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40화 (40/200)

제40화.

[서풍TWO]의 둘째 날이 시작되었다.

인우는 새벽에 사 온 해물과 채소들을 주방에 한가득 쌓아놓고 정리를 하고 있었다.

9시도 되지 않았는데, 가게 문을 열고 준형이 모습을 나타냈다.

“굿모닝. 커피 아직이지?”

“커피 간절했는데, 역시...”

준형이 커다란 테이크 아웃 잔에 담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인우에게 건넸다.

“인우야.”

쌉싸름하면서 고소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 인우가 대답 대신 준형을 쳐다봤다.

“넌 셰프복 입고 일하고, 난 유니폼 없냐? [서풍TWO] 라고 찍힌 명찰이라도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안 그래도 나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홀에서 일할 직원 한 명 구해야 해. 그러면 그때 같이 만들자.”

“좋아. 우선 흰 남방셔츠에 앞치마를 허리에 간지나게 묶어줘야 해. 물론 셔츠 소매는 딱 여기까지 접고.”

준형이 소매를 팔꿈치 바로 아래까지 접어 올리며 말했다.

“이거, 이거 보이냐? 내 팔에 푸르스름하게 보일 듯 말 듯 드러나는 이 힘줄. 이게 또 매력 터지는 거거든.”

“너 일하러 나온 거 맞지?”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 여기 오는 손님하고 눈이 맞을지 누가 알아?”

“계속 헛소리하면 나한테 맞을지는 알겠다.”

둘이 소리 내 웃고는 다시 커피를 마시며 각자 할 일을 찾아 움직였다.

준형이 테이블과 수저통 등을 닦고 정리하는 모습을 슬쩍 보고는 주방으로 들어온 인우는 점심 장사 준비를 위해 채소를 손질했다.

“사부, 감자부터 멋지게 썰어볼까?”

-그래, 그다음에 양배추 썰자. 좀 쉬었더니 온몸이 간지러워서.

“좀 쉬게 해달라는 소리 곧 할 수 있게 만들어 줄게.”

주방에서 채소를 써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준형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이야, 서인우. 중식도 다루는 솜씨를 지금 내가 라이브로 보고 있는 거지? 이거 기분 괜찮은데?”

“주방은 내 영역이야. 이제 바빠지면 수시로 들어와서 방해하고 그러면 안 돼.”

“중화요리 고수님이신데 잘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됐냐?”

한마디 툭 던지고는 다시 홀로 나간 준형이 테이블을 닦았다.

30분쯤 지나자 이모 딸 지영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직 영업 안 하는데요.”

“남의 가게에 누구세요?”

“그러는 님은 누구신지...”

지영과 준형의 대치 상황에 후닥딱 주방에서 뛰어나온 인우가 둘 사이에 서서 급하게 서로를 소개했다.

“지영아, 나랑 동업하기로 한 내 친구 이준형이야.”

“준형아, 여긴 우리 이모네 딸 윤지영이야.”

“안녕하세요. 인우 대학 동기 이준형입니다.”

준형이 악수를 권하며 손을 내밀었다.

“나중에요. 오빠, 나 좀 봐.”

어색하게 손을 내린 준형이 쎄한 지영의 눈빛을 피해 다시 닦던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주방으로 인우를 끌고 들어간 지영이 홀을 흘낏 쳐다본 후 팔짱을 끼며 물었다.

“저 친구랑 동업한다고?”

“응, 그렇게 됐어.”

“저 친구 뭐 할 줄 아는데? 무슨 능력이 있어? 오빠한테 도움이 될만한 사람인 건 맞는 거야?”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친구이고, 영어도 잘하고 내가 필요한 순간에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리라 믿어.”

지영이 다시 홀을 살피고는 인우 곁으로 바짝 붙었다.

“직원이 아니라, 동업이라는 얘기지? 그럼 저 친구도 자본을 대야 하잖아?”

“보증금 둘이 반씩 내고 하는 거야.”

“오빠가 가게 다 알아보고 인테리어도 다 했는데? 게다가 요리는 다 오빠 손으로 만들 거고. 동업은 좀 양심 없는 거 아닌가?”

“지영아.”

인우가 지영의 눈을 지긋이 바라봤다.

“난 지금, 현재만 보고 가게를 연 게 아니야. 여길 시작으로 계속 [서풍TWO]를 키워갈 생각이야. 그러려면 같이 의논하고 바른길을 잡아 줄 조력자가 필요해.”

“저 친구가 그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믿는 거지?”

“그래. 믿어.”

“오빠가 그렇다면 맞겠지. 다시 나가자.”

지영이 끝까지 풀지 않고 있던 팔짱을 풀고는 인우를 끌고 홀로 나갔다.

