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중식도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순간 멈춰버린 인우는 그대로 얼음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사부, 그게 무슨 말이야? 자세히 얘기해봐.”
중식도를 쳐다보는 인우의 눈빛에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섞여 일렁이고 있었다.
-서동수 사고가 있기 정확히 일주일 전이었어. 안주도 없이 소주를 꺼내 주방에서 혼자 마시고 있더라.
“혼자서?”
-너는 모르겠지만, [서풍] 주방 두 번째 냉장고 안쪽에 항상 소주를 넣어놨었다. 피곤할 때 한 잔씩 하고 들어갔어.
전혀 몰랐다.
대학 입학하고 아빠와 같이 축하주를 마신 이후로 둘이 술을 마신 기억이 많지 않았다.
신입생이라는 기분에 들떠서 친구들과 늦게까지 마시고 아빠가 끓여주는 짬뽕 국물에 해장만 했었는데….
앞으로 기회가 많을 거라는 착각 속에서 그 값진 추억을 많이 만들지 못했다.
“그런데, 사부. 아빠가 왜 갑자기 나를 부탁했던 거지?”
중식도의 대답이 바로 들리지 않았다.
이럴 때는 표정을 볼 수 있으면 정말 좋으련만….
-그건... 그건 아직 말할 수 없어. 궁금해도 이해해줘라. 때가 되면 다 알려줄 테니까.
“뭔데? 아빠 죽음에 내가 알아야 하는 뭔가 있는 거야?”
-나도 거기까지는 모른다. 어쨌든 서동수가 너를 부탁했었고, 다행히 네가 나를 발견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인우는 짐 정리하며 우연히 아빠의 중식도를 발견했던 그 날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중식도의 말을 들으며 다시 한번 그날에 감사했다.
-앞으로 네 아빠가 이룬 성과, 아니 그 이상으로 할 수 있게 내가 도와줄 테니, 지금처럼 너는 성실하게 요리에 진심이기만 하면 된다고…. 오늘 왠지 그 말이 하고 싶었다.
“그래. 내가 표현을 못 했는데…. 사부를 만나서 너무 다행이고 고마워. 사부를 만나게 해준 아빠한테도 고맙고.”
-이런 얘기 길게 가면 쑥스러워지는 거 알지? 시장 간다며? 얼른 다녀와!
“알았어. 빨리 갔다 올게.”
패딩을 걸쳐 입고 자주 가는 동네 시장으로 향했다.
가는 걸음 내내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분명 중식도는 뭔가 알고 있는 듯했다.
때가 되면 알려준다는 말이 더욱 궁금증을 유발했다.
‘그래, 사부를 믿고 기다려보자. 뭐든 때가 되면 속 시원히 말해주겠지.’
긴 복도처럼 되어있는 시장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참기름 냄새가 쓱 지나가고 나니 어디선가 기름이 섞인 고기와 표고버섯 향이 식욕을 자극했다.
‘이건 동그랑땡 냄새고, 또 요건…. 표고버섯 전인가?’
역시 시장 안으로 더 들어가 있는 반찬가게에서 저녁 장을 보러 오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전을 부치고 있었다.
그 냄새에 이끌려 모둠전을 한 팩 사고 다시 더 안으로 들어갔다.
시장 끝쯤으로 다가가자 익숙한 비린 냄새가 훅 들어왔다.
전복, 가리비 등등 싱싱한 해물을 사고, 요리에 필요한 채소를 몇 가지 더 산 후 집으로 돌아왔다.
따뜻한 동그랑땡을 꺼내 입에 쏙 집어넣었다.
이런 배신감이….
고소한 냄새와는 달리 느끼하고 간도 맞지 않았다.
다시 랩을 씌워 식탁 한쪽에 던져 놓았다.
-왜 맛이 별로냐?
“고소한 냄새에 끌려서 사봤는데, 맛없네. 고기 잡내도 많이 나고, 퍽퍽하고….”
인우가 갑자기 하던 말을 뚝 멈췄다.
-이제 알겠지? 네가 사 온 그 음식도 누군가는 맛있다고 매일 사다 먹을 수도 있어. 그만큼 맛이라는 건 참 주관적인 거지.
“그러네. 나도 여러 명이 서서 사 가는 거 보고 호기심에 산 거였는데, 내 입맛이 다른 건가?”
-뭐, 그렇다기보다는 넌 원래도 뛰어난 감각이었는데 이 사부의 완벽한 레시피 덕분에 입맛이 더 정확해졌다고 봐야지.
“기승전 사부 자랑이네?”
-고건 뭔 말이냐? 기승전 뭐시기?
“아빠가 이런 말은 안 쓰지? 처음부터 끝까지 사부 자랑이라고.”
-이런 건 적어놔야 하는데...
인우는 대답 대신 피식 웃어 보이고는 바로 해물을 손질했다.
