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준결승전을 앞둔 스튜디오는 전과는 분위기가 매우 달랐다.
인우는 최만수의 부재가 주는 서운함이라고 생각했지만, 스튜디오에 있는 사람들 모두 똑같이 느끼는 것 같았다.
평상시와 다르게 방송을 책임지고 진행하고 있는 담당 피디 이명훈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있었다.
심사위원들 사이에서도 냉랭한 공기가 느껴졌다.
심각하게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던 이명훈 피디가 방송을 준비하고 있는 심사위원들 곁으로 다가갔다.
“지난번 방송이 나가는 내내, 그리고 방송이 끝나고 오늘 오전까지 우리 사이트가 거의 마비가 될 지경이었습니다.”
심사위원들도 하나같이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시끄러운지, 무슨 내용이 주로 올라왔는지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지요?”
대답 대신 입술을 꾹 다문 유경동 심사위원이 이명훈 피디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우리 심사위원들의 점수를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몇 점을 줬는지, 무엇 때문에 만점을 주고, 반대로 또 무엇 때문에 감점이 됐는지 투명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유경동 심사위원이 말하는 동안 마영준 심사위원이 계속해서 아랫입술 안쪽을 물어뜯고 있었다.
아마도 불안하면 나오는 습관인 듯했다.
“혹시 반대하시는 분 있습니까?”
나영희 심사위원, 박정원 심사위원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사위원이 주는 점수와 평은 그들만의 고유권한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자유롭게 심사할 수 있다는 말이죠.”
유경동 심사위원이 마영준 심사위원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을 더했다.
“맞습니다. 우리의 고유권한이죠. 하지만, 절대 그 권한을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높은 점수를 주거나 낮은 점수를 주는 건 자유이지만, 그 점수의 근거가 반드시 요리 실력과 맛에만 있어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어떤 점수를 줬는지 투명하게 밝히고 그 근거를 시청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주는 점수는 다 이유가 있으니까요.”
여전히 분위기는 썰렁했지만, 심사위원과 인사를 나누며 자리로 돌아가는 이명훈 피디의 얼굴이 조금은 편해진 것 같았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면서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올라간 만큼 정말 엄청난 양의 댓글이 쏟아졌다.
방송 이후 계속되는 불만과 욕설이 섞인 악성댓글 때문에 이명훈 피디뿐 아니라 심사위원들도 곤욕을 치른 모양이었다.
물론 단 한 사람 마영준만 빼고는.
조명과 음향을 마지막으로 체크하고는 이명훈 담당 피디의 싸인과 함께 사회를 맡은 전민규가 무대 앞으로 당당히 걸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중화요리 최고의 고수를 찾아서]의 사회를 맡은 전민규입니다. 드디어 오늘 세 명의 참가자가 경쟁을 벌이는 준결승전이 시작됩니다.”
짧고 경쾌한 음악 소리와 함께 메인 카메라가 전민규에게서 세 명의 참가자에게로 옮겨졌다.
각 참가자 가까이에는 요리가 시작되면 그 장면을 생생하게 담아낼 전담 카메라 감독이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지난 준준결승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 방송에서도 시청자들의 문자 투표를 30퍼센트 반영하여 최종 결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문자를 보낼 전화번호는 지금 무대 위쪽에 보이는 것으로 지난번과 같습니다.”
카메라가 무대 위 전광판에 비치는 전화번호를 크게 찍은 후 다시 전민규에게로 돌아갔다.
“그럼 준결승전에서 멋진 실력을 뽐내줄 세 명의 참가자를 소개하겠습니다. 가,나,다 순으로 제일 먼저 1번 김원상 참가자입니다.”
전민규의 멘트가 나오는 동안 김원상을 전담하는 카메라 감독이 그의 얼굴과 조리대에 붙어있는 번호, 이름을 차례차례 비춰주었다.
김원상 또한 카메라를 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손가락을 하나 높이 치켜들어 1번을 강조했다.
“다음은 2번 박지훈 참가자입니다.”
매번 다른 안경으로 포인트를 주는 박지훈은 오늘도 역시 반무테의 안경을 손가락으로 올리며 인사했다.
그리고는 곧장 손가락을 브이 자로 만들어 자신의 번호인 2번을 나타냈다.
“마지막으로 3번 서인우 참가자입니다.”
서인우 역시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손가락을 세 개 펼쳐 보였다.
