서 그래.”
인우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쳐다보던 다운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까지 출근하면 아침 제공이냐? 나도 숟가락 좀 올려보자.”
준형이 넉살 좋게 한마디 거들었다.
“그건 우리 새로 온 식구한테 물어봐야지.”
다들 동시에 다운을 쳐다봤다.
“저는…. 9시까지 오겠습니다.”
“좋아. 그럼 아침 9시까지 출근하는 사람은 이 요리 고수의 음식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다들 알았지?”
“뭐야? 그럼 나는 아침 먹고 다시 갈까?”
지영의 말에 보일 듯 말 듯 웃음을 보인 다운이 정말 맛있게 게살수프를 먹었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플 나이에 비쩍 마른 모습이 영 걸리던 인우는 속으로 다짐했다.
가장 먼저 내 식구 배부터 채워줘야겠다고….
아직 이른 시간인데 누군가 가게 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다운이 용수철처럼 튕겨 나와 손님을 맞이했다.
다 먹은 그릇을 치우던 인우도 앉아서 핸드폰을 보고 있던 준형과 지영도 모두 놀라 다운을 쳐다봤다.
“혹시 식사 되나요?”
아주머니와 젊은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운은 바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인우를 쳐다봤다.
“물론입니다. 편한 곳에 앉으세요.”
“잘됐다. 우리 여기 앉자.”
아침 바람이 아직 서늘하게 느껴지는지 아주머니가 옷깃을 여미며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우리가 새벽에 물건 하러 큰 시장 다녀오느라 아침을 못 먹어서요. 지나가는데 고소한 냄새가 나서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
거칠게 갈라진 손을 비비며 아주머니가 벽에 걸린 메뉴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넌 뭐 먹을래?”
“난 아무거나 먹지 뭐. 엄마는?”
“난 너 먹고 싶은 거 시키면 좀 거들면 될 것 같아.”
아들이 어머니 컵에 물을 따라 놓으며 미소를 머금은 채 노래를 흥얼거렸다.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지….”
“얘는 갑자기 웬 노래야?”
어머니가 물을 마시며 사랑스러운 눈으로 아들을 쳐다봤다.
“어 그 노래 유명하죠.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는데, 알고 봤더니 햄버거를 더 좋아한다는….”
“네? 그 노래가 언제 그렇게 바뀐 건가요?”
“하하, 농담입니다.”
지영이 준형을 심하게 노려보며 팔을 끌고 갔다.
다운 또한 준형을 위아래로 한번 쳐다보더니 다시 주문을 받았다.
“천천히 두 분 다 드시고 싶은 걸로 주문하세요. 여기 사장님 방송에서 요리대회 우승한 유명한 분이십니다. 못하는 요리가 없어요.”
다운을 쳐다보는 나머지 세 명의 눈이 또 한 번 놀라 두 배는 더 커졌다.
“말을 길게 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구나.”
준형이 고개를 저어가며 작게 말했다.
“다운 씨 듣겠어요. 하여튼 준형 씨 못 말린다니까.”
“계속 같이 일하면 내 매력에 퐁당 빠져 버릴 텐데요. 아쉽네요.”
“뭐래?”
지영이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카운터로 뒤돌아 갔다.
“여기요. 주문할게요.”
“네, 손님.”
“저희 잡채밥 하나 짜장면 곱빼기 하나 주세요.”
“맛있게 해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정다운이 메뉴를 찍어 주방 입구에 걸었다.
이제 스무 살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능숙한 움직임에 지영이 안심하는 눈빛을 보냈다.
태어나 처음 먹어보는 요리에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제대로 된 사람대접이 어색하면서 좋았었나 보다.
다운이 용기를 내어 지영에게 다가갔다.
“저 뭐든 열심히 할게요. 다 가르쳐 주세요.”
“이미 너무 잘해서 더 배울 것도 없겠어요. 주문 넣는 건 지금 해봤으니까 조금 있다가 계산하는 것도 한 번 해봐요.”
“네, 언니…. 언니 맞죠?”
“나 늙어 보여? 그래도 언니 소리 들으니까 기분 좋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커피 맛도 알고 사장님과도 편하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짐작한 거예요. 절대 늙어 보이는 건 아니고….”
지영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뭐야? 이렇게 말이 길어지면 나 정말 늙은 것 같잖아. 앞으로 저 두 남자가 힘들게 하면 나한테 바로 연락해. 내 번호 특별히 알려줄게.”
“네, 감사합니다.”
지영이 관심 보이는 준형에게 장난기 섞인 눈빛을 보이며 다운에게 핸드폰 번호를 찍어줬다.
홀에서는 어머니가 계속해서 아들에게 잡채밥을 덜어주고 아들은 그만큼 짜장면을 덜어주고 있었다.
“정말 보기 좋은 광경이네.”
준형이 얼굴 가득 미소를 담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항상 가장 맛있고 좋은 건 엄마랑 아빠가 드셔야 한다고 그랬어요. 우리가 살날이 훨씬 많다고.”
“지영씨 어머님이 아주 현명하시네요.”
“네, 그래서 갈치 가운데 토막을 못 먹어봤어요. 그건 항상 이모나 아빠 거였으니까.”
지영이 말하면서도 기분은 나쁘지 않은 듯 웃고 있었다.
“이모라면 인우 어머니?”
“네. 얼마 전 서울로 독립하기 전까지 나는 완전 찬밥이었다니까요.”
