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김원상이 다녀간 후 마영준은 계속 뭔지 모를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김형식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텐데...’
마지막으로 한강에서 대화를 나눴던 김형식의 서릿발 같은 눈빛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였다.
덩치 큰 사내 하나와 머리에 왁스를 잔뜩 발라 위로 세운 남자 하나가 사장을 찾으며 가게로 들어왔다.
“내가 여기 사장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젊은 놈이 성공했네? 이 좋은 가게가 네 꺼라는 얘기지?”
보자마자 반말을 툭툭 던지는 사내는 마치 가게가 생각보다 좋아서 기분이 나쁘다는 투로 말하며 테이블과 벽에 걸어놓은 장식등을 거칠게 만지기 시작했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곧 손님들이 올 시간이라 나가서 얘기 하시죠.”
“아, 내 소개가 늦었네. 나는 돈 빌려주고 이자도 받고 원금도 받고 하는 사람이요.”
마영준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내가 잊어버렸을까 봐 이렇게 직접 온 겁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이번 달 이자 바로 부칠 거니까.”
사내가 목을 양쪽으로 뚝뚝 꺾어 보였다.
“변동사항이 있어서 내가 친히 온 거 아니야. 오늘부터 이자 낼 필요 없어. 내가 원금을 회수해야겠거든.”
“갑자기 그게 무슨…?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으하하, 지금 우리 돈 쓰고 법이네 뭐네 운운하는 거야?”
사내가 옆에 서서 어깨에 힘만 주고 있던 덩치 큰 다른 사내를 보며 일부러 더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길게 한숨을 내쉰 마영준이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얼마를 갚으라는 말입니까?”
“내가 돈이 좀 필요해서 남은 원금 다 갚아야겠어.”
“뭐라고요? 1억을 한꺼번에 다요?”
“앞으로 일주일 안에 직접 주든지 지난번 그 계좌로 부치든지 그럼 되는 거야. 돈 쓸 때처럼 아주 쉽고 간단하지?”
이거였던 건가?
이거 때문에 계속 불안했던 건가?
마영준은 오히려 속이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김형식의 협박 같은 경고가 있었던 후로 계속 파고드는 막연한 불안함, 두려움이 차라리 돈이어서 다행이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눈덩이처럼 부푼 빚을 갚느라 통장은 이미 텅 비어 있었고, 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는 그에게 일주일 만에 그 큰돈을 만들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최대한 장만해 볼 테니까 한 달만, 아니 딱 일주일만 더 시간을 주세요.”
“귓구멍이 막혔나? 일주일 준다고 했다. 명심해!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아이스 커피 머리 깨지게 차갑게 두 잔 부탁해.”
할 말 다 했다는 듯이 가게로 다시 몸을 돌리는 사내를 마영준이 막아섰다.
“알았어요, 알았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구해 볼 테니까 어서 내 가게에서 나가요.”
“이거 손님을 내쫓네. 좋아, 그럼 정확히 일주일 후 이 시간에 다시 오도록 하지. 실수하면 재미없을 거요, 명심하라고.”
오래전 유행했던 노래처럼 정말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김형식의 경고가 날카로운 비수로 가슴에 깊이 박혔었다.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힘인 돈으로 상대방이 조금의 반항도 하지 못하게 찍어 눌러 버리는 거.
정말 김형식다운 방법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지금 자신이 한마디로 미친놈 같았다.
머리를 세게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영준은 다시 가게로 들어가 여기저기 급하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 * *
토요일 오전 일찍 정다운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다운씨. 일찍 왔네요. 아직 정식출근 아니라 오후에 나와도 되는데요.”
“네.”
끝이었다.
보통 아침에 출근하면서 가볍게 나누는 그 흔한 인사말이 전혀 오지 않았다.
순간 머쓱해진 서인우는 쭈뼛거리다 물었다.
“커피 마셔요? 봄이라도 아직 아침 바람이 차가운 데 커피 한 잔 줄까요?”
“커피 맛 몰라요.”
또 끝.
절대 한 문장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면접 볼 때는 정말 신공을 발휘했었나 보다.
“그럼 우리 가게에서 일하면서 커피 배워봐요. 내가 한 잔 만들어 줄 테니까.”
“네.”
