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28화 (28/200)

제28화.

늦게 먹은 라면이 문제였다.

아니, 춥고 피곤한데 늦은 시간에 맥주까지 배불리 먹은 게 문제였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지 채 1시간도 안 됐는데 잠이 미치게 쏟아졌다.

결국 천근만근이 된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인우는 아침 일찍 잠이 깼다.

소화되지 않은 라면이 뱃속에 남아있는 듯 아직 속이 든든한 것 같았다.

운동복을 갈아입고 한 시간 뛰고 들어와 개운하게 샤워한 후 커피를 내렸다.

땀 흘리고 샤워한 후에 직접 내린 커피는 말 그대로 예술이다.

특히 찬 바람이 불 때는 남은 한 방울이 아쉬울 정도로.

엄마의 취미이며 낙이었던 커피 덕분에 일찍 커피 맛을 알게 된 인우는 아빠가 만들어 준 맛있는 요리에 엄마의 향 좋은 커피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다.

아니, 행복했었다.

지금은 아빠의 음식도 엄마가 내려준 커피도 다 추억이 돼버렸기에….

-빈속에 또 커피냐?

“굿모닝!”

-이 활기찬 모닝 전개는 뭐지?

“인생 뭐 있어? 추운 겨울 따뜻하게 마시는 이 커피가 얼마나 큰 행복을 주는지 모르지?”

-어쭈, 모닝커피도 유전이냐? 서동수도 항상 커피 먼저 마시고 일을 시작했는데...

“유전이라기 보다 가정환경이지.”

-나도 그 얘기 알아.

인우는 중식도가 뭘 말할지 벌써 기대가 됐다.

언젠가부터 중식도를 통해 듣는 아빠의 얘기가 잠시 잠깐의 추억여행이 되어 주었다.

“무슨 얘기?”

-너희 엄마가 처음 커피머신 샀을 때 얘기. 무슨 커피 아카데미인가 다니고 나서 말이야.

“우리 엄마 커피에 정말 진심이었지.”

-새벽 1시에 잠 안 온다고 커피 연습하고 네 아빠한테 테스트하라 하고, 새벽 5시에 일찍 깼다고 커피 연습하고 자다 깬 네 아빠가 또 속쓰림을 참고 마시고.

“그것도 아빠한테 들은 거야?”

-응, 네가 대학생이었으면 같이 당했을 건데, 혼자 당해 억울하다고 투덜거렸었지.

인우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쯤 커피를 배우기 시작한 엄마 이지희는 정말 무섭게 커피에 빠져 지냈었다.

유독 정확하게 맛을 감별해 전문적으로 일해볼 생각도 했었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인우의 타고난 감각도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인 듯했다.

항상 집안에 커피 향이 은은하게 풍겼던 어린 시절.

그때가 그리울수록 더 커피를 찾았던 것 같다.

지금은 커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할 만큼.

냉장고에 넣어둔 식빵을 두 장 구워 간단히 아침을 해결했다.

“사부, 오늘 필살기 보여준다면서?”

-기억하고 있군.

“기억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는데?”

-남아일언 중천금. 오늘 보여주지. 그럼 지금 나가서 내가 말한 재료를 사 오도록.

“알았어. 뭐가 필요하지?”

-연두부, 죽순, 표고버섯, 당근은 있겠지?

“당근.”

-오호, 라임보소. 재료 준비되면 나를 부르도록.

“넵, 사부.”

재료를 사 오는 동안 인우는 중식도가 말한 재료로 뭘 만들지 전혀 예상되지 않았다.

궁금함이 목 끝까지 차올라 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사부, 준비됐습니다.”

-재료만 준비되면 안 되는데?

“뭐? 그럼 뭘 또 준비해야 하지?”

-놀랄 준비.

인우는 피식 웃어 보이고는 재료를 씻어 가지런히 준비해놓았다.

-이 요리의 핵심은 두부에 있다. 이제 네가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요리를 만나게 될 거야.

“빨리 시작해봐. 기다리느라 현기증 난단 말이야.”

-어린애처럼 보채기는. 그럼 한 번 보여줄까? 먼저 가장 쉬운 당근부터.

인우가 도마 위에 당근을 올리고 중식도를 잡자 여느 때처럼 중식도가 재빠르게 움직여 납작하게 편으로 썬 뒤 가늘게 채를 썰었다.

중식도의 실력을 이미 아는 인우에게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었다.

죽순과 표고버섯을 채 썰 때까지는 딱히 필살기라고 부를 만한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연두부를 도마에 올려놓은 순간 인우의 입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물컹거리는 연두부를 종잇장처럼 얇게 썰더니 그걸 다시 보이지도 않게 가늘게 채를 썰었다.

마치 가느다란 실처럼.

