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29화 (29/200)

제29화.

당황한 인우가 잠시 멈칫했다.

“혹시 네 칼로 요리하면 다를까 해서 말이다. 같은 재료로 몇 년을 연습해도 난 절대 이 모양과 맛이 나오지 않아서...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인우는 대답 대신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별소리를 다 한다 싶지? 실력 없는 목수가 연장 탓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 아니에요. 한 번 해보세요.”

최영만은 아니라고 손을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계속해서 중식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인우가 도마 위에 중식도를 가지런히 놓아 주었다.

최영만이 멋쩍은 표정으로 중식도를 잡았다.

중식도는 주방 한쪽에 정리된 다른 것들처럼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옆에 씻어 놓은 오이를 몇 번 연달아 잘라 보던 최영만이 갑자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 아저씨가 주책이다. 혹시 너랑 같은 칼이라도 쓰면 같은 모양, 같은 맛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벌써 노망이 났나?”

“아저씨는 무슨 그런 소리를 하세요? 저도 수없이 연습했지만, 이렇게 아빠의 요리를 그대로 재현해낼 수 있을지는 몰랐어요.”

“정말 대견하다. 기특해.”

최영만이 아쉬움을 삼키듯 물을 따라 마시고는 손을 씻었다.

“접시 가지고 홀로 나가자. 이 멋진 요리랑 맥주 한잔해야지?”

“네, 아저씨.”

이미 어두워진 홀에 불을 켜고 테이블 위에 양장피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최영만이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를 꺼내 유리잔 두 개와 함께 가지고 와 앉았다.

“내가 한 잔 따라줄 테니 시원하게 마셔. 다시 한번 결승전에 나가게 된 거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하얀 거품과 함께 잔에 가득 담긴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조금 전 최영만이 중식도를 얘기했을 때 놀란 가슴이 이제야 진정이 됐다.

다른 사람 손에는 처음 잡게 한 중식도였다.

어떤 반응이 나올지 인우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 옷 속으로 식은땀이 흘렀었다.

“전에 네 아빠가 [서풍]을 운영할 때 나랑 다른 친구랑 매일같이 찾아가서 요리 비결을 좀 알려달라고 떼를 썼었다.”

“다른 친구요?”

“응, 너는 잘 모르...아니다. 너도 알겠구나. 너랑 같이 방송에 나오는 김원상, 그 애 아빠 김형식 말이다.”

“아, 저도 이번에 경연대회 같이하면서 알았어요. 그분이 [만가복] 회장님이시라고...”

최영만이 맥주잔을 들어 바닥이 보이게 다 들이켰다.

“규모는 [서풍]보다 훨씬 컸지만, 항상 네 아빠 요리 솜씨를 이기지 못했지. 지금은 전국에서 제일 알아주는 중화요리 전문점이 됐지만 말이다.”

인우는 예전부터 아빠의 고향 친구인 최영만, 김형식이 그 많은 업종 중에 어떻게 같은 일을 하게 됐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지금 그 궁금증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 세 분이 고향 친구인데, 어떻게 다 중화요리를 하게 되신 거예요?”

“아, 그거? 얘기가 길다. 대회 끝나고 다음에 한가할 때 한 번 놀러 와. 우리 세 친구 얘기 들려줄 테니. 그나저나 결승전에서는 뭘 만들라고 할까?”

“모르겠어요. 항상 전혀 힌트도 주지 않으니까요.”

“김형식 그 친구도 속이 바짝 타들어 가겠구먼. 뭐든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데….”

인우는 아빠와 가장 친한 친구지만 김형식은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와 비슷하게 여겨지는 최영만과는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김형식과 김원상에 대해 궁금증이 점점 더해졌다.

* * *

결승전에 어떤 주제가 나올지 몰라 이것저것 연습을 한참 하고 있던 김원상은 핸드폰이 울리자 짜증이 올라왔다.

“바쁜데 누구야?”

액정에 보이는 김형식이라는 이름에 그 짜증이 두 배가 되었다.

“네, 아버지.”

-내일 오전에 회사로 나와.

“결승전 준비해야 해서 시간 없어요.”

-네 놈이 뭔 준비를 해? 광고 촬영해야 하니까 깔끔하게 하고 나와라. 셰프복 챙겨오고.