오늘이 첫날이라 아직 성격 파악이 안 된 인우는 더는 대화가 쉽지 않겠다고 판단하고 조심스럽게 주방으로 향했다.
“사장님은 보통 몇 시에 나오세요?”
드디어 첫 질문이었다.
“나? 나는 4시에 일어나서 새벽시장 갔다가 가게에 도착하는 시간은 대략 7시 전이에요. 오픈 시간은 11시지만, 일찍 나와서 준비하고 커피 한잔하는 게 좋아서.”
“네.”
질문은 던져 놓고 별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정다운이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준형이 가게로 들어왔다.
그 어느 때보다 반가운 그의 등장이었다.
한 발을 집어넣고 흠칫 놀라 멈춰선 준형이 재빠르게 인우를 쳐다봤다.
“왔냐? 정다운 씨가 일찍 왔네. 커피 내리려던 참이었다.”
“어? 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정다운의 고개가 아주 미세하게 살짝 끄덕이고는 다시 정면을 향했다.
“그럼 오늘 서인우표 핸드드립 커피 마시는 거냐?”
“그래, 잠시 둘이 얘기하고 있어.”
“내, 내가 도와줄게.”
“커피 내리는 데 뭘 도와줘? 가게 전반적인 설명도 좀 해주고 질문도 받아주고 그래라.”
뒤돌아서 주방으로 향하는 인우의 눈이 신나서 웃고 있는 건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 그래. 커피 빨리 마시고 싶다. 얼른 와.”
정다운은 계속해서 의자에 붙인 상체를 앞뒤로 흔들며 주방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집은 어디쯤이야? 여기서 가까워?”
“왜 물어보지도 않고 반말이에요? 기분 나쁘게.”
“어? 나, 나는 이력서 봤으니까. 나보다 한참 어리고 말을 편하게 해야 금방 친해질 것 같아서...요...기분 나빴으면 미안...요...”
조용한 가게에서 들리는 둘의 대화 소리에 하마터면 소리내 웃을 뻔한 인우가 일부러 소리를 크게 만들며 커피를 갈았다.
그라인더에 커피 가는 소리 사이사이로 숨어 들어간 인우의 웃음소리가 살짝씩 들리는 것 같았다.
누가 지금 들어온다면 중식당이 아니라 카페로 착각하리만큼 진한 커피 향이 온 가게를 물들였다.
“커피 맛을 잘 몰라도 조금씩 이 향에 빠져들게 될 겁니다. 마셔봐요.”
“네, 앞으로 말씀 편하게 하세요. 사장님이고 나이도 저보다 위이시니까요.”
준형이 억울하다는 듯이 인우와 다운을 번갈아 쳐다봤다.“그럼 나도 이제 말 편하게 해도 되는 거야..요?”
인우가 소리 내 웃기 시작하자 뾰로통해 있던 다운이 준형을 노려봤다.
“말을 편하게 하는 것 까지는 인정, 하지만 무시하는 태도는 참지 않을 거예요.”
“나 사람 무시하고 그러는 스타일 아니야. 항상 모든 사람을 진지하게 대하고 누구나 가족같이 생각하고...”
“그거 하지 마세요. 가족같이...그런 거 싫단 말이에요.”
다운의 눈이 더 매섭게 변했다.
몸을 부르르 떨며 준형이 커피를 마셨다.
“아, 뜨거워. 커, 커피 엄청 뜨겁네.”
“방금 내린 건데 당연하지.”
“커피 향 죽인다. 오빠 나도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을까? 정다운 씨 일찍 왔네요. 다시 봐서 반가워요.”
지영의 등장으로 어색했던 분위기가 싹 사라졌다.
“그럼 바로 내려줄게.”
“이건 카페지 짜장면집이 아닌데? 역시 오빠 커피가 최고지.”
“곧 짜장면집 될 거니까, 잠시만 즐겨.”
주방에서는 커피 가는 소리가 울리고, 홀에서는 준형의 심장 뛰는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준형 씨는 무슨 일 있어요? 왜 이렇게 얼굴이 벌게져 있어요?”
“뜨거운 커피를 급하게 마셔서 그래요. 난 저쪽 가서 노트북 좀 봐야겠다.”
준형이 커피를 들고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기자 지영이 정다운의 눈을 바라보며 싱긋 웃어주었다.