열 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동시에 대결을 벌였던 커다란 스튜디오에 단 세 명만이 남아 최후의 1인을 향한 대결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난번 준준결승전에 정말 많은 시청자분이 문자 투표에 참여해주셨는데요. 과연 준결승전은 또 어떤 주제로 대결을 펼치게 될지 궁금합니다. 그럼 바로 오늘의 주제를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전민규가 [중화요리 최고의 고수를 찾아서]가 적혀 있는 검은색 휘장 쪽으로 손끝을 향하자, 하얀색 휘장이 팔락이다 펼쳐졌다.
[게(蟹)]
“네, 오늘 주제는 게 요리라고 되어있는데요, 지금 박정원 심사위원이 재료가 담긴 박스를 무대로 가지고 오고 있습니다.”
박정원 심사위원이 카트를 밀고 무대 중앙으로 나타나자, 전민규가 그곳으로 다가갔다.
“지금 이 안에 오늘의 주제인 게가 들어 있겠군요. 그럼 뚜껑을 열어 세 명의 참가자와 시청자 여러분께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박정원 심사위원이 장난기 섞인 눈빛으로 전민규를 바라봤다.
“너무 싱싱해서 꽃게가 튀어나와 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놀라지 마세요.”
안 그래도 스테인리스 통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전민규가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뚜껑을 열어 확인한 통 안에는 역시 싱싱한 꽃게가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보시는 것처럼 싱싱한 꽃게가 오늘의 대결과제입니다. 세 명의 참가자는 각자 필요한 만큼 꽃게를 자리로 가져가시길 바랍니다.”
각자 꽃게를 가지고 자리로 돌아가자 카트가 치워지는 동안 전민규의 멘트가 이어졌다.
“이 꽃게가 과연 어떤 요리로 탄생하게 될지는 잠시 후에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60분 안에 각자 생각하고 있는 최고의 꽃게 요리를 만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이제 바로 준결승전을 시작합니다.”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스튜디오에 울리는 것도 잠깐 여기저기 쾅쾅 꽃게를 다듬고 손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서인우도 꽃게 등딱지를 벗기고 가자미와 모래주머니 등을 제거한 후 깨끗하게 씻어 작게 조각을 냈다.
-휴, 힘 좀 썼다. 이 요리는 소스에서 승패가 좌우된다는 거 잘 알지?
‘수없이 연습한 레시피니까 걱정하지 마.’
-새콤한 맛, 달콤한 맛, 거기다 매콤한 맛까지 잘 살려야 해. 뭐야? 설마 저기 저놈도 같은 요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중식도의 말을 듣고 슬쩍 보니 김원상 또한 같은 순서로 꽃게를 잘게 자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손질해 놓은 모습만 보고 알 수는 없다.
인우는 신경 쓰지 않고 소스를 만들기 위해 채소를 씻고 손질에 들어갔다.
각각 전담 카메라 감독이 요리하는 과정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분주하게 촬영하고 있었다.
“지금 세 참가자 모두 꽃게 손질을 마쳤습니다. 김원상 참가자와 서인우 참가자는 꽃게를 작게 잘라 놓았고, 박지훈 참가자는 지금 찜기에 손질한 꽃게를 넣고 있습니다.”
전민규가 세 명 참가자의 요리하는 모습을 지나가며 간단히 설명했다.
그의 말대로 박지훈은 등딱지를 제거하고 깨끗이 손질한 꽃게를 찜기에 찌고 있었다.
꽃게가 익고 있는 동안 밀가루 반죽을 조금 만들어 밀대를 이용해 넓적하게 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과연 어떤 요리가 나올지 전혀 상상되지 않는데요, 역시 현란한 중식도 다루는 솜씨를 보여주었던 서인우 참가자가 꽃게를 기름에 튀기고 있습니다. 아! 김원상 참가자 역시 웍에 기름을 붓고 있는데요.”
전민규의 중간 설명을 듣고 있던 김원상이 서인우의 요리를 힐끗 훔쳐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름 온도가 올라가자 김원상도 꽃게를 튀기기 시작했다.
세 명이 나란히 서서 하는 요리 대결.
가운데 박지훈을 사이에 두고 김원상과 서인우가 누가 봐도 똑같은 요리를 하는 듯 보였다.
“아무래도 사전에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고 즉석에서 주제를 정해 하는 대결이다 보니 오늘 두 참가자의 요리가 공교롭게 겹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경동 심사위원님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중국요리 중 꽃게를 튀겨서 하는 요리 종류가 많이 있습니다. 소스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맛과 요리명이 달라집니다.”
“아, 그렇군요. 노릇하게 잘 튀겨진 게 지금 그냥 먹어도 맛있을 것 같습니다. 박지훈 참가자가 찜기의 뚜껑을 열었는데요, 꽃게 향이 스튜디오에 가득합니다.”
