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놀란 인우의 눈이 두 배는 커져 준형을 바라봤다.
무심한 듯 툭 던진 말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안주를 질겅질겅 씹고 있던 준형이 북어포를 하나 들어 놀라 벌어진 인우의 입에 집어넣었다.
“뭐 그렇게 놀라냐?”
“농담이지?”
“진담인데.”
“장난하지 마, 인마.”
“나 진지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듣고 집에 가서 잘 생각해봐.”
준형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항상 장난기 섞인 말로 잘 웃어대던 준형이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조금씩 올라오던 술기운이 확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내가 너를 오래 지켜봤잖아?”
“그렇지. 나한테는 가장 오랜 친구지.”
“넌 성공할 거야.”
“근거는?”
“우선 첫째, 성실하고, 둘째, 인성 바르고, 셋째, 이게 가장 중요한 데 타고난 요리실력에 인지도 상승, 확실한 자본금.”
인우 입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다른 건 네 개인적인 평가니까 그렇다 치고, 확실한 자본금이라면 상금을 말하는 거냐?”
“우리 둘 다 집안 배경 없고 현재 가진 돈 없는데, 조그만 가게라도 열려면 우선 돈이 마련되어야 하잖아?”
“그렇지, 월세로 시작하더라도 보증금은 있어야 하니까.”
“난 네 가능성에 이 창창한 미래를 거는 거다. 그런데, 사람이 현실감이 중요하거든. 오늘 받은 1억이면 작게 시작할 초기자본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한다.”
-아무래도 저놈이 네가 차린 밥상에 숟가락 올리려나 보다. 내가 조용히 듣기만 하려고 했는데, 영어가 아니라 얼굴에서 떨어진 게 확실해. 현실감은 자기가 없구만.
‘똑똑한 놈이야. 분명 즉흥적으로 하는 말은 아닐 거야.’
-그야 방송으로 내 실력을 봤으니, 욕심이 나겠지. 내가 방금 말했지만, 나랑 정산하는 게 먼저다.
인우는 준형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생각이 많아졌다.
힘들 때 가장 많은 의지가 됐던 친구 준형이 같이 해준다면 뭐든 잘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대학 졸업을 앞두고 번듯한 대기업 취직을 준비하고 있던 준형에게 선뜻 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너 취했냐?”
“나 어느 때보다 멀쩡하고 진지해. 너도 친구로 말고 사업 파트너로 어떤지 잘 따져보고 고민해봐.”
“난 너라면 무조건 찬성이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나와 함께 할 거면 그에 맞는 용도가 있어야 할 거야.”
“네가 물건이냐? 무슨 용도를...”
준형이 빈 잔에 술을 쪼르르 따르며 소리 없이 웃었다.
“나 진지한 거 싫어해. 잘 알지?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한다. 나와 같이해서 네가 어떤 득이 생길지 며칠 따져보고 결정하라는 얘기야.”
인우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준형이 그를 선택한다면 무조건 함께 할 거라고.
하지만, 어떤 강요나 조건도 걸지 않을 거라고.
테이블에 나란히 빈 병 세 개가 놓여있었다.
준형이 진짜 마지막이라며 소주 한 병을 더 시켰다.
“준형아, 네 말대로 잘 고민해볼게. 하지만, 선택은 네가 하면 난 무조건 따를 거야. 너라면 뭘 선택하든 믿으니까.”
“그럼, 1억…. 꿔줄래? 무이자로 한 20년 정도.”
“뭐?”
준형이 껄껄대고 웃기 시작했다.
“야, 방금 진짜 농담인 거 알지? 말 뱉자마자 후회했다. 네 성격에 진짜 빌려준다고 진지하게 받아들일까 봐.”
“맞아. 뭐에 필요한지 물으려던 참이다.”
“하, 이것 봐. 내가 잘못했다. 네 성격 뻔히 아는데...이래서 넌 나 같은 매니저가 필요하다니까.”
“너니까.”
순간 준형이 웃음을 뚝 그쳤다.
“방금 멘트 조금 멋졌다. 마시자.”
술잔을 쨍 부딪치고 막 마시고 내려놓는데, 직원이 봉긋하게 올라온 계란찜을 서비스라고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것만 마시고 끝내려고 했는데, 할 수 없네. 사장님. 여기 소주 한 병 추가요.”