그 웃음이 쑥스러운지 고개를 떨군 다운이 습관인 듯 발로 바닥을 찼다.
“아직 손님이 그리 많지 않아서 바쁘지는 않을 거예요. 우선 커피 마시고 카운터 보는 법부터 알려줄게요.”
마침 인우가 들고 오는 커피잔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지영이 급하게 손을 내밀어 잔을 뺏었다.
“음, 진짜 향 죽인다. 어디 맛 좀 볼까?”
지영이 후후 불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한 모금 이어 마셨다.
“이거 원두 뭐야? 콜롬비아인가 과테말라?”
“과테말라야. 로스팅한 지 일주일 지난 거라 제일 맛있을 때야.”
정다운이 둘의 대화를 마치 무슨 외계어를 구사하는 다른 별사람처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커피를 마셔보았다.
쓰다.
하지만, 이게 뭔지 모르겠지만, 쓴데 이 향이 나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아침에 커피를 마시며 서로 인사를 하고 여유를 즐기고 있었나 보다.
집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던 풍경이 너무 낯설지만, 그냥 좋았다.
조그만 가게에 서너 살 많은 사람.
그냥 편하게 언니, 오빠 부르고 싶은 사람들이 웃으며 말을 걸어준다.
욕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라 관심을 보여주는 모습이 적응하기 힘들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절대 마음을 주고 편하게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조금 전 느낀 감정들을 애써 털어냈다.
“정다운 씨도 커피 좋아해요?”
“커피 맛 잘 몰라요.”
“나도 학생 때는 이 쓴 걸 엄마 아빠가 왜 좋아하나 이해가 안 됐어요.”
웃으며 하는 얘기에 얼굴색이 더 어두워진 다운을 보며 눈치 빠른 지영이 잔을 들고 카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 계산서 찍는 것부터 알려줄게요.”
“그건 할 줄 알아요. 아르바이트하면서 많이 해봤어요.”
“그랬구나. 그럼 뭐 딱히 내가 가르쳐 줄 것도 없는데…. 점심때 손님 오면 주문받고 물이랑 밑반찬 써빙하는 거, 그리고 계산하는 거 같이 해봐요.”
“네.”
“손님 오기 전에 커피나 여유 있게 마시자고.”
다시 향을 음미하고는 커피를 마시는 지영의 얼굴이 봄에 핀 벚꽃처럼 환해 보였다.
세상 근심·걱정이 전혀 없는 듯한 얼굴.
그러면서 당당하게 자기주장 펼치는 모습이 정다운은 부러워서 화가 났다.
의자에 앉자마자 다시 발로 바닥을 툭툭 치던 정다운이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며 얼굴을 심하게 찡그렸다.
식어서 그런가?
기분이 나빠서?
조금 전보다 커피가 더 쓰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속도 싸르르 쓰린 것 같았다.
살짝 배를 움켜쥐고 남은 커피를 아주 조금씩 홀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인우가 조용히 주방으로 들어갔다.
“사부, 게살수프를 좀 만들어야겠어.”
-오늘 첫 주문이냐?
“아니, 우리 식구 먹이게.”
-누구? 어머니 오셨어?
“새로 뽑은 직원. 아무래도 아침을 안 먹고 온 것 같아서.”
-여기 들어와서 먹으라 해. 얼굴 좀 보자. 아니면, 나를 손에 들고 나가던지.
“첫날부터 애 놀랠 일 있어? 이제 한 식구니까 자주 보게 될 거야.”
인우는 게살을 결대로 가늘게 찢어놓고, 냄비에 미리 만들어 놓은 닭 육수를 부어 소금을 넣고 끓였다.
중식도가 표고버섯을 가늘게 편으로 썰어놓고, 쪽파도 송송 썰어 준비해놓았다.
육수가 팔팔 끓자 게살과 버섯을 넣고 전분물로 농도를 맞췄다.
마지막으로 달걀흰자를 힘차게 저어 머랭을 만들어 냄비에 부었다.
금세 부드러운 게살수프가 완성되었다.
송송 썬 쪽파와 참기름을 넣은 후 제법 큰 그릇 네 개에 담았다.
고소한 참기름 향이 훅 들어오자 정다운이 자기도 모르게 바닥을 차던 발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인우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