내장을 빼내고 씻을 건 빡빡 씻어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가리비만 그대로 조리대 위에 올려놓았다.
-오늘 저녁엔 가리비 요리하려고?
“응, 아빠가 해줬던 가리비 마늘찜 연습도 하고 저녁으로 먹으려고.”
먼저 실당면(粉絲)을 물에 담가 놓은 후, 손바닥만 한 가리비 겉면을 깨끗이 씻었다.
중식도의 현란한 칼솜씨로 다진 마늘을 넉넉한 기름에 볶아 향을 내준 후 간장과 청주, 굴 소스 등을 섞어 양념장을 만들었다.
찜기에 가리비를 가지런히 놓고, 그 위에 실당면과 마늘 간장을 올려준 후 불을 켜고 맛있게 익기를 기다렸다.
간단하면서 맛있는 요리지만, 마늘 간장의 양에 따라 너무 맵거나 짜지기 쉬웠다.
마지막으로 다 쪄진 가리비에 튀긴 마늘 후레이크를 올려 맛을 봤다.
입가에 기름기가 한 겹 올라오면서 짭조름하고 통통한 가리비살이 일품이었다.
완벽한 배합의 마늘 소스로 비린 맛은 전혀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인지, 중식도에게 아빠 얘기를 들어서인지 행복한 저녁이었다.
* * *
광고 촬영하는 내내 억지웃음을 보이느라 진이 빠진 김원상은 밤새워 뒤척이다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버지 김형식과 본격적인 요리 수업을 시작하면서 불면증에 시달렸다.
마포점을 맡으며 독립해 살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는데…. 최근 들어 다시 약을 먹어야 잠이 들 수 있었다.
억지로 뜬 눈이 시큰거렸다.
반쯤 감은 눈으로 주방으로 가 물을 따라 마셨다.
“회장님 요리 실력이 이 정도일 줄 몰랐습니다. 김원상 셰프가 그 피를 물려받은 거네요?”
촬영감독이 별 거 하지도 않았는데, 호들갑을 떨며 지껄여대는 말에 세상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인 아버지 김형식의 얼굴이 떠올라 고개를 마구 흔들어댔다.
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식탁 위에 전날 밤에 마신 와인잔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더 속이 쓰린 것처럼 느껴진 김원상은 작은 냄비를 꺼내 마트에서 산 누룽지를 넣어 끓였다.
구수한 냄새가 주방에 가득했다.
간단히 늦은 아침을 먹고는 바로 커다란 볼에 밀가루를 부었다.
그에게 준준결승 우승을 안겨준 면 반죽을 다시 만들어 시원한 사천탕면을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둥그렇게 만들어 놓은 면 반죽이 숙성될 동안 배추와 양파, 죽순, 버섯, 청경채 등 채소를 비롯해 오징어와 새우, 소라를 손질해 준비했다.
웍에 거의 안 보이게 살짝 기름을 넣고 채 썬 마늘, 파, 청양고추를 넣어 센불에 볶아주었다.
그리고는 청주와 간장, 굴소스를 조금 넣고 바로 썰어놓은 채소들을 넣어 다시 볶았다.
마지막으로 각종 해물들을 넣어 센불에 샤라락 볶아낸 후 소금으로 부족한 간을 했다.
청양고추에서 올라오는 매콤한 향이 벌써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면을 만들어 삶아 그릇에 담고 그 위에 뽀얗게 잘 우러난 탕을 올렸다.
식탁에 앉아 제일 먼저 국물을 맛봤다.
매운맛이 목젖을 '탁' 치면서 개운하게 속을 쓸어 내려갔다.
‘해장으로 일품인데…. 이건 [만가복]레시피고, 어디 [서풍]의 면하고 같이 먹어볼까?’
젓가락으로 면을 휘휘 저은 후 잔뜩 집어 한 젓가락 입에 넣었다.
탱탱하지만 질기지 않고 부드러운 면이 시원한 육수에 촉촉이 젖어 입안에서 맴돌다 바로 샤르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부드러운 식감은 말할 것도 없고, 시원한 국물이 말 그대로 끝내줬다.
자신이 한 요리지만 누구든 불러서 자랑하고 싶었다.
그릇에 남은 요리를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는 다시 볼에 밀가루를 부었다.
식탁 위에 놓인 태블릿으로 지난번 서인우가 면 반죽을 했던 장면을 고정해놓았다.
경연대회 이후 계속 방송을 보고 반죽을 연습했다.
부드러우면서 탱탱하고 시간이 지나도 빨리 불지 않는 면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똑같은 반죽에 만들어 놓은 연근 가루도 넣었다.
방송으로 정확히 몇 그램인지 까지는 알 수 없지만, 최대한 비슷한 양을 만들어 반죽했다.