세상에 공짜 없다던 준형이 서비스로 나온 계란찜에 입이 귀에 걸려 웃고 있었다.
오늘은 1억이 아니라 그 몇 배, 몇십 배를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멋진 날이라는 생각을 하며 또다시 잔을 기울였다.
* * *
“이 새끼, 너 죽고 싶은 거지? 네가 감히 내 뜻을 어기고 그놈한테 만점을 줘?”
붉은 노을이 멋지게 드리운 한강을 바라보며 김형식이 마영준의 정강이를 발로 걷어찼다.
비싼 수제 구두라 그런가?
단단한 앞굽이 정강이를 파고드는 듯 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많이 아팠지만, 저 인간 앞에서 허리 숙여 다리를 만지고 싶지는 않았다.
신음이 밖으로 삐져나오지 않게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마영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요리를 직접 보고 맛을 봤다면, 회장님도 어쩔 수 없이 만점을 줬을 겁니다.”
“뭐? 이 새끼가...”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의 칼질과 그 어떤 맛도 튀지 않는 완벽한 맛의 조화는 요리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저를 되돌아보게 해줬습니다.”
좀 전에 보여주었던 흥분한 김형식의 표정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인제 와서 양심을 찾아 편해지겠다?”
작고 평온한 목소리였다.
마영준이 깊게 한숨을 뱉어냈다.
“서인우의 요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같은 요리사로서 정말 창피했습니다.”
“돈이 필요했던 거 아닌가?”
“네, 그 돈 받아서 지긋지긋한 빚 없애버리고 싶었습니다. 그 욕심에 눈이 멀었던 거죠. 이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갈 겁니다.”
김형식이 입술 끝을 비틀어 올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초심? 이미 구정물에 발을 담가놓고 가능할 것 같아? 네놈이 갚아야 할 빚에 이번에 심사위원 자리에 꽂아 넣으려고 쓴 돈까지 감당할 자신이 있나 보군.”
김형식을 노려보고 있던 마영준이 서서히 시선을 떨구었다.
“내가 원했던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 빚 어떻게든 갚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로 연락하지 마십시오.”
“조금 유명해졌다고 건방을 떠는군. 아직 나를 잘 모르나 본데…. 내 뜻을 어긴 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기대해보라고.”
마영준의 눈빛이 초조하게 변했다.
“죽을 때까지 빚 갚겠습니다. 그냥 요리만 하면서 살 수 있게 해주세요.”
“살 수는 있게 해줘야지. 내가 언제 죽인다고 했나? 사람 이상하게 만들지 말라고. 그저...”
김형식의 차갑고 매서운 눈빛이 마영준의 심장을 '쿵' 하고 떨어트렸다.
“그저 경고라고 해두지. 내가 기분이 나쁘다는 경고.”
한동안 그 눈빛을 거두지 않고 서 있던 김형식이 뒤돌아 차에 올라탔다.
얼마나 서 있었을까?
이미 붉은 노을은 타들어 사라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길게 한숨을 내 쉰 마영준은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에는 결승전에서 서인우가 요리했던 장면들이 쉬지 않고 떠올랐다.
5년 전 요리에 미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만가복] 보조 셰프로 일할 때 보여주었던 자신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때 그 유혹에 빠지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로 가득한 시간이 한 걸음 한 걸음씩 내딛는 마영준의 발목을 잡는 것 같았다.
* * *
박정원과 헤어진 김원상은 주차장을 빠져나와 무작정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지금 심정 같아서는 어디든 아버지 김형식이 찾지 못하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혹시 다른 사람이 꾸민 짓은 아닐까?’
잠시 희망을 품어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헛된 희망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김형식의 아들로 30년을 넘게 살았다.
그동안 겪어온 일들로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기 위해 차에서 항상 듣던 음악을 틀었다.
볼륨을 높이려 막 손을 뻗는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액정이 뱉어낸 이름이 그 어느 때보다 끔찍하게 느껴졌다.
[아버지.]
잠시 망설이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디야?
“집에 가고 있습니다.”
