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왔냐?”
“개업 축하한다. 너 말대로 조용히 맥주나 한잔하려고 늦게 왔다. 그래도 내가 제일 축하한다는 건 알아줘야 해.”
손에 가득 맥주가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준형의 눈빛을 보니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인우가 주방으로 들어가 안주를 준비해 오는 동안 준형은 집들이하는 친구 집에 온 듯 여기저기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이 작은 가게 뭐 그렇게 오래 볼 게 있다고 그러고 있어? 다 봤으면 이리 와서 앉아.”
맥주 캔을 부딪치며 다시 한번 축하의 말을 건넨 준형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맥주만 들이켰다.
한참 만에 준형이 입을 열었다.
“난 네가 복학도 포기하고 가게를 한다고 해서 너희 아빠 가게처럼 근사하게 시작할 줄 알았어. 이렇게 작고 초라한 가게에서 시작할지는 정말 몰랐다.”
인우는 그저 말없이 맥주만 마셨다.
준형이 그런 인우를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쳐다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상금으로 이 가게를 산 거냐?”
“아니, 여기 보증금 이천에 월세 100이야. 괜찮지?”
준형은 한숨을 길게 쉬고는 다시 맥주를 크게 들이켰다.
“이 가게 정감 있잖아. 오래된 맛집 같은 느낌도 들고.”
“정감은 개뿔. 완전 시장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외진 곳에다가 태풍이라도 불면 뭐 하나 날아갈 것 같은 낡은 집인데.”
인우는 지금 이 가게와 비교하면 유독 커다란 아빠의 예전 메뉴판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시작이니까. 뭐든 시작은 시행착오도 있을 것이고, 배울 게 많은 만큼 잃을 것도 많을 거야. 정말 많이 생각하고 결정했어. 여기가 딱 맞아.”
“나한테 가게 오픈하면 보고 정하라고 한 이유가 이거였냐? 가게 규모 때문에?”
“그래, 네가 생각하는 그런 근사한 직장이 못될 테니까.”
“네가 나를 띄엄띄엄 회 뜨듯이 봤구나.”
준형이 테이블 위에 안주로 내놓은 탕수육을 한 점 집어 입에 넣고는 말을 이었다.
“이 맛, 네 이 솜씨. 이걸 보고 결정한 거지, 네 가게 규모나 자본 따위를 보고 내 인생을 걸지는 않아. 나 생각보다 계산적이야.”
인우가 맥주를 들이켜다 캑 소리를 내며 웃었다.
“계산적인 놈이 대기업 면접 보러 다니다가 때려치우고 이런 낡은 가게에서 나랑 동업 하겠다는 거냐?”
“요즘은 직장의 개념이 완전히 달라졌지. 난 돈도 많이 벌고 성공하고 싶지만, 내 인생을 주도적으로 만들며 살고 싶어.”
“계속해봐.”
준형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옷매무시를 단정히 했다.
“혹시 이거 면접입니까? 사장님.”
“장난하지 말고 앉아.”
껄껄 한 번 크게 웃고 난 준형이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난 네 성실함과 능력에 나의 지적 재능과 융통성이 합해지면 완벽한 한 팀이 될 거라고 확신해.”
“난 성실한 거 인정, 능력도 최종 우승까지 했으니까 인정, 네 지적 재능은 듣도보도 못한 얘긴데?”
“어디서 고졸 학력이 까불고 있어. 난 대졸자에 영어 토익 980점, 컴퓨터 능력 최상... 더 해줘?”
인우가 대답 대신 웃으며 매주 캔을 부딪쳤다.
“말하다 보니 열받네. 난 이 스펙으로 왜 면접에서 떨어진 거지?”
뭔가 말을 하려는 인우의 입에 탕수육 큰 덩어리를 쑤셔 집어넣으며 준형이 다급히 말했다.
“너 외모 때문이니 뭐니 그런 우정 금 가는 소리 하면 당장 오늘 저녁부터 네 가게 망하라고 물 떠 놓고 빌 거다.”
“난 아무 말 안 했다.”
“에이 씨. 마셔!”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켜고 난 준형이 인우의 눈을 진지하게 바라봤다.
“너 자신 있지?”
“그럼. 이게 시작이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꿈꾸는 건 아빠의 [서풍]을 기억하는 사람들과 이곳을 처음 찾은 사람들 모두 한번 맛보면 영원히 기억에 남는 요리를 만드는 거야. 자신 있어.”
“좋았어. 우리 한번 멋지게 해보자.”
“그럼 이번엔 내가 뭐하나 묻자?”
