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35화 (35/200)

제35화.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신가요?”

대놓고 기분 나쁜 내색을 하는 김원상의 말투에 적잖이 놀란 듯한 박정원이 이에 질세라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방송도 끝나고 업계 선배로 편하게 말하지.”

평상시 농담도 잘하고 매사에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박정원이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늘 종일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갑자기 툭 던지는 반말에다가 웃음기 쏙 빠진 얼굴에서 주는 위압감을 억지로 느끼지 않으려 애를 썼다.

주변을 둘러보며 사람들이 계속 몰려나오자 박정원이 손으로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주차장으로.”

얼떨결에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미 차들이 꽤 빠져나가고 한산한 쪽으로 걸어가던 박정원이 이마에 깊게 주름을 만들었다.

“본인 요리실력이 형편없다고 생각하나?”

이게 무슨 개소리인지….

“그럴 리가요? 그렇다면 이런 큰 대회에 참가하지도 않았겠죠. 그런데, 왜 그런 기분 나쁜 질문을 하십니까? 안 그래도 우승도 놓쳐 기분 엿 같은데 말입니다.”

김원상 또한 방송 내내 자기에게 적대적이었던 박정원의 기분에 맞춰 주고 싶지 않았다.

“우승을 놓쳐? 사람 사서 점수 높게 받으면 우승을 차지할 줄 알았나 보지? 그렇게 본인 요리실력에 자신이 없는 건가 묻고 싶었네.”

“사람을 사요? 누구 말씀이십니까?”

“요리 대신 연기를 하지 그랬나?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잘하는데…. 아주 타고난 배우구만.”

“비꼬지 말고 정확하게 말씀하십시오. 선배로 존중해주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화가 난 김원상의 목소리가 주차장에 웅웅 울렸다.

“목소리 낮춰. 소문나서 좋을 것 없을 텐데...”

“아니요, 난 걸리는 일도 무서운 것도 없습니다.”

박정원 또한 더는 참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치켜떠 김원상을 노려봤다.

“아, 잘나가는 아버지 빽이 있으니 무서울 게 없다는 건가?”

“여기서 우리 아버지 얘기는 왜 나옵니까? 안 그래도 저도 묻고 싶었습니다. 오늘 방송 내내 저에게 적대적이던데 왜 그러셨습니까?”

박정원이 기가 찬다는 듯 짧은소리를 내뱉었다.

“허, 적대적? 그래도 둔한 사람은 아닌가 보군. 내가 일부러 티를 낸 걸 느꼈으면 말이야.”

김원상이 한계가 왔다는 듯이 고개를 삐딱하게 들고는 박정원을 노려봤다.

“그만하시고 이유를 말씀해 주시죠. 조금 전에 말씀하신 게 무슨 얘기인지 전혀 못 알아듣겠다는 말입니다.”

“오늘 방송 시작하기 전에 화장실에서 다 들었어. 네가 우승을 하려고 얼마나 추악한 짓을 벌였는지.”

김원상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박정원의 말에 갑자기 목덜미가 뻐근하게 아파져 왔다.

“추악한 짓이라니요? 무슨 말입니까?”

“계속 모르는 척 할 건가?”

“정말 모르는 얘기입니다. 전부 말씀해 주십시오.”

김원상의 참담해진 얼굴을 본 박정원이 그제야 화를 살짝 누그러트리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흔들리는 동공이 불안을 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를 담고 있었다.

“서인우가 어떤 요리를 선보이든지 무조건 낮은 점수를 주면 되는 거라고, 반대로 자네 점수는 다 만점을 주라고 하는 말 말이야.”

“네? 그게 무슨...”

김원상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힘주어 서 있었다.

아버지, 김형식 작품이겠지.

이번에도 역시 목적을 위해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갑자기 명치가 콕콕 쑤시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주름 잡힌 이마 한가운데에 더 깊은 골이 파였다.

“혹시 오늘 촬영할 때 자격 운운하셨던 그 심사위원입니까? 그래서….”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그자와 또 앞줄에 서로 눈빛을 교환하던 남자. 그렇게 둘이었던 것 같네. 자네도 점수를 기억하겠지만, 또 한 명 의심되기도 해.”

“몇 명일지 모르겠군요.”

“방송을 다시 보면 극명한 점수 차를 보여준 사람들, 그들 아니겠어?”

창피했다.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아버지가 그랬을 거라고 밝히고 싶지도 않았다.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맹세코 저는 아닙니다. 인터뷰하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번 대회 하면서 요리에 다시 빠질 수 있어서 잠시나마 좋았습니다. 그것만 믿어 주십시오.”