-1등 자신있다고 소리치던 놈은 어디 가고 패배자가 된 소감이나 들어볼까?
“아버지!”
참고 있던 울분이 욱하고 솟구쳐 올라왔다.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
-어디서 소리를 질러. 한심한 놈. [만가복] 이름을 걸고 나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어야지. 당장 잡아놓은 인터뷰가 한 두 개가 아니라고!
김원상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
울분이 섞여 한숨마저 끊겨 나왔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오늘 심사위원단으로 보낸 사람들 누구입니까?”
-무슨 소리야?
“아버지가 하시려던 거 말입니다. 승부 조작.”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못 알아듣겠다. 실력이 모자라 패배한 주제에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
“순순히 말해주면 아버지가 아니죠. 내가 철저하게 알아내겠습니다. 그럼 끊겠습니다.”
-내 말 아직 안 끝났다. 건방진 놈.
김원상은 더는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았다.
“내일 다시 전화하죠. 오늘은 아무하고도 더 통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화 필요 없다. 오전에 회사로 나와.
“며칠 여행 갈 겁니다. 전화하죠.”
-잔소리 말고 내일 회사에서 보는 거로 알고 있겠다.
뚝!
김원상이 뭐라 말을 덧붙일 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머리 식히게 며칠 바다라도 보고 오고 싶었다.
끝없이 넓은 바다를 보며 소리라도 지르고 오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아버지가 결정하면 항상 따라야 했다.
화가 나도 기분 상해도 손에 쥐게 될 것이 엄청나다는 걸 알기에 그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더 반항 못 하고 머릿속에 잠시 가졌던 여행계획을 순식간에 지워버리는 자신이 싫어졌다.
“이런 씨발, 병신같은 놈.”
화가 머리끝까지 나 절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던져 놓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칙 소리와 함께 캔 입구에서 하얀 거품이 살짝 올라왔다.
외투도 벗지 않은 채 벌컥벌컥 한 캔을 다 마셔버렸는데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았다.
코트를 벗어 소파 위에 던져 놓고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크리스털 잔에 얼음을 넣고 장식장에 넣어둔 양주를 꺼내 반쯤 차게 따랐다.
대회 내내 긴장해서인지, 아무것도 먹지 않은 오랜 공복 때문인지 한 모금 만에 머리가 띵하게 느껴졌다.
취하고 싶었다.
취해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잠들고 싶었다.
급하게 잔에 남은 술을 들이켜고 다시 반쯤 채웠다.
술이 담긴 잔만 들고 침실로 향한 김원상은 대충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한강이 보이는 이곳이 너무 좋아 이사한 지 2년이 넘었지만, 오늘따라 한강이 차갑고 외롭게 느껴졌다.
분명 침대에 걸터앉아 양주를 홀짝이고 있었는데, 그대로 잠이 들었었나 보다.
칠흑 같던 한강에 금빛 물결이 일고 있었고, 침대 위 시계는 이미 8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 물을 틀었다.
따뜻한 물이 머리부터 어깨 가슴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계속해서 어제 박정원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매서운 눈빛과 강한 어조는 절대 그냥 넘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아버지를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회사로 향했다.
* * *
핸드폰 벨 소리에 한쪽 눈만 간신히 뜨고는 전화를 받았다.
-토요일 오전인데 뭐하냐? 아직 자고 있었나 보네.“아, 이모부. 어제 늦게 잠들어서요, 이제 막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이제 긴장이 좀 풀려서 그렇지.
“그런가 봐요. 이렇게 늦었는지 모르고 잤네요.”
-30분이면 씻고 나올 수 있지?
“그럼요, 뭐 10분이면 가능하죠. 지금 서울 오시는 거예요?”
-우선 나만 먼저 가고 있다. 그럼 잠 좀 깨고 30분 후에 밑으로 내려와, 연남동에 찜해놓은 식당이 있어서 오늘 보러 가자. 차 대기 불편하니까 30분 넘기지 말고, 알았지?
“아, 잘됐네요. 저도 봐둔 가게가 하나 있어서 이모부께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오늘 볼 수 있게 얘기해 놓을게요.”
인우는 전화를 끊으면서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아빠의 [서풍]이 하나씩 짜 맞춰져 가는 것 같았다.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