찜기에서 잘 쪄진 꽃게를 꺼내 도마 위에 올려놓은 박지훈이 조금 전 밀가루 반죽을 밀었던 밀대를 손에 들고 카메라를 쳐다봤다.
뭔가 자신 있는 퍼포먼스를 할 듯 카메라를 의식적으로 쳐다보며 주의를 집중시켰다.
카메라가 자신을 가까이서 찍기 시작하자 밀대를 이용해 잘 익은 꽃게를 힘주어 밀었다.
그러자 꽉 찬 살이 주르륵 빠져나왔다.
“저런 방법이 있었네요. 꽃게가 맛있는데 살 발라 먹기가 좀 귀찮았는데요. 저렇게 하니까 정말 살만 쏙 빠져서 너무 먹기 편하겠습니다.”
전민규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침을 꼴깍 삼켰다.
“김이 나는 꽃게 살을 보자 나도 모르게 침이 나와 참기 힘든데요, 빨리 먹어보고 싶습니다.”
박지훈 역시 웍에 기름이 끓고 있었다.
“박지훈 참가자도 뭔가를 튀길 것 같은데요. 설마 저 꽃게살을 튀기는 걸까요?”
전민규의 멘트를 들었는지, 요리하던 박지훈이 오른손 검지를 들어 가로로 흔들었다.
노노.
그리고는 바로 밀대로 밀어놓은 밀가루 반죽을 움푹하게 모양을 잡아가며 튀겼다.
주어진 시간이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세 명의 참가자 모두 각자의 요리를 완성하기 위해 마지막 속도를 올렸다.
인우는 달군 웍에 고추기름, 대파, 편으로 썬 마늘, 청홍고추를 넣고 볶아주었다.
매콤한 향이 날 때 맛술을 넣어 웍을 기울이자 불이 확 일었다.
그렇게 불맛을 살려준 후 간장, 식초, 설탕을 넣어 소스를 완성했다.
-완벽하게 만든 것 같은데, 소스 맛은 어때?
‘새콤하고 달콤하고 그러면서 칼칼하게 매콤해. 평상시 연습한 대로 잘 나왔어.’
-누구 제자인데 실수를 하겠나? 자신감을 가져. 그런데, 거기 저놈도 깐풍꽃게 하는 거 맞지? 소스까지 똑같은데?
‘아무래도 이번엔 완전히 똑같은 요리로 심사를 받을 것 같다.’
-채소의 크기, 소스의 양과 꽃게를 볶는 타이밍이 다 달라서 절대 같은 맛은 나올 수 없지. 재미있겠군.
김원상 역시 소스를 만들고 있었다.
인우와 같이 채소를 볶은 후 간장, 설탕, 식초를 넣고 재빨리 볶았다.
누가 봐도 같은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박지훈도 마지막 플레이팅에 열을 올렸다.
발라낸 게살을 간을 하며 볶아주고, 다진 고기를 볶아서 한 데 섞어주었다.
게살과 다진 고기를 노릇하게 튀겨낸 튀김 그릇에 올렸다.
드디어 60분이 다 되어 세 명의 요리가 끝났다.
고소하고 매콤한 향이 스튜디오를 가득 메웠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세 명의 참가자는 요리에서 손을 떼주시길 바랍니다. 지금부터 심사위원단의 시식이 있겠습니다.”
유경동, 나영희, 박정원, 마영준 심사위원이 차례로 다가왔다.
“요리하는 중간에 설마 김원상 참가자와 서인우 참가자가 같은 요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했는데, 이건 완전 똑같은 요리를 만들었네요. 둘 다 너무 먹음직스러워 보이는데 과연 그 맛이 어떨지 궁금합니다.”
나영희 심사위원이 제일 먼저 음식을 개인 접시로 덜어갔다.
김원상의 깐풍꽃게와 서인우의 깐풍꽃게를 하나씩 번갈아 가며 맛을 보던 나영희 심사위원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박지훈의 음식 앞으로 향했다.
유경동과 박정원 심사위원은 제일 먼저 박지훈의 요리를 입에 넣었다.
아무래도 같은 음식을 만든 두 명의 요리에 대한 심사는 그 뒤로 미룬 듯 보였다.
마영준 심사위원은 먼저 김원상의 요리를 먹었다.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곧장 이어서 박지훈의 요리를 먹어보고, 마지막으로 서인우의 요리를 작은 접시에 덜었다.
서인우의 잘 튀겨진 꽃게살을 한 입 베어 문 마영준의 눈 밑이 순간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