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10,7,10,9 총점 36점.
“아, 이게 무슨 일인가요? 김원상 참가자와 서인우 참가자의 심사위원 점수가 동점이 나왔습니다.”
스튜디오를 쾅쾅 울리는 음악 소리와 함께 카메라가 서인우를 찍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저 젊은 놈 지난번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제일 낮은 점수를 줬는데? 저거 분명 뭐 있다.
‘오늘 보여준 실력으로도 저 심사위원한테 만점을 못 받아냈어. 그러면, 내가 여기서 포기할 줄 아나 본데, 어림도 없지.’
-결승전에서 박살 내 버리자. 난 뭐 24시간 내내 준비된 몸이니 너만 실수 없이 잘 해내면 되겠지?
‘누구 제자인데? 걱정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저 사람한테 만점 받아낸다.’
-오늘 아주 맘에 드는군. 기분이다, 내가 결승전 때는 필살기를 보여주지.
‘필살기? 그런 게 있었어?’
-너 밀당 몰라? 한 번에 다 보여주면 매력 떨어지지.
인우는 사부의 필살기가 어떤 걸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하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영준이 새로 합류한 후 김원상에게는 연속해서 최고점을, 서인우 에게는 최저점을 주었다.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돌아가는 판이 어렴풋이 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있던 서인우는 강한 조명이 비추며 동시에 들리는 전민규의 멘트에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 관리를 했다.
“10점 만점을 두 명의 심사위원에게 받았는데요, 누가 심사평을 말씀해 주실 건지...”
“웍을 만진 지 올해로 정확히 38년 됐습니다. 그런 나에게도 완벽한 맛의 밸런스를 선보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서인우 참가자의 깐풍소스는 얄미우리만큼 완벽한 맛이었습니다.”
유경동 심사위원이 꼭 하고 싶었다는 듯이 서둘러 심사평을 말했다.
“정말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싶은데요, 그럼 높은 점수이긴 하지만, 최저점을 준 마영준 심사위원의 평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인우 참가자의 깐풍꽃게는 잘 손질된 꽃게가 주는 풍부한 향이 일품이었습니다. 다만, 너무 뻔한 맛보다는 창의성이 돋보이는 맛을 보여줬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에서 감점이 조금 되었습니다.”
마영준의 평이 끝나기 무섭게 나영희 심사위원이 멘트를 이어갔다.
“사실 맛이라는 건 지극히 개인적이기 때문에 맞고 틀린 건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유명한 맛집이 있듯이 사람들 입맛은 정확하니까요. 다음 주에 더 많은 심사위원의 평가를 받아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민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전방에 놓인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럼 오늘 준결승전의 최종 우승자를 발표하겠습니다. 준결승전 최종 우승을 차지한 사람은 시청자 투표와 심사위원 평가 둘 다 1위를 차지한 김원상 참가자입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화려한 음악과 함께 김원상을 향해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고 주위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서인우 역시 기꺼이 박수를 보냈다.
다음 주 결승전을 향한 각오를 다지며.
“그럼 결승전에 나갈 마지막 한 명을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승한 김원상 참가자와 똑같은 깐풍꽃게를 선보인 서인우 참가자입니다. 축하합니다.”
조금 전까지 김원상을 화려하게 비추던 조명이 서인우에게로 옮겨갔다.
인우 또한 심사위원 총점에서 이미 박지훈과 차이가 크게 났기에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와 달리 박지훈의 얼굴은 칠흑같이 어둡게 변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일찍부터 의대를 목표로 공부만 했을 박지훈의 인생에 있어서 흔하지 않은 탈락의 경험일 것이었다.
“김원상, 서인우 참가자는 다음 주 대망의 결승전에서 한 번 더 겨루게 되었습니다.”
카메라가 둘의 얼굴을 번갈아 비춰주었다.
“2번 박지훈 참가자는 지금까지 정말 멋진 요리를 보여주었는데요, 아쉽게 결승전을 앞두고 탈락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까이 가서 인터뷰하도록 하겠습니다.”
전민규의 발걸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박지훈이 어두운 표정을 감추려 애썼다.
억지로 짓는 미소에 입가가 살짝 경련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박지훈 참가자. 오늘 정말 좋은 아이디어와 함께 멋진 요리를 보여주었는데요, 다른 두 분의 솜씨가 워낙 막강했던 것 같습니다. 한 말씀 해주시죠?”
“인정합니다. 오늘 제가 탈락한 가장 큰 원인은 재료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새로운 요리법을 연구하는 데에만 치우쳐 재료 연구에 소홀했습니다.”
“제가 한마디 더 해도 되겠습니까?”
박정원 심사위원이 불쑥 목소리를 냈다.
