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이모부 차가 도착한 곳은 진한 회색 벽이 세련되게 보이는 깔끔한 5층 건물의 1층이었다.
입구 양옆에 보이는 낮은 화단에 핀 색색의 꽃들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이모부, 여기 너무 깔끔하고 고급스러운데요?”
“어때? 전에 있던 연남동 가게는 너도 알다시피 쇼핑몰로 다 바뀌어서…. 잘생긴 네 외모와 어울릴만한 곳 찾는다고 내가 고생 좀 했다. 괜찮지?”
인우는 농담 섞어 말하고 있는 이모부의 진심이 느껴져 정말 고마웠다.
“그런데, 여기 너무 비쌀 것 같은데요?”
“그 문제는 걱정하지 말고 비록 크기는 작지만, 최대한 형님의 [서풍]과 비슷한 분위기의 식당을 찾고 싶었어.”
“여기 정말 좋아요. 그런데 좋기는 한데 여기서 시작하기에는….”
인우 이모부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이 이모부가 도와줄 수 있어, 인우야. 자금은 걱정하지 말아라.”
“아니요, 아빠의 가게를 이어가는 거지만 내 능력으로 시작할 수 있어야 내 가게가 되는 거로 생각합니다. 아빠가 물려주신 돈도 있고, 상금도 있어서 충분합니다. 이모부 도움은 마음만 받겠습니다.”
인우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강한 어조로 말을 하며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건 다시 얘기하고 그럼 네가 봐둔 가게 한 번 볼까?”
인우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장 가까이 가자 차가 멈췄다.
“골목이 좀 복잡해서 차는 여기다 주차하셔야 할 것 같아요.”
인우는 앞서 빠른 걸음으로 비좁은 골목을 지나 시장 초입으로 들어갔다.
몇 평 되지 않는 낡은 칼국수 집 앞에 멈춰선 인우는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것 같았다.
“왜? 배고파? 칼국수 먹자고?”
“아니요, 제가 봐둔 가게가 여기예요.”
이모부는 허름한 가게를 보고는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일부러 고개를 심하게 움직여 가며 내부를 둘러보았다.
가게 문이 열리고 70이 훌쩍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앞치마에 주름진 손을 닦으며 나왔다.
“사장님. 잘 지내셨어요?”
“그제도 오고 매일같이 오면서 뭔 인사여?”
“제 이모부예요. 제가 아직 계약이나 이런 경험이 없어서.”
“경험이 없다는 놈이 그렇게 월세를 깎아달라고 난리여? 내가 질려서 더 빨리 나가려고 하는구먼.”
늙은 노 사장은 눈가에 주름을 크게 만들며 웃고 있었다.
“온 김에 국수나 한 그릇 먹고 가. 결정은 그다음에 하고.”
인우는 이모부 표정을 살폈다.
인우 이모부는 가게 내부도 좀 자세히 볼 겸 들어가자는 말과 함께 먼저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진한 멸칫국물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밖이 보이는 넓은 통창 쪽으로 네 개의 테이블이 놓여있고, 그 맞은 편으로 또 네 개의 테이블이 놓여있는 작은 가게였다.
입구 반대편으로 깊이 들어간 곳에 진한 육수가 끓고 있는 주방이 있었다.
“당연히 위층은 없는 거지?”
“그럼요, 여기 사장님이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공기 좋은 시골로 내려가셔야 한다고 임대를 놓으시는 거예요.”
“여기는 시장통이고, 가게도 너무 낡고 작은데...”
“아버지가 처음 시작한 곳이에요.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전 여기가 좋아요, 이모부!”
둘이 대화하는 사이 국물이 찰랑찰랑 가득 담긴 칼국수 두 그릇과 김치, 단무지가 담긴 쟁반을 들고 노 사장이 다가왔다.
인우는 벌떡 일어나 그릇들을 내려놓고는 다시 앉았다.
“이모부, 드셔 보세요.”
“좋은 곳 가서 영양 보충 좀 시켜주려고 했더니….”
인우 이모부는 그렇게 말을 하며 칼국수를 한 젓가락 들어 후후 불고는 입에 넣었다.
“이야. 여기 칼국수 제대로네. 국물도 진하고 면도 쫄깃하고 정말 맛있는데.”
“이모부, 이 집 칼국수는 먹으면 몸만 아니라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지 않아요? 저도 그런 요리를 만들 거에요. 그래서 이 자리에서 하고 싶은 거고요.”
“넌 이미 여기로 마음을 정했구나!”
“네, 아빠 가게 생각하면 아주 초라하지만, 저는 젊잖아요.”
“그래 인마, 젊음이 깡패다.”
인우는 두 입술을 굳게 다물며 가게에 피어나는 하얀 연기를 따라 맘속 깊은 곳에서부터 꿈틀거리는 강한 의지를 다시 한번 느끼고 있었다.
