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42화 (42/200)

제42화.

“안녕하세요, 어르신. 여긴 어떻게 아시고 찾아오셨어요?”

“잘 있었나? 서 고수. 우선 경연대회 우승부터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이렇게 다시 뵐 수 있어서 너무 반가워요. 잘 지내셨죠?”

최만수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에 놓인 백짬뽕을 쳐다봤다.

“자세한 얘긴 조금 있다하세. 내가 요게 너무 먹어보고 싶어서 말이야.”

“네, 식기 전에 어서 드셔 보세요.”

채소와 해물을 밀어낸 후 뽀얀 국물만 숟가락 가득 떠서 입에 넣은 최만수가 아무 말 없이 다시 국물을 떠먹었다.

“허, 허.”

말없이 웃음을 뱉어내던 최만수가 이번에는 젓가락을 들어 채소와 해물을 집어 입에 넣었다.

“채소는 아삭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해물은 무르지도 질기지도 않게 아주 잘 볶아졌어. 역시 고수는 다르군.”

마치 순서를 정해놓은 듯 그다음으로 면을 들어 탄력을 느껴보더니 그대로 입에 후루룩 집어넣었다.

탱탱한 면발이 딸려 올라가면서 내는 소리가 경쾌했다.

“기계로 뽑아도 아주 탱탱한 게 면발이 살아있네. 전에 선보인 레시피 그대로 만드는 거겠지?”

“네, 시간상 수타로 뽑지 못할 뿐입니다.”

면에 해물과 채소를 얹어 다시 크게 한 입 먹고 난 최만수가 그제야 가게 안을 천천히 돌아봤다.

“저거 [서풍]에 있던 메뉴판을 가져왔구만, 맞지?”

“네, 가게가 작아서 메뉴판이 유독 눈에 띄죠?”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오픈하면 연락 꼭 해준다더니 이 늙은이는 완전히 잊어버린 거지?”

인우가 당황하며 손을 강하게 가로 저었다.

“아니에요, 어르신. 아직 정리가 다 안 돼서 연락 못 드렸어요. 항상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찾으셨어요?”

“내가 장사할 때 빚쟁이들을 자주 찾아다녀서 사람 찾는 건 도사야. 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자네 집 근처더군.”

“그렇군요. 가게가 작고 보잘것없지만,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최만수가 쓱 내부를 훑어보더니 물었다.

“여기에서 시작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테지, 내가 잘은 모르지만, 무슨 일이든 생각 없이 시작할 사람은 아니지 않나?”

“네, 고민 많이 하고 결정했습니다.”

“그럼 됐어. 자네 나이에 시작하는 곳으로 나쁘지 않아. 잘해보라고.”

“네, 어르신. 잠시만 앉아서 드시고 계세요. 제가 요리 하나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최만수가 아쉬운 듯 짬뽕 국물을 한 번 더 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주겠다는 요리 다음으로 킵 해놓게. 내가 사실 오늘은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던 거라 시간이 없어.”

“알겠습니다. 다음에 꼭 다시 오세요. 제가 [서풍]을 제대로 느끼실 수 있게 아빠의 양장피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좋지. 약속했네. 공짜 양장피.”

“네. 어르신도 약속하셨습니다. 꼭 다시 오셔야 합니다.”

멀리 가게 문을 나서는 최만수 뒤로 인사하는 서인우의 모습이 보이자 잠시 멈춰 서 있던 장비서가 천천히 차를 향해 걸어갔다.

좁은 시장통 초입을 조금 벗어난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최만수의 모습이 나타나자 바로 차 문을 열고 나왔다.

“잘 만나보고 오셨습니까? 인사만 하시고 오신다더니 말씀이 좀 길어지셨나 봅니다.”

뒷좌석에 앉으며 최만수가 껄껄 호탕하게 웃었다.

“그 잠깐 사이에 백짬뽕을 맛보고 왔지. 역시 기대했던 맛 그대로야.”

“치사하게 혼자 드셨다는 말씀입니까?”

“내가 오랜만에 그 맛이 궁금해서, 정말 맛만 보고 왔네. 다음에 꼭 같이 가서 제대로 먹어보자고. 양장피도 공짜로 주겠다고 약속도 받아놨지. 으허허.”

골목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계속 큰소리로 웃던 최만수가 차창을 살짝 내려 크게 공기를 들이마셨다.

“이제 완전 봄이구만. 장비서! 봄 향기가 느껴지지 않나?”