“광고 촬영 이미 했잖아요? 이렇게 일방적으로 통보하면 어떻게 합니까?”

-건방진 놈. 네가 누구 덕에 광고 촬영도 하고 유명해졌는데? 잔소리 말고 내일 나와!

1초의 여유도 없이 통화는 끊겼다.

항상 그랬듯이 용건을 전했으니 둘 사이 더 필요한 대화는 없다는 거겠지.

한참 요리 연습에 빠져들었었는데 김이 팍 새버렸다.

중국식 생선찜을 하려고 손질하던 생선을 개수대에 힘껏 던져 버렸다.

스테인리스 개수대에 세게 맞고 튕긴 생선에서 배가 터져 내장이 튀어나왔다.

비린내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물을 틀어 손을 비누로 씻었다.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비누칠했지만, 냄새가 없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손에서 나는 냄새인지, 속에서 나는 냄새인지 알 수 없는 비린내에 연신 헛구역질이 나왔다.

이런 제길!

그대로 욕실로 들어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샴푸도 목욕 비누도 평상시의 두 배로 짜서 온몸을 씻어냈다.

흰 가운에 머리만 대충 말린 채 이불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다 억지로 억지로 눈을 붙였다.

다음 날 아침 도우미 아주머니가 도착하기 전에 서둘러 집을 나온 김원상은 자주 가는 콩나물국밥집에 차를 세웠다.

회사에 가기 전에 속이나 풀고 가려고 들어간 국밥집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얼른 음식이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가게 입구로 들어오는 어린 남자아이와 아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목욕을 다녀왔는지 유난히 윤기 나는 불그스름한 볼에 속옷이 들어 있을 법한 수영가방 같은 게 하나 보였다.

조용히 국밥을 먹고 있던 김원상이 자기도 모르게 멍하니 그들을 쳐다봤다.

아들의 국밥에 새우젓과 날달걀을 깨서 넣어주는 아빠의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어린 아들은 새우젓은 싫다고 조금만 넣어달라고 투정을 부렸다.

그리고는 둘 다 맛있게 국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게 전부였다.

특별한 것도 없었다.

그 특별한 것도 없는 장면이 밥을 먹고 있는 김원상의 식도를 꽉 틀어막았다.

더는 음식을 넘기기 힘들었다.

절반도 넘게 국밥을 남기고 다시 차를 몰고 회사로 향했다.

회장실에 도착하자 비서가 일어나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나 왔다고 보고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비서가 들어가도 좋다고 말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아버지 김형식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서류를 보고 있었다.

“저 왔습니다. 촬영하러 바로 가시죠?”

“앉아서 기다려. 차 팀장이 올라 올 거다. 아랫사람이 와서 모시고 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체신 떨어지게 먼저 움직이지 말고.”

아랫사람?

김원상이 올해로 스물아홉, 차성철 팀장은 그보다 세 살 위다.

회장 아들이라 나이와 상관없이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다 아랫사람인 거다.

그런 아버지의 계산법에 웃음이 나왔다.

회사의 모든 사람을 종 부리듯 취급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자.

다시 요리에 빠져들면서 그런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걸 잠시 잊었었다.

유난히 큰 회장실에 멀찍이 앉아 핸드폰만 보고 있던 김원상의 귀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회장님, 촬영 준비가 다 됐습니다. 점장님 오셨습니까?”

“네, 안녕하세요.”

김형식의 날카로운 눈이 차성철과 김원상을 번갈아 쳐다봤다.

“한 번에 갈 수 있게 철저히 준비됐겠지?”

“물론입니다.”

“원상아, 가자꾸나.”

갑자기 돌변한 말투에 어젯밤 간신히 가라앉힌 구역질이 다시 올라올 것 같았다.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따라 회장실을 나섰다.

5층 메뉴 연구팀 주방에 촬영을 위한 조명과 음식 재료들까지 전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김형식과 김원상이 각자 셰프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됐다.

김형식이 다정하게 김원상이 만든 요리를 맛본 후 웍을 잡고 요리를 하는 장면을 찍으면 되는 것이었다.

둘 다 요리를 하는 사람이라 어려울 건 없었다.