면을 만들어 길게 늘어뜨려 보았다.
역시 조금 전 만든 면보다 훨씬 더 길게 늘어나며 한참 끊어지지 않았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김원상은 결승전에 어떤 주제가 나올지 알 수 없지만, 지금 만들어 놓은 반죽으로 할 수 있는 요리를 연습해야겠다 맘먹었다.
다시 반죽이 숙성되는 동안 여러 가지 만두소를 만들었다.
이 반죽으로 만두를 만들면 더 부드러우면서 찰진 식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다진 고기와 부추, 당면, 다진 새우를 넣은 만두소를 밀대로 밀어놓은 피에 올려 순식간에 만두를 만들었다.
김이 오르기 시작한 찜기에 방금 만든 만두를 넣어 찌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맛있는 냄새가 찜기 밖으로 밀고 나왔다.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질 만큼.
드디어 가스 불을 끄고 만두를 하나 꺼내 접시 위에 올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피는 속이 투명하게 비칠 정도로 얇았지만, 탱글탱글 탄력 있고 부드럽게 보였다.
한 입 크게 베어 물자 육즙이 접시로 뚝 뚝 떨어졌다.
[만가복] 만두보다 훨씬 식감이 부드럽고 탱글탱글했다.
‘서인우, 그놈은 이 레시피를 자기 아빠한테 배운 걸까?’
너무나 완벽한 식감이 느껴지자 이번엔 짜증이 확 밀려왔다.
지난번 준결승에서 완벽하게 조화로운 맛이라는 평가를 받아낸 어린놈.
그 서인우의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 만들어 보고 있는 자신에게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빌어먹을….
입속엔 아직 방금 먹은 만두의 식감이 남아있었다.
여전히 탱글탱글한 그 만두피의 느낌이.
그를 이기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서인우가 들었던 그런 찬사를 받아내고 싶었다.
이미 해가 져서 어두워지기 시작한 주방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던 김원상이 전등 스위치를 눌러 환하게 주위를 밝혔다.
* * *
결승전을 하루 앞둔 오후 인우는 냉장고에 준비해 둔 각종 해물을 모두 꺼냈다.
전복, 새우, 관자, 해삼, 오징어 등 정말 푸짐하게 준비했다.
-전가복(全家福) 만들려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연습해 보려고. 결승전 끝나면 엄마와 이모네 식구들한테 만들어 줄 거야.”
-모든 식구 복 받으란 얘기군. 어차피 나를 만나서 이미 복은 넘치게 받았을 텐데?
“이럴 때 뭐라고 한다 했지?”
-뭐? 아, 기승전 내 자랑이라고?
“습득이 빠르군.”
-이거 어째 사부와 제자가 바뀐 듯한 멘트인데...
“됐고, 전복부터 손질하자고.”
인우가 전복을 도마 위에 올리자 중식도가 편으로 착착 전복을 썰어 가지런히 펼쳐 놓았다.
새우와 오징어, 관자 등도 똑같이 썰어두고, 다음으로 송이버섯, 청홍피망, 각종 버섯을 썰어 준비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빨리 익는 재료와 조금 오래 익는 재료를 구분해서 요리해야 최상의 맛이 나와. 기억하지?
“그럼, 정확히 기억해.”
인우는 팔팔 끓는 물에 재료들을 먼저 재빨리 데친 후에 파, 마늘, 생강과 간장을 넣고 익는 순서대로 재료를 구분해 볶았다.
굴 소스와 후추, 간장을 넣어 간을 했다.
그리고는 다른 웍에 파와 생강을 볶다가 육수를 넣고 전분을 넣어 소스를 만들었다.
잘 볶아진 재료를 접시에 담은 후 소스를 얹어 요리를 완성했다.
마지막에 올라오는 참기름 향이 고소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제대로 된 것 같은데? 먹어봐!
“안 먹어도 알 것 같아. 여러 번 연습했지만, 이번이 [서풍]의 전가복하고 가장 비슷하게 만들어졌어.”
-그렇게 열심히 연습하더니, 이제 완전히 손에 익었구나. 대견하군.
“다 사부 덕분이지.”
-방금 나한테 한 말이었어. 대견하다는 말. 너를 이렇게 성장시키다니 나라는 존재는 정말...
인우는 전복을 하나 집어 입에 넣다가 풉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중식도의 일관된 자기 자랑이 이제 인우도 익숙해진 것 같았다.
역시 전가복은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어야 하는 모양과 맛이다.
싱싱한 해물과 채소, 소스의 맛이 혼연일체 되어 그야말로 완벽한 맛이었다.
과연 어떤 주제를 놓고 마지막 결승전을 치르게 될지 차오르는 자신감만큼 궁금함이 치고 올라왔다.
내일 있을 결승전을 준비하는 인우의 주방은 오늘도 불이 꺼질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