“지영씨가 딱 어머니 닮았나 보네. 현명하고 똑 부러지고.”
“칭찬으로 들을게요.”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맛있게 아침 겸 점심을 먹은 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로 다가온 아들이 카드를 내밀자 다운이 능숙하게 받아 결제를 마치고 카드를 돌려줬다.
“아주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너무나 앳된 얼굴의 다운이 보여주는 능숙함이 인우는 왠지 더 마음에 걸렸다.
* * *
마영준을 만나고 온 뒤로는 계속 가슴이 답답했다.
그의 요리를 향한 열정과 실력에 놀랐고, 그와 나눈 대화 때문에 또 놀랐었다.
김원상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점장님, 어디 안 좋으세요?”
홀 매니저 오승연이 다가와 물었다.
“두통이 좀 있어서…. 별거 아니에요.”
“약 있는데 하나 드릴까요?”
“더 심해지면 부탁할게. 일 봐요.”
홀에 꽉찬 손님을 보니 콕콕 찌르던 통증이 조금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점장님 방송 나가고 나서 확실히 손님이 더 많아졌어요. 이제 예약 하지 않으면 아예 못 먹는다니까요.”
‘우승은 못했어도 이정도면 방송 출연 효과는 제대로 본거 아닌가?’
그런 생각도 잠깐, 아버지 얼굴이 떠오르자 바로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뭐든 최고 아니면 의미 없다는 양반이니, 이 정도로 절대 성에 찰 리 없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주방을 둘러보기 위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주방 안에는 여러 음식 냄새와 열기로 가득했다.
다 완성한 요리를 접시에 담아 내놓은 차은석 셰프가 힐끗 김원상을 쳐다봤다.
잠시 눈이 마주친 김원상이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오지 마, 그냥 너 할 일 해.’
그런 속마음을 전혀 모른다는 듯이 차은석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이 씨. 할 말도 없는데...’
“뭐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에요. 그냥 한 번 둘러보러 온 겁니다.”
“그럼 오신 김에 지난번 경연대회에서 보여주신 갈비밥 레시피 좀 알려 주세요. 손님들이 계속 찾고 있습니다.”
김원상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안 그래도 내가 그 갈비밥을 여기 [만가복] 마포지점의 시그니처 메뉴로 개발해 볼까 하는데...”
“그러시죠. 이미 메뉴에 올라왔을 줄 알고 많이들 찾고 있습니다. 레시피만 알려 주시면 제가 바로 여기 보조셰프들 교육 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심인가? 아니면, 내 아이디어를 뺏으려는 건가?’
김원상이 그의 요구에 바로 답을 내놓지 못하자, 예상했다는 듯이 차은석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여기 나가도 어디서든 그 요리는 하지 않을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국에 있는 사람들이 그 갈비밥은 점장님 아이디어라는 거 알고 있을테니까요.”
순간 창피한 기분이 든 김원상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뭐야? 마치 내 속을 읽고 있다는 듯이 말하네. 좀 잘 지내보려 해도 참 건방진 게 맘에 안 든단 말이야.’
“여기서 자신의 이름을 건 요리를 내놓고 싶지 않습니까? 차은석 셰프 실력이라면 충분히 욕심부릴 만한데...”
“내 가게도 아닌데, 내 이름 걸고 내놓게 해줄 겁니까? 점장님은 몰라도 회장님은 절대 용납 안 해주실 겁니다.”
“셰프의 스페셜 요리로 가면 될 것 아닙니까?”
그 말에 차은석이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왜 갑자기 기분 나쁘게 웃는 거야? 이게 정신이 나갔나?’
안 그래도 아픈 머리가 더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셰프의 스페셜 요리? 그럼 내가 돈 모아 내 가게를 열게 되면 그 요리는 절대 만들지 못하는데?”
“자기가 개발한 요리인데 왜 못 만듭니까? 더 편하게 맘껏 만들면 될텐데...”
“점장님은 어느 쪽입니까?”
갑자기 던지는 질문이 이해되지 않았다.
“갑자기 그건 무슨 말이에요?”
“회장님 뒤를 따르는 겁니까? 아니면, 독자 노선을 걷는 겁니까?”
‘나는 과연 어느 쪽일까?’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절대 아버지와 같은 사람은 되지 않을 거라 몇 번을 맹세했는데, 과연 독자 노선을 걷는다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만가복]에서 일하는 한 아버지 김형식과 별개인 김원상이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가복]을 떠날 생각도 물론 없지만...
김원상의 흔들리는 눈빛을 지켜본 차은석이 주방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괜한 질문을 했습니다. 지금은 바빠서 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 같네요. 갈비밥 메뉴 시작하는 건 잘 생각해보세요. 내가 아니라 손님들이 원하는 거니까.”
그 말을 남기고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간 차은석은 다시 아무렇지 않게 웍을 잡고 요리를 시작했다.
주방을 빠져나온 김원상은 어릴 적 읽은 동화 [혹부리 영감님]이 갑자기 떠올랐다.
지금 자기 자신이 복잡한 머리 식히러 주방에 들렀다가 오물통을 머리에 뒤집어쓴 기분이 들었다.
‘이런 제길. 정말이지 혹 떼려다가 혹 하나 더 붙이고 온 꼴이군.’
결국 오승연에게 부탁해 두통약을 하나 입에 털어 넣었다.
약이 효과가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지는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