언젠가 엄마, 아빠랑 인사동에서 본 타래과처럼 가늘게 썰린 두부가 한데 붙어있었다.

-그저께 만들어 놓은 닭 육수 꺼내서 냄비에 조금 부어. 전분물도 넣고, 간도 하고.

“알았어, 사부.”

-우선 두부를 다른 그릇에 물을 담아 풀어. 제일 중요한 건 지금부터야. 이 야리야리한 두부를 확 저으면 안 되고 이쑤시개 가져와 봐.

“이쑤시개?”

인우는 이쑤시개로 뭘 하려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우선 몇 개를 집었다.

-이쑤시개로 두부를 살짝 풀어주면서 풀어야 두부가 안 깨지고 잘 풀려. 할 수 있겠어?

“조심해서 해볼게.”

중식도가 옆면으로 가는 두부 채를 그릇에 넣자 인우가 이쑤시개로 조심스럽게 채 썬 두부를 풀었다.

그러자 마치 물에 담긴 여자아이 머리카락처럼 가늘게 채썬 연두부가 확 풀어졌다.

놀란 인우의 입에서 그저 탄성만 쏟아져 나왔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입 닫아! 침 떨어진다. 이제 육수에 그릇에 있는 물을 버리고 두부만 잘 넣어 살살 풀어줘. 웍을 흔들어가며 조심조심.

“너무 근사하다. 이런 요리는 정말 처음 봐.”

-나머지 채소들을 넣고 살살 저어줘. 애기 다루듯 살살. 자, 맛을 봐봐. 그리고 그 식감과 맛을 정확히 기억하도록!

인우는 조심스럽게 탕을 휘휘 저어 작은 그릇에 담았다.

입에 넣는 순간 그 부드러움과 담백함은 형언하기 힘들 정도였다.

간신히 닫은 입이 또다시 벌어지고 있었다.

* * *

“결승전 준비는?”

-문자 투표에 투입했던 인원 모두 사이트에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못해도 서너 명은 뽑힐 겁니다. 회장님.

“뒤탈 안 나게 잘 처리하고 있는 거지?”

-물론입니다. 돈이라면 장기라도 팔 사람들입니다. 저만 믿고 맡겨주세요.

“그래, 문제없이 진행해야 할 거야. 자네 딸들이 아빠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알 필요는 없지 않나?”

아주 잠깐 정적이 흘렀다.

-항상 회장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잡음도 생기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하겠습니다.

“그래야지.”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 전원을 끈 김형식은 서랍 안쪽에 그것을 넣어 번호를 눌러 잠갔다.

잠시 뻐근한 목덜미를 가죽 의자에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똑똑.

“들어와.”

비서실 직원이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김형식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회장님, 차성철 팀장과 유현주 대리 도착했습니다.”

“5분 후에 들여보내.”

“네, 알겠습니다.”

잠시 붙였던 눈을 떼고 일어서며 고개를 좌우로 꺾어 경직된 목을 풀었다.

똑똑.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이리로 와서 앉아.”

가운데 놓인 기다란 테이블 위쪽으로 김형식이 앉으며 손짓하자 문 가까운 쪽으로 차성철 팀장과 유현주 대리가 나란히 앉았다.

“오전에 한 회의 내용은 제대로 수정한 건가?”

“네, 회장님.”

차성철 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결승전이 펼쳐질 이번 주 수요일부터 바로 새로 바뀐 광고가 나갈 겁니다. 지난번 찍어놓은 영상을 그대로 이용할 생각이었는데, 두 분이 같이 요리하는 장면을 하나 추가했으면 합니다.”

김형식이 날카로운 눈매로 차성철을 쳐다봤다.

차성철 또한 기죽지 않는 눈빛으로 그에 응대했다.

“촬영은 언제 하면 되는 거지?”

“오늘이나 늦어도 내일 중에는 촬영하셔야 합니다.”

유현주 대리의 설명이 덧붙었다.

“지금 영상으로는 회장님의 요리에 관한 열정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두 분이 요리를 즐겁게,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하시는 모습이 한 장면 추가된다면 완벽한 홍보가 될 것입니다.”

“그래?”

“네, 그렇습니다.”

김형식이 갑자기 유현주를 노려봤다.

당황한 유현주가 김형식의 눈치를 살폈다.

“왜 그러십니까? 회장님?”

“그런 아이디어는 처음부터 내면 문제라도 생기나? 내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어디 건방지게 회장한테 재촬영을 요구해? 제정신이야?”

유현주가 선뜻 답을 못하고 있자, 차성철이 대답했다.

“지난번 촬영분도 홍보에 문제없습니다. 더 나은 아이디어가 있으니 보충하는 거라는 걸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더 나은 아이디어? 나한테 올 때는 항상 완벽한 답을 준비해서 오란 말이야. 알았어? 이런 실수는 이번 한 번뿐이라는 거 명심해.”