“오늘 미세먼지 최악입니다. 창문 닫겠습니다.”

뾰로통한 말투가 이미 빈정이 상한 듯 들렸다.

“지금 자네 삐친 건가?”

“[서풍]은 뭐 회장님만 추억의 장소입니까? 항상 저랑 같이 가셨었는데….”

“알았네, 최대한 빨리 가서 같이 식사하자고. 그럼 됐나?”

“전가복도 시켜 주십시오.”

말을 끝낸 장비서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껄껄 소리를 내고 웃었다.

최만수 또한 조금 전 멈췄던 웃음소리가 다시 입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놈은 하필 오늘 중요한 회의를 잡아놔서. 얼른 가세.”

“네. 그렇게라도 회장님 시골 못 내려가시게 잡아두고 싶은 아드님 마음도 헤아려 주세요.”

“얼른 내려가서 나도 요리하고 싶단 말일세.”

조금 전 먹은 백 짬뽕의 맛을 잊기 전에 빨리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최만수는 그런 생각에 마음이 자꾸만 꿈틀거려 시간이 더디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최만수가 가게를 나가고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새로 생긴 가게를 향한 호기심에 들렸다는 손님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영과 준형이 주문을 받고 인우는 열심히 음식을 만들었다.

재빠르게 짜장면과 짬뽕, 탕수육 등을 만들어 벨을 누르고 잠시 허리를 펴고 있는데 홀이 시끌시끌했다.

“또 오셨네요?”

지영의 반가움이 섞인 한 톤 높아진 목소리에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보자 점심에 왔던 남자 손님 중 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어디 어디 있어? 당신이 잘 못 들은 거 아니야?”

“아녀, 여기 가게 이름보면 모르남? 당신이 금요일마다 빠져서 보던 그 고수인가 뭔가 그 사람이 사장이라니께.”

“그럼 지금 음식 만들고 있는 건가? 우리도 빨리 앉자. 너도 빨리 앉아.”

먹성 좋게 생긴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에게 의자를 빼주며 눈은 연신 주방 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서인우 셰프 찾으시는 거죠?”

준형이 눈치껏 주방으로 걸어가고 있자니, 소리를 들은 인우가 모습을 나타냈다.

“어머머머, 맞네. 맞아. 이게 웬일이야?”

아주머니는 이제 남편과 아들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서인우입니다. 점심때 드셨는데, 저녁까지 중식으로 드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전혀 상관없어요.”

질문은 남편한테 했는데, 답은 여자 쪽에서 나왔다.

“보시다시피 나한테는 메뉴 결정권도 없수다.”

그제야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남편이 한마디 했다.

“이런 유명한 사람이 만들어 주는 요리를 우리가 언제 먹어보겠어요? 소문나면 자리도 없을텐데... 난 매일 올 거야.”

“아예 한 달짜리 식권을 사지 그려?”

“그럴까? 그런 것도 있어요? 서인우씨?”

남편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건 없지만, 언제든지 오셔서 맛있게 드시고 가주세요. 그럼 천천히 메뉴 보시고 주문해주세요. 최선을 다해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네. 그런데요...”

“네?”

“들어가시기 전에 사진 한 장 만...”

“이 마누라가 주책이구먼.”

핸드폰으로 게임을 열심히 하고 있던 볼살이 빵빵한 아들이 자동머신처럼 벌떡 일어나더니 엄마 핸드폰으로 사진 찍을 준비를 했다.

“이놈이 아주 자동이네. 나오기 전에 둘이 얘기가 다 됐구만. 허허.”

인우가 옆에 키를 낮춰 서자 아들이 핸드폰을 가까이 가져가다 말고 미스코리아 미소를 애써 짓고 있는 엄마한테 짜증을 냈다.

“내가 사진 찍을 때 꼭 뒤로 서라고 했지? 엄마 얼굴 대빵 크게 나와.”“저, 저 새끼가...죄송합니다.”

여자가 아들을 한번 노려보고는 바로 인우의 뒤로 쑥 빠졌다.

세 장을 연달아 찍고는 바로 인사를 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꾸밈없고 단란해 보이는 가족의 모습이 좋아 보였다.

순간 어릴 적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엄마도 사진 찍을 때마다 항상 투덜거렸었는데….”

-왜? 어머니 미인이시던데?

“아빠랑 내가 키가 커서 항상 가운데 엄마가 서 있는 곳이 싱크홀 같다고.”-하긴, 상상해보니 웃기기는 하다.