준형이 입 안 가득 넣은 탕수육을 급히 씹어 삼켰다.
“혹시 이 면접에서 탈락할 수도 있는 거냐?”
“네가 결정하면 무조건 따른다고 했잖아?”
“그런데 갑자기 무섭게 뭘 물어보려고?”
“동업을 원하는 건지, 내 가게에 직원이 되고 싶은 건지 정확한 네 의사와 네가 원하는 조건을 알고 싶었어.”
제법 진지한 질문에 준형이 준비한 듯 바로 대답을 내놓았다.
“내 조건은 하나. 너랑 동등한 자격으로 시작하는 거다.”
“나도 그럴 거로 생각했어. 처음부터 끝까지 동등하게 같이 하는 사업 파트너, 그렇게 생각하면 맞지?”
“너만 오케이 해주면...아무래도 방송 보고 동업 제의가 많이 들어올 거니까.”
“솔직히 말해서 맞아. 여기저기서 동업 제안이 계속 들어오지만, 난 한 번도 동업을 생각한 적 없어.”
준형이 인우가 방금 내놓은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하지만, 전에 말했듯이 너니까. 너라면 모든 걸 같이 시작해서 같이 나눌 수 있어. 네가 나를 믿듯이 나도 너를 믿으니까.”
“너 요즘 방송물 먹더니 왜 이렇게 멋져지냐? 내가 여자였으면 홀라당 넘어갔다, 정말.”
“미친놈, 하여튼 잠시도 진지한 건 못 참지.”
인우가 손에 들고 있던 맥주 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나도 생각 많이 했는데...내가 이 가게에서 시작하는 이유,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가 바로 너야.”
준형이 무슨 말이냐는 듯 인우를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월세는 당장 일해서 매달 내면 되는 거고...보증금, 네 몫이 천만 원이다. 그건 준비할 수 있지?”
“자본부터 정확히 반씩 투자해서 시작하자?”
“그래야 이 가게 반이 네 것이 될 테니까...”
“인테리어는 이미 다 네가 했는데...네가 손해라는 생각 안 해?”
“대신 네 지적 능력과 융통성을 최대한 발휘 해줄 거잖아, 안 그래?”
준형이 손을 내밀어 보였다.
“좋아, 우리 잘해보자. 서 대표.”
“여긴 대표라고 부르기 좀 그렇지만, 진짜 대표라고 느껴지게 성공시켜 보자. 이 대표.”
준형이 내민 손을 어색하게 맞잡은 인우는 멋진 조력자를 얻어 든든했다.
* * *
운전석에 앉아 아버지로부터 건네받은 종이를 펼쳐본 김원상은 익숙한 주소에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일하는 가게와 가까운 곳이었다.
종이에 적힌 [셰프의 주방] 이라는 이름도 워낙 유명해 알고 있던 곳이었다.
‘그럼 이곳이 마영준 셰프가 운영하는 곳이었단 말인가?’
[만가복] 마포점을 몇 년째 운영하면서도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언젠가 홀 매니저 오승연이 유명한 퓨전 차이니즈 식당이라고 얘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한 번 가본다 했었는데, 이렇게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곳에 왜 가보라는 걸까? 그것도 염탐까지 시키면서….’
도통 알 수 없는 아버지 김형식의 머릿속이 더 궁금해졌다.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 주소는 [만가복] 마포점에서 10분이 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제법 큰 건물 1층을 다 사용하는 [세프의 주방]은 겉에서 보면 마치 이태리 식당 같기도 하고, 카페 같기도 했다.
깔끔한 외관이 맘에 드는 곳이었다.
예쁜 입간판이 세워진 곳 옆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보니 밝은 조명의 가게 안이 한 눈에 들어왔다.
검은 색 앞치마를 허리에 두른 여직원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혼자 오셨나요?”
“네, 마영준 셰프님 계신가요? 식사도 하고 셰프님도 뵐겸 왔는데요.”
“어?”
그제야 김원상의 얼굴을 알아본 여직원의 눈이 동그랗게 변해 있었다.
“맞죠? [중화요리 최고의 고수를 찾아서] 거기 참가하셨던 분...[만가복]?”
“네, 맞습니다. 알아보시네요.”
“그럼요. 우리 사장님이 출연하시기도 하고 거기 참가자들 인기도 워낙 많아서 거의 본방사수 했어요.”
“감사합니다. 우선 주문 할게요.”
“아, 내 정신 봐. 이쪽으로 앉으세요.”
여직원이 창가에 햇빛이 은은하게 들어오는 자리로 안내했다.