“당연합니다. 박지훈 참가자에게 한 말씀 더해주시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박지훈 참가자의 요리에 대한 열정은 나를 비롯한 기성 요리전문가들 모두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그런 점에서 훌륭했습니다. 요리법을 연구할 때 항상 재료의 장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비약적인 발전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박정원이 진심인 듯 크게 손뼉을 쳤다.
인우 역시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지금까지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여러 심사위원과 참가자들을 통해 좀 더 배우고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엄친아 맞네요. 말도 참 잘하죠?”
전민규가 가볍게 웃으며 말하자 너나 할 것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돌아 가던 박지훈이 다시 몸을 돌려 인사를 하고는 스튜디오를 빠져나갔다.
“이제 마지막 대결만 남아있습니다. 지난번 준준결승에 이어서 오늘 준결승전까지 우승을 차지한 김원상 참가자. 그리고 정말 막상막하의 실력을 보여준 서인우 참가자. 과연 대한민국 최고 고수의 자리는 누가 차지하게 될지 궁금합니다.”
카메라가 김원상과 서인우를 번갈아 가며 찍어댔다.
“다음 주에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열 명의 시청자 심사단과 함께하겠습니다. [중화요리 최고의 고수를 찾아서]는 이제 결승전을 향해 달려갑니다. 다음 주에도 많은 시청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전민규의 마지막 멘트가 끝나자 웅장한 음악소리와 함께 화려하게 비추던 조명이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다.
전민규와 심사위원 모두 김원상과 서인우의 곁으로 다가와 축하해 주었다.
기나긴 대결을 하는 동안 한번도 1위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직 결승전이 남아있다.
지난주 시청자 투표와 이번 주 심사위원 평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서인우 씨, 오늘 정말 최고의 요리였습니다. 수고 많았어요.”
박정원 심사위원이 악수를 권하며 특유의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해야 겠습니다.”
“결승전 말입니까?”
“네, 시청자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다음 주까지는 결승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세요. 그리고 이 프로그램 끝나면 지난번 새우면 얘기 좀 다시 해봅시다.”
“알겠습니다. 열심히 준비해서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서인우가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는 모습을 곁눈질로 힐끗힐끗 쳐다보던 김원상은 아무리 귀를 쫑긋해도 그들의 대화가 들리지 않자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둘이 무슨 작당을 하는 거야? 지난번 저놈 레시피로 사업 어쩌구 하더니 결승전 우승하고 뭐 거래 같은 걸 하는 건 아니겠지?’
가자미눈이 된 김원상 앞에 서 있던 나영희 심사위원이 축하 인사를 건넸다.
“지금까지 수고 많았어요. 역시 [만가복] 후계자 자격이 있네요. 결승전에서도 멋진 활약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만가복] 후계자 자리를 확고히 하고자 했던 김원상의 목표를 마치 알고 있다는 듯한 나영희의 말에 은근히 인정받은 느낌이 든 김원상은 기분이 좋았다.
나영희가 서인우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영준 심사위원이 김원상에게로 다가왔다.
“오늘 수고 많았어요. 이제 결승전 한 번만 남았으니까 계속 잘해봐요. 하긴 뭐 다른 사람이 결승전에 우승하게 놔둘 것 같진 않은데...”
서인우를 슬쩍 바라본 후 비릿한 웃음을 보인 마영준이 다시 시선을 돌려 김원상의 눈을 쳐다봤다.
마치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 하는 표정으로.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르는 김원상은 잠시 좋았던 기분이 순간 확 나빠졌다.
‘다른 사람이 우승하게 놔두지 않는다? 누가? 저런 얘기를 왜 나한테 하는 거지? 그것도 심사위원이라는 사람이?’
김원상은 가식적인 미소로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가져온 짐을 챙겨 스튜디오를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계속해서 머릿속에 나영희와 마영준이 해준 말이 맴돌았다.
[만가복] 후계자.
다른 사람이 우승하게 놔두지 않는다?
두 가지를 항상 염두에 두고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아버지 김형식.
한 번도 [만가복]을 물려 주겠다고 말해본 적 없었던 아버지.
지난번 준준결승 우승을 축하받으려 했던 전화에서 오히려 경솔하다는 호된 꾸지람을 쏟아냈던 사람.
욕심 많고 원하는 건 꼭 해내고 마는 아버지 김형식이라면 결승전 우승 외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다.
운전대를 잡은 김원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버지, 결국 나를 못 믿는 겁니까? 내 힘으로 우승은 힘들 거로 생각하는 거냐고요?”
듣는 사람이 없으니 대답도 없었다.
그저 답답함을 아무도 듣지 못할 차 안에서라도 뱉어버리고 싶었다.
한 번만...
단 한 번만 믿어 주길 바랐는데...
결국 이번에도 아버지는 아들을 믿는 대신에 그의 권력과 재력을 믿기로 했나 보다.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액셀만 밟아대던 차가 어느새 [만가복] 마포지점을 향해가고 있었다.