김원상의 눈빛이 모든 것을 말해주듯 참담해 보였다.

“그랬다면 미안하네. 상식적으로 자네가 우승을 차지하려 그런 짓을 저지른 게 아니라면 누가 그랬단 말인가?”

“저도 더 알아보겠습니다. 염치없지만, 이번 일은 비밀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괜한 오해 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지. 하지만, 난 백프로 믿지는 못하겠군. 나도 나대로 알아볼 테니 그렇게 알아둬. 그럼.”

다시 한번 김원상의 눈을 들여다본 박정원이 그대로 방향을 돌려 주차해놓은 차를 향해 빠른 걸음을 걸었다.

잠시 멍해진 상태로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던 김원상도 자신의 차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 * *

지하철로 향하는 길에서부터 정신없이 울어대던 인우의 핸드폰이 집에 도착할 때까지 쉬지 않고 문자와 벨소리를 뱉어냈다.

이모와 통화를 마치자마자 이모부가 이제 내 차례라는 듯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

“이모부.”

-우리 고수님. 이제 집에 도착했냐?

“막 내렸어요.”

-이런 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

“내일 대전에 내려갈게요. 엄마도 보고 싶고, 상금 받은 거로 이모네 식구들 맛있는 저녁도 사드리고 싶어요.”

-그 상금으로 가게 열어야지. 내일 엄마 모시고 우리가 올라갈 테니까 늦잠 푹 자고 쉬고 있어.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곤할 텐데 얼른 들어가 쉬어. 우승 진심으로 축하한다. 다음 주에는 형님 보러 가자. 자랑해야지.

이모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네, 이모부. 이제 차도 생겼으니 운전 연습도 다시 해야겠어요.”

-아, 그것도 내가…. 아니다. 운전 가르쳐주면 애인도 갈라선다더라. 정식 연수받자. 내가 알아봐 줄게. 그럼 끊는다.“네. 안녕히 계세요.”

흥분해 떨리는 이모부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져 감사했다.

집에 거의 다 도착했는데 멀리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준형이냐?”

패딩 후드를 뒤집어써서 얼굴이 살짝 가려졌지만, 각진 턱을 다 가리진 못했다.

“야, 인마. 우승 축하한다. 이런 날 그냥 집으로 들어가는 놈이 어딨냐?”

“너 오늘 면접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어제야, 면접 얘기하면 밤새 술 퍼야 하는데, 자신 있냐?”

준형의 얼굴이 이미 반은 얘기해주는 것 같았다.

긴장과 분노, 피곤함이 적당히 섞인 얼굴.

“오늘은 찌개에 소주 마시자. 매콤한 국물이 땅긴다.”

“그래, 전에 갔던 그 집?”

“아니, 저 위에 있던 만두 전골집 가자. 어때?”

“좋아.”

매콤한 만두전골을 떠올리자 급 시장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근처에 다가가자 벌써 진한 국물 냄새가 코에 확 들어왔다.

겨울철 바람에 섞여 들어오는 김치찌개 냄새는 누구라도 참기 힘들 거다.

후다닥 걸음에 속도를 내며 들어가 만두전골과 소주를 시켰다.

잘 익은 김치와 주먹만 한 만두, 거기에 당면과 두부까지 보글보글 맛있게 끓고 있었다.

“에이 못 참겠다. 두부는 생으로도 먹는 거니까.”

준형이 빨간 국물이 살포시 물든 두부를 먹으며 연신 침을 삼켰다.

“내가 오늘은 방송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다는 거 아니냐? 너 언제 그런 신의 기술을 익힌 거냐?”

“신의 기술?”

“난 연두부 반으로 자르라고 해도 못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사람 머리카락처럼 가늘게 만들 수가 있냐고?”

-이것 참, 또 내 얘기군. 한동안 시끄럽겠네.

‘나 친구와 대화 중이야. 빠져줄래?’

-너 그러는 거 아니다. 빨리 마시고 들어가. 나랑 정산할 거 해야지.

‘무슨 소리야?’

-어쭈? 상금 혼자 꿀꺽하시겠다?

“푸흡!”

인우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 갑자기 왜 웃냐? 우승한 거 이제 실감 나는 거야?”

“어? 어. 작년 이맘때는 군대에서 뻉이치고 있었는데, 지금 내가 중화요리 고수가 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대충 둘러대고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준형이 맞는다고 허리를 꺾어가며 웃어댔다.

“내가 복학하자고 그렇게 말했었는데, 내 신세 봐라. 지금은 네가 훨씬 부럽다.”

“마셔.”

전골이 다 끓자 불을 줄이며 소주잔을 부딪쳤다.