문제는 ‘다정하게’라는 조건이었다.

촬영감독의 지시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김원상과 달리 김형식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아들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올렸다.

김형식은 촬영 내내 어깨를 어루만지고, 등을 토닥이기도 하면서 세상 그 누구보다 더 다정다감한 아버지를 연출해 보였다.

감독이 촬영한 장면을 체크하는 동안 계속 어색한 표정을 풀지 못하는 김원상에게 바짝 다가온 김형식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시키는 대로 제대로 해. 내 자리가 탐나면 말이야.”

김원상은 등줄기에 흐르는 땀에 옷이 젖을까 하는 걱정으로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 * *

[양자강]에서 돌아온 인우는 가방에서 중식도를 꺼내 주방에 올려놓았다.

“사부!”

-왜? 뭐가 궁금한데?

“아저씨가 잡았을 때는 일부러 가만히 있었던 거야?”

-일부러? 그건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거야.

“누가 잡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얘기야?”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나 이래 봬도 지조 있는 남자야.

인우는 생각할수록 중식도의 존재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궁금한 게 너무 많아 이것저것 물으려고 하는 인우 앞에 중식도가 빙그르르 돌다 멈췄다.

-결승전 준비해야지.

“어? 그래야지.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마영준 심사위원한테 10점 받아내야지.”

-지난번 알려준 필살기 다시 연습해봐. 가늘게 채를 썬 연두부가 머리카락처럼 확 풀려야 해. 덩어리지거나 끊어지면 안 된다고.

“알았어. 다시 해볼게.”

인우는 냉장고에 넣어둔 재료들을 꺼내 손질했다.

중식도가 알려준 필살기는 말 그대로 중식도와 인우의 합작품이었다.

중식도가 아무리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가늘게 채를 썰어도 인우가 끓이는 과정에서 불의 세기나 연두부를 풀어낼 때 조금의 실수라도 있으면 실패였다.

온종일 연습하고,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중식도의 필살기만 연습했다.

“사부, 다른 요리도 연습해야 하지 않을까? 결승전 주제가 뭐가 될지 모르는데 이것만 연습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

-결승전 주제는 뻔한 거 아니냐?

중식도가 헛기침을 하고는 전민규의 말투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드디어 결승전이 시작됐는데요, 오늘의 주제는 바로 자신만의 필살기입니다.

인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나 똑같은 성대모사에 진짜 방송을 보는 것 같았다.

“이런 연습은 또 언제 한 거야? 도대체 사부의 매력은 어디까지인 거지?”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마. 그러다 다쳐.

여전히 웃으며 인우가 냉장고에 넣어둔 각종 해물과 닭고기, 돼지고기 등을 꺼냈다.

-뭐 하려고?

“이것저것 연습해야지.”

-너 나를 못 믿냐?

인우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고기를 손질했다.

처음 나영희 심사위원에게 지적을 당한 고기 냄새 없애기 위한 밑간 작업에 다른 때보다 더 정성을 다했다.

그리고는 다시 밀폐 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넣고는 각종 해물과 채소를 손질했다.

[서풍]의 인기 메뉴였던 라조기, 팔보채, 전가복 등을 차례대로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해물을 손질하다 보니 부족한 재료가 많았다.

“나 시장에 좀 다녀와야겠어. 재료를 좀 더 준비해서 결승전까지 죽어라 연습해야지. 이제 마지막 한 번 남은 경연 최선을 다할 거야.”

-각오는 좋은데, 내가 가르쳐 준 필살기면 충분하다니까.

“그래도, 연습해서 나쁠 건 없잖아. 안 그래?”

인우가 앞치마를 벗고 막 나가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양자강]에서 일부러 가만히 있었냐고 물었지?

갑자기 차분히 가라앉은 소리로 중식도가 말을 걸었다.

“갑자기 그건 왜?”

-얼마 전에 내가 한 말 기억해? 우리 인연은 우연이 아니라고 했던 말.

인우는 중식도가 했던 말을 정확히 기억했다.

당연히 우스갯소리일 거로 생각했지만.

-네 아빠가 죽기 일주일 전부터 나한테 너를 부탁했어. 만약 네가 나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때는 꼭 너를 도와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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