* * *
“이번 달에 남은 원금을 회수해. 내 말 알아들어?”
은밀히 통화하던 김형식이 문 앞에 인기척이 느껴지자 급하게 통화를 마무리했다.
“딱 일주일만 시간을 주고 전액 회수해 버리라고. 실수 없이 처리해.”
회사에 도착한 김원상은 회장실 앞에 서자 다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비서가 문을 열자 안으로 들어갔다.
급하게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서랍에 밀어 넣는 김형식의 모습이 열린 문틈으로 살짝 보였다.
“앉아.”
“통화 중이셨나 보네요.”
“알 거 없어.”
대화를 이어 나가자는 건지 단절시키자는 건지 헷갈리는 말투에 잠시 멈칫했던 김원상이 포기한 듯 다시 물었다.
“어제 얘기 이어서 하시죠. 당연히 우승할 줄 알고 인터뷰까지 여러 개 잡아놓으셨다 하셨죠? 내 능력을 인정해주지도 않으면서 무슨 근거로...”
“결과는 네 능력으로 정해지는 게 아니라, 내 계획에 맞게 움직이는 거였지.”
“그럼 계획에 차질이 생긴 모양이네요.”
김원상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쳐다보는 김형식이 멸시의 눈빛을 보냈다.
“웃어?”
“죄송합니다. 그냥 아버지 앞에서 나는 실에 매달린 인형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실에 매달린 인형은 내 뜻대로 움직이기라도 하지. 넌 그것보다 못한 존재야.”
김원상이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오늘 왜 오라고 하셨습니까?”
“어제 서원이한테서 전화가 왔었다. 봄에 완전히 들어올 생각인 것 같던데….”
“서원이가요? 거기서 말뚝 박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건 네 바람 아니었고?”
김원상은 요즘 들어 아버지가 자기한테 더 쌀쌀하게 대하는 것 같아 서운했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세 살 터울의 여동생 김서원.
동생이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시작해 평생 지겹게 들은 말이 있었다.
친남매 맞냐는 말.
5학년이 될 때까지 구구단을 제대로 못 외워 구박을 받았던 자신과 달리 동생 김서원은 초등학교 입학할 때 이미 간단한 영어 회화와 곱셈까지 가능한 상태였다.
둘을 다르게 교육했냐고?
그럴 리가.
욕심 많은 아버지 김형식의 첫 번째 분신인 아들을 위해 수입의 반을 김원상 교육에 투자했었다.
이미 싹이 텄다는 판단이 선 고등학교 입학 때까지는.
“요즘 같은 시대에 아버지는 아들, 딸 차별 하지 않는다. 누구든 능력 있는 자식이 내 뒤를 이어 [만가복]을 차지하게 될 거니까 그렇게 알아.”
김원상이 고등학교 재학 중에 아버지 김형식의 폭탄 발언이 있고 몇 개월 후 갑자기 피아노를 전공하겠다며 독일로 떠나버린 동생 김서원.
그 동생이 왜 갑자기 다시 돌아온다는 걸까?
하필 지금 이 시기에.
“무슨 생각에 빠졌길래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어?”
김형식의 호통이 한참 상념에 빠져있던 김원상을 들어 올렸다.
“서원이를 얼마 만에 보는 건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설마 오랜만이라 반갑다는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 아니겠지? 믿지도 않겠지만….”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입니다. 오면 반갑지 왜 안 반갑겠어요?”
콧바람을 세게 내뿜으며 김형식이 기분 나쁘게 웃었다.
“봄 되면 나온다니까 그건 만나서 확인해보지. 그건 그렇고….”
김형식이 테이블 위에 있던 서류철에서 주소가 적힌 종이를 하나 건넸다.
“이게 뭡니까?”
“이번에 경연대회 심사를 맡은 마영준이라는 놈 알지? 그놈 가게 위치다.”
“그런데요?”
“여기가 요즘 잘나간다는데, 네가 손님으로 가든 사람을 보내든 가게를 좀 살펴보고 와.”
“내 가게 놔두고 남의 가게를 왜요?”
김형식의 눈이 또다시 매섭게 변했다.
“이래서 내가 넌 안된다고 하는 거야. 이제 서른 갓 넘은 놈이 아비가 만든 [만가복] 마포점에서만 박혀 살 생각이었어?”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이해되지 않는 김원상이 잠시 말을 멈추고 눈만 깜빡거렸다.
“가서 어떤 요리가 인기가 많은지, 네 솜씨로 똑같이 해낼 수 있겠는지 알아봐.”
“그러니까 그걸 왜 하는데요? 무슨 계획인지 설명을 해줘야 할 것 아닙니까?”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 이 아비가 하는 일을 너한테 보고하라는 얘기냐? 건방지게.”