긴 공복 후에 마신 소주가 목젖을 넘어가며 식도를 타고 위장을 쓰리쓰리 건드렸다.

바로 한 숟가락 듬뿍 떠서 넘긴 전골 국물이 소주가 지나간 길을 따라 잘 가고 있다는 걸 알리기라도 하는 듯한 자극을 주었다.

“캬, 좋다.”

접시에 담은 만두를 숟가락으로 갈라 후후 불어 입에 넣었다.

꽉 찬 만두에서 나온 육즙이 김치가 들어간 매운 국물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너 오늘 방송 댓글 못 봤지?”

“너는 방송을 보는 거냐? 댓글을 보는 거냐?”

“내가 요즘 네 방송 보면서 댓글 챙겨보고 하느라 바쁘다. 나 이러지 말고 네 매니저 할까?”

“미친놈. 내가 연예인이냐?”

“댓글 보면 그냥 아이돌이야. 이거 봐봐.”

준형이 핸드폰에 찾아놓은 댓글이 달린 화면을 인우에게 펼쳐 보였다.

→인우 오빠 칼질하는 거 본 사람 말 좀 해주세요. 직접 손으로 한 거 맞죠?

→보긴 봤는데, 우리 와이프가 빨리 돌리기 한 줄.

→이제 [서풍]가면 인우님 실물영접 가능각? 꺄르.

→밥 먹으러 가는 사람보다 얼굴 보러 가는 사람이 더 많을듯.

→ 저는 음식만 먹으러 갈 겁니다. 저런 멋진 요리 죽기 전에 먹어보고 싶은데, 얼굴 보면 떨려서 소화 안 될 듯. 참고로 나 남자.

→원래 [서풍]자리 가면 만날 수 있는 거임?

→그러지 않을까요? 우리 동네인데...제발 그랬으면.

인우는 몇 개 읽고는 다시 소주잔을 기울였다.

“나도 궁금하긴 하다. 가게는 정말 열거지?”

“그럼, 그러려고 시작한 건데.”

“아버지가 하셨던 그 자리에서?”

“거긴 나중에.”

“무슨 소리야?”

“아빠가 처음 시작하신 곳이 있어. 난 거기서 시작할 거다.”

준형이 입에 넣은 만두를 급하게 씹어 삼키고는 물었다.

“거기가 어딘데?”

“나중에 시작하면 보여줄게. 아직은 비밀이야.”

준형이 입천장까지 데어가며 뜨거운 만두를 삼키고 한 질문에 비밀이라는 답이 나오자 허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에이 시시해. 좋아, 기대하고 있겠어. 마시자.”

술잔을 연신 부딪치며 푸짐했던 만두전골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너 면접 본 얘기 좀 해봐. 준비 많이 했잖아?”

소주잔 가득 술을 따라 단숨에 마셔버린 준형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면접 때 영어로 질문할 수도 있다고 해서 나 영어 학원 정말 열심히 다닌 거 알지?”

“그럼. 너 토익 공부도 열심히 했잖아?”

“그런데 내 옆에 앉은 놈이 까만 눈 원어민이더라.”

“요즘 영어 잘하는 사람이야 워낙 많으니까.”“그렇지, 그런데 왜 하필 내 옆자리에서 본토 발음으로 떠들어대고 지랄이냐고? 그놈하고 나서 나 한마디도 못 했다. 쪽팔려서.”

인우는 뭐라 해줄 말을 찾지 못했다.

한참 얘기를 들어주기만 하다 한마디 건넸다.

“원샷!”

“에이 씨. 마셔.”

술잔을 쨍 부딪치고는 입에 털어버리고 다시 국물 한 모금.

그렇게 소주 두 병을 마시고 나니 소주인지 전골 국물인지 그 맛이 그 맛인 듯 섞여 버린 것 같았다.

술이 올라오는지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딱 한 병만 더’를 계속 외쳐대는 준형을 위해 북어포에 소주 한 병을 더 시켜 먹었다.

“그럼 넌 언제부터 가게 시작할 건데? [서풍]?”

“다음 주부터 바로 준비해야지. 운전 연수도 받아야 하고.”

“차 생겼다 이거지? 여자애들만 태워주지 말고 나도 가끔 드라이브시켜줘라.”

“그러자. 나 맨날 새벽에 수산시장 가야 하니까 그때마다 태워줄게.”

“그냥 안 들은 걸로 할게.”

잘 구워진 북어포를 고추 마요네즈 소스에 푹 찍어 입에 넣으며 우걱우걱 씹고 있던 준형이 다시 가득 채워진 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었다.

“인우야.”

“왜?”

“나도 [서풍]에나 취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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