* * *
지하철로 향하는 서인우는 밀려오는 전화와 문자에 일일이 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친구 준형을 비롯해 이모, 이모부 모두 흥분을 가라앉히기 힘든 목소리였다.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 통화음량을 최대한으로 줄여도 밖으로 뻗어 나오는 소리를 막기 힘들 정도였다.
우승은 아니지만, 심사위원들에게는 1위 점수를 받았다는 사실에 인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에 막 들어가자마자 아빠 친구 [양자강] 최영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저씨. 잘 지내셨어요?”
-서스타. 오늘 잘했어. 아직 방송국이냐?
“아니에요. 이제 막 집에 들어왔어요.”
-이제 결승전만 남았구나. 정말 대단하다. 솔직히 내가 권했지만, 네 실력이 이 정도일 줄 몰랐다. 어떻게 네 아빠와 똑같은 요리를 만들어 내는지 그저 신기할 뿐이다.
“열심히 한다고 했더니 다들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아저씨한테 배운 것도 많았고요.”
-내가 뭐 가르쳐 준 게 있다고... 주말에는 가게 나와서 연습해라. 결승전을 위해 후회하지 않게 최대한 준비하자.
“네, 아저씨. 감사합니다. 주말에 들를게요.”
-그래, 피곤하겠다. 그럼 쉬어라.
“네. 안녕히 계세요.”
통화하면서 벗어놓은 패딩을 베란다에 걸어놓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준결승 합격이 주는 기쁨과 결승전만 남았다는 부담감이 섞여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창가로 어렴풋이 보이는 하늘은 별 하나 없이 깜깜했다.
“아빠! 보고 있어? 나 오늘 심사위원 둘한테 만점 받았는데…. 아빠의 레시피로.”
오랜만에 불러보는 아빠라는 단어가 목을 통해 나와 가슴속 어딘가를 꾹 눌렀다.
먹먹함에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인우는 자기도 모르게 스스르 잠이 들었다.
몇 년 만일까?
꿈에서지만 아빠를 만났다.
꿈에서도 아빠는 역시 손에 웍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중식도까지.
[서풍]의 주방에서 인우는 아빠에게 요리를 배우며 정말이지 밝게 웃고 있었다.
요리를 가르쳐주며 중식도를 손에 쥐여주는 순간 아빠의 온기가 느껴졌다.
항상 물을 만져 거칠고 갈라진 손이지만 온기만은 여전했다.
따뜻했다.
몸도 마음도.
너무 행복해 깨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온몸에 한기가 느껴져 잠이 깬 인우는 옷이 그대로 인 걸 확인하고서야 잠시 졸았다는 걸 깨달았다.
한참 그대로 멍하니 있다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욕실로 향했다.
피곤한 몸은 무겁게 쳐졌지만, 아빠를 만나 따뜻해진 가슴속에 다시금 열정이 자리 잡은 것 같았다.
개운하게 피곤을 씻어내고 주방으로 향한 인우는 저녁도 안 먹고 잠들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듯이 심한 허기가 밀려왔다.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잠시 고민하다 작은 냄비에 물을 올렸다.
늦은 시간에 먹는 라면은 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다.
팔팔 끓는 물에 스프를 뜯어 넣자 부르르 벌건 거품과 함께 라면 향이 작은 주방에 가득했다.
허기에 레벨이 있다면 아마 최고레벨에 올라간 듯싶었다.
-라면 먹게?
‘응, 잠시 졸았더니 배고파서.’
-그럼 파하고 계란 두 개 꺼내.
‘아빠가 끓여주던 라면?’
-그래. 내가 또 파의 크기와 달걀 넣는 타이밍, 불 끄는 타이밍을 정확히 알고 있지 않냐? 오늘 수고했으니 아빠가 끓여준다 생각하고 먹으라고.
인우는 마치 조금 전에 꾼 꿈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아빠 얘기를 하는 중식도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왜? 싫어?
‘아니, 방금 잠깐 졸다가 꿈에서 아빠 만났어. 그 꿈에 사부도 보였는데...지금 갑자기 아빠 얘기를 하니까 신기해서.’
-내가 말했지? 우리 인연은 우연이 아니라고.
‘사부, 나한테 와줘서 정말 고마워.’
-꿈에서 아빠가 나한테 잘하라고 협박했어? 갑자기 왜 그래?
‘그냥, 좋아서.’
아빠에 대한 그리움만큼 점점 중식도가 좋아지는 인우는 정말 아빠가 끓여준 것과 똑같은 모양과 맛의 라면을 먹으며 다시 한번 신기해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였다.
중식도가 빙그르르 눈앞에 돌다가 뚝 멈춰 섰다.
-앞으로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해봐. 뭐든 도와줄 테니. 우선 내일 내 필살기를 하나 공개하도록 하지. 기대해도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