“이준형 씨. 정식으로 인사하죠. 윤지영이에요. 인우 오빠와는 한 살 차이.”

“아, 다시 인사하죠. 이준형입니다.”

지영이 먼저 손을 내밀자 준형이 어색한 듯 악수를 했다.

“오빠한테 대충 들었어요. 둘이 동업하신다고 하던데, 계약서는 확실히 주고받은 거죠?”

인우와 준형이 서로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오늘 작성해서 내일 확인하고 싸인하고 한 부씩 나눠가질 겁니다. 그럼 되는 거죠?”

준형이 무서운 시어머니라도 만난 며느리처럼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럼 내일 계약서 보면서 다시 얘기하죠. 착하고 성실하기만 한 오빠한테 얼마나 현실적인 도움이 될 사람인지 제가 지켜볼 겁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세요.”

“그것도 내일 계약서 보고 얘기하죠. 그럼 각자 일 봅시다.”

지영이 카운터로 걸음을 옮겨 위에 놓인 종이들을 정리하자 준형이 슬슬 눈치를 보며 인우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왔다.

“내 영역이라 그랬다?”

“한 살 아래인 거 맞지? 완전 대장 누나 같은 포스인데?”

“워낙 야무져서 이모가 며칠 도와주라고 딱 붙여놨다.”

“홀 직원 뽑을 때까지? 설마 계속 잔소리하면서 붙어 있는 건 아니겠지?”

“부탁해볼까 생각 중이다.”

준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 실수라도 하면 호흡곤란 올 것 같은데?”

인우가 피식 웃으며 준형의 등을 밀었다.

“지영인 일주일만 도와주는 거야. 가서 할 일 하셔.”

준형의 모습이 사라지자 다시 양파를 썰기 시작했다.

-저 친구 결국 숟가락 올렸군. 나도 잘하나 지켜볼 거다.

“지켜봐 주는 사람 많아서 열심히 해야겠는데?”

-다른 직원은 꼭 얼굴 보고 뽑아라. 그래야 매출도 팍팍 오른다고.

“그래야 사부 기운이 팍팍 오르는 거 아니고?”

-다 그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시끄럽고 양파나 썰자고.”

-양파 썰고 배추 썰고.

인우는 피식 웃음을 내보이고는 다시 양파를 썰기 시작했다.

점심 준비가 거의 다 되어갈 무렵 가게 문을 열고 아주머니 둘이 쭈뼛쭈뼛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여기 언제 바뀐 거예요? 칼국수 먹으러 왔는데...”

“어제 오픈했습니다. 여기 칼국수처럼 기억에 남아 자주 찾을 수 있는 맛을 선보여 드릴게요.”

“그럼 한 번 먹어볼까?”

지영이 메뉴판을 가리켰다.

“메뉴 보시고 천천히 고르세요. 아, 혹시 [중화요리 최고의 고수를 찾아서] 방송 보셨을까요?”

“그럼요, 그거 너무 재미있게 봤는데…. 끝나서 요즘 볼 게 없어.”

“여기 셰프님이 그 프로그램에서 최종 우승한 분이세요.”

“그러고 보니 가게 이름이 [서풍TWO]네. 그럼 서인우 씨가 한단 말이에요?”

아주머니 하나가 손뼉을 치며 한 톤 올라간 목소리로 물었다.

주방에서 대화 소리가 들은 인우가 홀 쪽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어머머. 정말이네. 서인우 씨 맞아.”

“웬일이야? 우리 대박이다. 그치?”

“우리 주문하고 사진 한 장 같이 찍어주면 안 될까요?”

“제가 들어가서 요리를 해야 해서...지금 바로 찍으시죠?”

꺅하는 괴성과 함께 두 아주머니가 서로 핸드폰을 번갈아 가며 사진을 찍었다.

혹시나 같이 찍자 부를까 어슬렁거리던 준형이 급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서는 카운터 쪽으로 몸을 피했다.

“저놈 완전 스타네요.”

“스타라기 보다는 그냥 아이돌이죠.”

눈이 반달이 된 지영도 준형의 푸념을 들어주진 않았다.

“천천히 메뉴 보시고 주문해주세요. 그럼 저는 주방으로 가서 맛있게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인우가 인사를 깍듯이 하고 주방으로 들어가자 두 아주머니의 메뉴 결정전이 시작됐다.

“서인우 셰프의 대표 메뉴인 백 짬뽕 먹자.”

“난 빈속이라 짜장면. 그럼 백 짬뽕하고 짜장면?”

“짜장면은 살찔 텐데? 그냥 맑은 우동 먹을까?”

“그럼 너무 허연 것만 먹는데? 백 짬뽕 말고 홍짬뽕 시킬까?”

“그래도 백 짬뽕이 최고지. 차라리 백 짬뽕에 요리를 먹을까?”