테이블 위에는 작은 유리 화병에 장미꽃이 한 송이 꽂혀 있었다.
그 옆에 간결하게 적힌 메뉴판이 보였다.
“여기는 치즈 탕수육이 유명하죠?”
“아무래도 저희 가게 시그니처 메뉴죠.”
“그럼 그거 하나하고 또 뭐가 유명한가요?”
“손님들이 치즈 탕수육하고 차돌 짬뽕을 제일 좋아해 주십니다.”
김원상이 메뉴를 좀 더 가까이 가져오며 물었다.
“그리고 하나 더 추천해 주신다면요?”
“일행이 더 있으신가요?”
“지금 배가 많이 고파서요. 마영준 셰프님 요리도 정말 궁금하기도 하고..”
“그럼 쪽갈비 스테이크 덮밥도 유명해요.”
“그것도 같이 주세요.”
“알겠습니다. 주문 넣으면서 사장님께 말씀드릴게요.”
여직원이 주방을 향해 사라지자 김원상은 가게 내부를 꼼꼼하게 살폈다.
정통 중화요리를 고수하는 [만가복]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는 비싼 돈을 주고 차린 [만가복]에 미치지 않지만, 색다른 분위기가 좀 더 젊은 사람들 취향처럼 느껴졌다.
‘가까운 곳에 이렇게 유명한 식당이 있었는데...’
요리에도 사업에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지난날들이 후회됐다.
가게 내부 탐색을 마치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뒤돌아보니 마영준 셰프가 직접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셰프님. 아니, 심사위원님.”
“대회도 끝났는데 무슨 심사위원. 그냥 편하게 불러요.”
“이렇게 직접 요리해서 들고나오실 줄 몰랐습니다. 영광입니다.”
마영준이 직접 만든 치즈 탕수육을 테이블에 내려 놓으며 김원상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우리 가게에는 무슨 일로?”
질문을 던지는 마영준의 표정이 별로 달가워 보이지는 않았다.
“경연대회에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여기가 제가 일하는 가게와 가까운 곳에 있더라고요. 반갑기도 해서요.”
“난 알고 있었는데…. 거기서 밥도 먹어봤지.”
“그러셨어요?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가게에 잘 없지 않았나?”
“전에는 그랬죠. 이제 제대로 해보려고요. 요리도 장사도.”
“뜻밖이군요. 하긴 이번 대회에 참가한 것도 사실 의외였어요. 요리는 완전히 손을 놓은 줄 알았거든.”
김원상은 어딘지 모르게 마영준의 말투가 거슬렸다.
뭔가 가시가 있는 듯 곱게 들리지 않았다.
“이거 내 치즈 탕수육은 뜨거울 때 먹어야 제맛인데…. 우선 먹고 있어요. 내가 조금 있다가 다시 올 테니까.”
“네, 잘 먹겠습니다.”
마영준이 일어나 주방으로 향하는 걸 잠시 지켜보던 김원상이 치즈가 길게 늘어나는 탕수육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분명 중식 탕수육을 먹고 있는데, 마치 치즈돈가스를 먹는 것 같은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고소한 치즈 탕수육을 달콤한 소스에 찍어 입에 넣자 또 다른 맛이 입안에 찰싹 감겼다.
역시 인기가 많은 곳은 뭔가 다르긴 달랐다.
동네에 한두 개씩 즐비해 있는 여느 중화요리 집 하고는 맛도 분위기도 달랐다.
이어서 나온 차돌 짬뽕은 얼큰한 맛을 강조한 국물에 차돌박이에서 나오는 고소한 맛이 더해져 진한 감칠맛을 선보였다.
고기를 좋아하느냐에 따라 호불호는 있겠지만, 채식주의자가 아니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좋아할 만한 맛이었다.
‘이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 대회에서 그렇게 깐깐하게 평가를 했나 보군.’
그런 생각이 잠시 떠오르자 문득 또 다른 질문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분명 내 요리에는 만점을 여러 번 줬었는데, 서인우 그자의 요리는 낮은 점수를 줬었지. 혹평도 했었고. 왜 그런...’
순간 머릿속에 있는 모든 세포가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얼음물이 뇌세포 모두를 얼려버린 듯한 오싹한 기분.
아버지 김형식이 대회가 끝나자마자 여기를 보내서 염탐하고 오라는 이유.
자신과 서인우의 점수가 확연히 차이가 났던 이유.
그 모든 비밀은 마영준에게 있었다.
젓가락을 들고 있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런 김원상의 모습을 주방에서 나온 마영준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