“아니, 그게 아니라….”
김원상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서도 내공이 느껴지는 단호한 음성을 들으면 저절로 주눅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내가 직접 만나보죠. 나도 물어볼 것도 있고요.”
잠시 김원상의 눈을 쳐다보던 김형식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회의 있어. 나가봐.”
“네. 그럼 일어나겠습니다.”
회장실 문 앞에 잠시 서서 한숨을 쉬고 있자니 비서 둘이 힐끗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이미 아버지가 호통치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던 비서들 또한 별 대수롭지 않게 느끼는 것 같았다.
그의 가는 길에 형식적인 인사만 까딱 보일 뿐이었다.
씁쓸한 마음이 절로 [만가복] 마포점으로 그를 떠밀고 있었다.
* * *
며칠 인우를 설득하던 이모가 백기를 들면서 본격적인 준비가 시작되었다.
식당 계약부터 인테리어까지 이모와 이모부의 도움으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최대한 이전 [서풍]의 분위기를 살릴 수 있도록 실내를 꾸몄다.
그리고 오늘은 간판을 다는 날이었다.
밖에 작은 화단을 만들어 입구를 화사하고 정감있게 보이게 했다.
문 위에는 홍등이 걸려있고, 문을 열고 들어오면 바로 벽 쪽에 붓글씨로 되어있던 이전 [서풍]의 메뉴판이 걸려있었다.
홀에는 전처럼 4인용 테이블이 8개 놓여있었다.
드디어 미리 제작을 맡겨 놓았던 간판이 도착했다.
[서풍 TWO].
인우 엄마 이지희는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간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인우는 엄마의 어깨를 조용히 감싸 안아주었다.
“엄마, 아빠 이름에 절대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해볼게. 엄마는 내가 성공하는 걸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고요.”
인우 엄마 이지희는 오후 내내 안고 있던 노트를 인우에게 건넸다.
“이거.”
처음 보는 낡은 노트를 조심스럽게 펼쳐보니 예전에 아빠가 거래했던 가게들의 이름과 장소, 가격 등이 적혀 있었다.
인우는 최형만의 소개로 해물 가게며 채소가게들을 찾아서는 놨지만, 아빠가 오랜 기간 거래했던 가게들이라면 더 믿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우는 뭔가 든든한 자기 편을 얻은 것처럼 마음이 놓였다.
‘당장에 이 가게들부터 가봐야겠다. 우리 아빠를 기억하고 있다면 더 좋을 텐데.’
“인우야. 그럼 다음 주 토요일에 오픈한다고?”
며칠째 표정이 어두운 인우 이모가 다가와 물었다.
“이모랑 이모부가 충분히 도와줄 능력은 되는데,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려서 ...”
“이모, 전 여기 너무 좋아요.”
“근사한 건물에서 폼나게 시작하면 좋았을 텐데... 좁은 골목길 시장통에 이런 허름한 가게에서 시작이라니...”
“이모, 제가 꼭 잘 해낼게요. 이제 얼굴 좀 피세요.”
인우 이모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눈가의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모. 오늘 엄마한테 받은 아빠의 거래처들은 어떻게 찾으셨어요?”
“내가 너 부탁받고 아무리 찾아도 안 나와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인우 이모는 슬쩍 주변을 살피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빠의 유품 가방 안에 있었어.”
“유품 가방이요? 전에 본 적이 없었는데….”
“나도 오늘 처음 봤어.”
“엄마가 방에 꼭꼭 숨겨놔서 전혀 몰랐지. 엄마가 충격받아서 쓰러질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몰라.”
인우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려 엄마를 쳐다봤다.
[서풍]의 메뉴판이 그대로 걸려있는 벽을 멍하니 바라보는 인우 엄마의 어깨가 연신 들썩이고 있었다.
인우 이모가 다시 인우에게 물었다.
“그럼 얼추 준비는 다 된 거지?”
“네, 지영이가 며칠 카운터를 봐준다고 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홀 서빙할 친구도 곧 뽑을 거예요.”
“그 계집애가 대학 졸업을 1년 앞두고 휴학한다고 해서 정신 나갔다고 혼냈는데 또 이렇게 도움이 되네.”
아직 대학생인 인우가 장사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걱정되었던 인우 이모가 야무진 성격의 딸 지영에게 부탁했던 것을 인우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대학 동기가 같이하겠다고 했는데, 오픈하면 가게 직접 보고 결정하라고 했어요. 그동안만 지영이 도움 좀 받을게요.”
“지영이는 맘껏 써먹어. 그나저나 돈이나 많이 벌면 좋겠다. 형부의 [서풍]이 이제 우리 인우의 [서풍TWO]로 다시 시작되는 거네. ”
인우는 이곳에서 어떤 사람들과 인연이 되어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지 기대와 설렘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