“엄마가 붕 떠서 찍을 수는 없으니까, 나랑 아빠가 항상 매너 다리를 했었지. 이젠 그게 습관이 됐어.”

-뭔 다리?

인우가 조금 전 사진 찍었을 때처럼 다리를 구부리며 보여줬다.

“이걸 매너 다리라고 불러. 상대방을 배려해 주는 자세라서.”

-그럼 앞으로 나랑 대화 할 때는 매너 입을 좀 하면 어떨지...나를 좀 더 사부로 깍듯하게...

“어? 주문 들어왔네.”

-이것 봐! 내 말은 맨날 씹고.

인우가 씩 웃어 보이고는 바로 요리를 시작했다.

드문드문 손님이 왔다 가고 어느새 문 닫을 시간이 되었다.

“오빠, 주방 정리 다 끝났어? 불 끄고 들어가자.”

“늦기 전에 얼른 들어가. 난 준형이랑 얘기 좀 하고 갈게.”

“오전에 계약서는 내가 꼼꼼하게 확인했어. 몇 가지 수정하면 좋겠다 싶은 것도 있던데…. 우선 둘이 오늘 잘 얘기해봐.”

옆에서 듣고 있던 준형이 지영을 빤히 쳐다봤다.

“어느 부분에서 수정이 필요한 겁니까? 내가 아주 투명하게 작성해 왔는데….”

지영이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대답을 내놓았다.

“자금, 지분 뭐 이런 건 투명하게 잘 정리되어 있더라고요. 단지 지금 이 계약서는 얼마간 유용한 건지 정확한 기간을 명시해야 할 것 같아요.”

“그야 뭐 평생 같이할 거니까….”

“그런 식으로 대충 말고 정확한 수식으로 적어 두셔야죠. 우선 1년 계약서라든가, 아니면 목표 달성까지 라든가.”

“지영씨 정말 똑소리 나네.”

준형이 또다시 엄지척해 보였다.

“안 그래도 오늘 그런 구체적인 미래 계획을 의논해볼 생각입니다. 맥주 한잔하면서.”

“부디 술이 주목적이 아니길 바랄게요. 그럼 사업 파트너끼리 잘 협상해 보세요. 오빠, 나 먼저 가.”

“그래, 조심하고.”

지영이 [CLOSED] 팻말을 걸고는 가게 문을 나갔다.

인우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와 앉자 급하게 캔을 따 마신 준형이 ‘캬’하는 소리를 크게 내보냈다.

“진짜 시원하다. 오늘도 수고 많았다.”

“하던 대로 해라.”

“그래도 이제 사업 파트너인데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써야지.”

인우도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뭐냐? 할 말이?”

“오늘 면접본 정다운인지 따운인지는 어떻게 알게 된거야?”

“따운?”

“얘가 얼굴이 완전 바닥까지 따운된 표정이잖아. 이제 스무 살이면 세상에서 제일 밝고 예쁠 나이 아니냐? 근데 너무 어두워.”

“눈빛이 슬퍼 보였어. 그러면서 뭔가 고집도 있어 보였고.”

“넌 그런 눈빛을 슬퍼 보인다고 하는구나.”

준형이 새로운 걸 알게 됐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난 눈빛이 무서워서 걔 일어설 때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서 두 손 모으고 인사했잖아.”

인우가 대답 대신 작은 미소를 보이고는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면접 보면서 여기 월세냐고 물었을 때 네가 한 대답 그건 뭐냐? 혹시 너도 나랑 같은 생각인가 해서.”

“너 생각이 뭔데?”

준형이 자세를 바로잡으며 가방에서 서류를 한 장 꺼내 보였다.

“내가 어제 잠 안 자고 찾아본 건데, 이 근처 가게들 시세다. 혹시 이 가게 주인이 여기 팔 생각은 없는 거냐?”

“내가 자꾸 월세를 깎으니까 차라리 싸게 줄 테니 사라는 얘기는 한 번 했었어. 힘들어서 고향 내려가서는 이제 서울 안 사실 거라고. 나도 계속 고민 중이고.”

“그래? 얼마에?”

“싸게 준다고는 했는데 정확히는 몰라. 우선 작게 시작해서 내 가능성을 먼저 점검해 보려고.”

준형이 다른 종이를 하나 꺼내 보였다.

“이건 어제 내가 작성한 우리 사업 10년 계획서다.”

“10년 계획?”

준형의 눈빛이 전과 다르게 장난기가 완전히 빠져있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인우를 바라보는 준형이 오늘따라 완전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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