준형이 기다리다 지친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지영에게 물었다.

“오늘 안에 시키는 건 맞겠죠?”

“백 짬뽕하고 짜장면으로 주문 들어가면 될 거예요.”

“에이, 벌써 다른 의견이 몇 개나 나왔는데요?”

“기다려보세요.”

둘이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주문을 기다리는 순간이었다.

“여기요. 주문할게요.”

“네, 손님.”

지영의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홀에 가볍게 울렸다.

“우리 짜장면 하나, 백 짬뽕 하나 주세요.”

“네, 맛있게 해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지영이 주방을 향해 걸어가며 준형을 힐끗 쳐다봤다.

준형이 놀라 입을 벌리고는 지영에게 엄지를 세워 보였다.

인우는 해물과 채소를 불맛 살려 볶은 후, 방송에서 보였던 백 짬뽕의 비밀 병기인 닭발 육수를 꺼내 웍에 부었다.

시원한 해물 향과 매콤함이 적절히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탕을 만들고는 바로 면을 만들었다.

24시간 숙성된 면을 기계로 뽑아 바로 삶기 시작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짜장 소스를 부어 완성한 짜장면과 백 짬뽕을 쟁반에 올려 벨을 눌렀다.

준형이 주방 앞쪽 선반에 놓인 음식을 손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주문하신 백 짬뽕과 짜장면 나왔습니다. 천천히 맛있게 드세요.”

“네. 분명 맛있게는 먹겠는데, 갑자기 식욕이 확 올라와 천천히 먹을 수 있을랑가 모르겠네요.”

“얘는 주책이야. 호호호.”

음식을 테이블 가운데에 놓고 앞접시에 조금씩 덜어가며 먹는 모습을 보고 준형이 앞접시 두 개를 더 준비해 가져갔다.

“짜장면과 짬뽕이 섞이지 않게 따로 덜어 드세요. 그래야 제대로 된 맛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

“어머, 그러면 설거짓거리가 많이 나오는데…. 미안해서 어쩌죠?”

“괜찮습니다. 더 중요한 건 맛이니까요.”

“감사합니다.”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지영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준형이 가까이 다가와 서자 지영이 작게 말했다.

“설거지 같이 할거지? 역시 솔선수범 스타일이네. 오빠가 그래서 준형 씨를 선택한 거구나.”

“당연하지. 여기서 일하겠다 맘먹었을 때는 설거지뿐 아니라 뭐든 하겠다는 각오인 거라고.”

준형은 큰소리는 쳤지만, 솔직히 설거지까지 하게 될 줄은 생각 못 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는데….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자신을 반성하는 순간이었다.

다시 가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세요.”

“우리 바로 장사해야 하는데, 빨리 되는 걸로 두 개 주쇼.”

50대로 보이는 남자 둘이 들어와 앉자마자 주문을 했다.

“식사는 다 빨리 가능합니다. 최대한 빨리해드릴 테니 드시고 싶은 걸로 드세요.”

지영의 말에 메뉴를 슬쩍 쳐다보던 두 남자는 동시에 짬뽕을 외쳤다.

“짬뽕 최대한 빨리 그리고 제일 맛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주방으로 들어온 지영이 인우에게 메뉴를 전달했다.

“최대한 빨리, 물론 맛있게. 오케이?”

“그럼.”

인우의 손에 들린 중식도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를 내며 요리를 준비했다.

빨간 국물의 짬뽕을 받아든 남자 둘이 국물을 먼저 입에 넣고는 서로 커진 눈만 바라봤다.

“대충 끼니나 때우려고 했는데, 여기 너무 맛있는데?”

“시장 초입에 이렇게 명품 짬뽕집이 생길 줄이야?”

“맛이 괜찮으세요?”

준형이 다가와 슬쩍 물었다.

“국물이 끝내줘. 면도 탱글탱글하면서 부드럽고. 진짜 죽이는데?”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드시는 짬뽕이 [중화요리 최고의 고수를 찾아서]의 최종 우승자 서인우 셰프의 요리입니다.”

“그게 뭔디? 자네는 알아?”

“우리 마누라가 빠져서 봤던 무슨 요리 대결 방송 같은데?”

“맞습니다. 나중에 댁에 가셔서 소문 내주세요. 그 방송 최종우승한 서인우 셰프가 직접 하는 식당이라고요.”

준형이 자기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역시 홍보에는 최고라니까.’

아주머니 둘이 맛있다는 말을 연신 하더니 가게를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새 짬뽕을 다 먹은 남자 둘도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

잠시 뜸한 틈을 타 주방을 나온 인우의 앞에 누군가 조심스럽게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익숙한 앳된 얼굴이 반쯤 고개를 들이밀고 서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