차성철이 뭔가 말을 하려 움찔하자 유현주가 서둘러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내일 오전으로 알고 있을 테니까 나가봐.”

회장실 문을 나서자 유현주가 크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회장님 앞에만 가면 왜 이렇게 떨리는지 모르겠어요. 팀장님은 전혀 아니신 것 같은데...”

성큼성큼 걸으며 차성철이 대답했다.

“나는 사람을 보고 일하지 않습니다.”

“네?”

“이 회사의 가능성을 보고 들어왔고, 내가 할 역할만 열심히 하는 겁니다. 회장님한테 잘 보이려거나 칭찬 들으려고 생각하고 일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사실 저희 할아버지도 짜장면집 하시거든요. 할아버지 빽으로 일하고 싶지 않아서 제 능력으로 당당히 들어온 회사입니다.”

“지금 동네 짜장면집하고 여기 [만가복]을 같은 취급 하는 겁니까?”

차성철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지금 웃은 거 맞죠? 팀장님도 웃을 줄 아셨구나.”

“촬영 계획 안 짭니까? 빨리 갑시다.”

“알았어요,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 짜장면 끝내줘요. 무시하지 말라고요.”

유현주는 김형식한테 들은 소리를 금세 잊어버린 듯 얼굴에 웃음이 가득해 종종걸음으로 차성철을 따라갔다.

* * *

주말 내내 중식도가 보여준 필살기를 연습하느라 시간을 내지 못한 서인우는 월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최형만의 [양자강]에 들렀다.

“아저씨, 저 왔어요.”

“그래, 바쁜 일은 끝났고?”

“네, 저도 바빴지만, 주말엔 아저씨도 바쁘실 것 같아서요.”

“하긴 주말이 제일 바쁘긴 하지. 잘했다. 오늘이 쉬는 날이라 요리 연습하기는 더 낫지.”

“네, 아저씨.”

“저, 인우야!”

최형만이 잠시 쭈뼛쭈뼛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왜 그러세요, 아저씨?”

“지난번 그 양장피 말이다. 준준결승전에서 선보였던 거.”

“양장피요?”

“그래, 그거 오늘 내 앞에서 한 번 해봐 줄 수 있겠냐? 내가 직접 먹어도 보고 방송으로도 봤지만 믿기지 않아서 말이다.”

지난번 대회에 나가기 전에 직접 만들어 보였었던 양장피를 왜 또다시 만들어 보라는 것일까?

선뜻 이해하기 힘든 그의 제안에 잠시 주저하고 있는 인우를 곁눈질로 쳐다보던 최형만이 말을 이었다.

“네 아빠가 [서풍]을 그 자리까지 올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게 바로 양장피였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특이한 모양과 색다른 맛이 전국에 있는 미식가들을 모이게 했지.”

“네, 저도 기억해요.”

“사실 그때 나도 그걸 배워서 따라 해보려고 수없이 연습했었다. 하지만, 절대 똑같이 만들 수가 없었어.”

인우는 그걸 가능하게 해준 것이 지금 가방에 있는 중식도라는 얘기는 할 수 없었다.

“저도 영상 보면서 밤낮으로 연습했어요. 아무래도 아빠의 피가 흐르나 봐요. 운이 좋은 거죠.”

“그래, 너무 놀랍고 대견해. 그래서, 네가 요리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다.”

“네, 아저씨. 오늘 천천히 보여드릴게요.”

인우는 최형만을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양장피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중식도를 꺼냈다.

‘아빠의 양장피를 만들어야겠어.’

-들었다. 넌 그냥 하던 대로 해.

‘그래, 잘 부탁해.’

인우는 항상 하던 대로 채소와 해물들을 손질하고 볶았다.

소스까지 정확한 비율로 만들어 보였다.

옆에 서서 바라보는 최형만은 눈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 커져 있었다.

“너 중식도를 다루는 솜씨가 정말 일품이구나. 항상 중식도를 가지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요리하는 자세까지 완전 동수랑 똑같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아버지 아들이니까요.”

“그래도 이건….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구나.”

인우가 강한 화력으로 해물과 채소들을 볶아 접시에 담고 소스를 곁들였다.

“드셔 보세요.”

“어? 그, 그래.”

얼이 빠진 듯한 최형만이 파르르 떨리는 젓가락으로 양장피를 집어 입에 넣었다.

“정말 완벽해. 어떻게….”

“아빠가 만들어 준 것과 똑같나요?”

“정말 믿을 수가 없구나. 그래서 말인데, 혹시….”

최형만이 중식도를 멍하니 쳐다봤다.

“내가 네 중식도로 한 번 만들어 봐도 되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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