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사과?”
‘[만가복]에서도 아빠와 같은 방식으로 면 반죽을 해왔던 것일까?’
인우는 아빠의 친한 친구인 김원상의 아버지 김형식도 면반죽에 사과를 넣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각자 커다란 볼에 밀가루를 넣으며 손반죽을 시작했다.
똑같은 밀가루지만 그 안에 넣는 다른 재료들의 종류와 양에 따라 식감도 맛도 달라진다.
직접 뽑는 면이라, 서로 다른 굵기로 면을 뽑기 때문에 그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네 명의 카메라 감독이 각자 배정된 참가자의 요리 장면을 찍어댔다.
“지금 각 참가자의 면 만드는 장면을 전담 카메라 감독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촬영하고 있습니다. 작은 실수도 방송에 나갈 수 있으니 신중하게 요리해 주시길 바랍니다.”
전민규의 설명을 듣고 있던 참가자들은 시작부터 왜 이렇게 카메라가 자신들을 따라다니며 찍어대고 있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김원상이 사과를 편으로 썰어 물을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최만수는 잡곡으로 보이는 것을 기름 없는 팬에 볶고 있었다.
박지훈은 마치 무슨 실험실처럼 각각의 비커에 여러 가지 가루들의 양을 정확히 재어 소분하고 있었다.
서인우는 팬트리에서 가져온 재료들 맨 밑에 깔려 있던 가지를 꺼내 불에 직화로 구웠다.
똑같은 짜장면을 만들기 위한 면이지만, 준준결승인 만큼 이번에 숨겨놓은 노하우를 대방출하는 것 같았다.
“지금 네 명의 참가자를 각 전담 카메라 감독님이 열심히 찍고 있습니다. 짜장면을 위한 면을 만드는 거 맞는 거죠? 마치 다른 요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전민규가 각각 요리하는 장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민규씨 짜장면 먹으면 집마다 면이 같았나요?”
유경동 심사위원이 웃으며 물었다.
“물론 집집이 소스 맛도 면에서 주는 식감도 다르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소스를 같은 것으로 했을 때는 면에서 주는 식감의 차이가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겁니다. 지금 참가자마다 각자 해왔던 비법대로 면을 만들고 있는 겁니다. 한번 설명을 들어보도록 하죠.”
유경동의 말을 바로 이해한 전민규가 열심히 반죽 만들 준비를 하는 참가자들 앞으로 다가왔다.
“1번 박지훈 참가자는 지금 무슨 작업을 하는 건가요?”
“아, 저는 밀가루와 쌀가루를 정확한 비율로 나눠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 부추를 갈아 넣어 건강한 초록색 면을 만들려고 합니다.”
박지훈이 손에 들고 있던 부추를 카메라를 향해 흔들어 보였다.
“초록색 면이 탄생하겠군요. 기대하겠습니다.”
잠시 박지훈의 설명을 듣고 있던 김원상이 자신의 차례가 됐음을 눈치채고 뭔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2번 김원상 참가자는 지금 굉장히 바쁘게 보이는데요, 사과로 뭔가를 하실 생각인가 봅니다. 설명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이 사과를 면 반죽할 때 넣으면 면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 소화를 돕기도 합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비법들이 속속 공개되고 있습니다. 지금 전국의 중화요리 하시는 분들이 열심히 받아적고 계실 것 같은데요.”
전민규가 카메라 감독을 향해 김원상이 준비한 사과가 담겨 푹 익고 있는 냄비를 가까이서 찍도록 손짓했다.
카메라로 팔팔 끓는 사과 물을 자세히 찍은 후 김원상의 모습과 이름, 번호를 동시에 찍었다.
“3번 최만수 참가자는 지금 뭘 볶고 계신 거죠? 고소한 향이 나는데요?”
“이건 귀리입니다. 슈퍼푸드인 귀리를 볶아서 갈아 면 반죽에 섞어 사용하면 건강하고 고소한 면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오랜 연구 끝에 만들어 낸 저만의 비법입니다.”
“아, 건강도 잡고 맛도 잡을 수 있겠네요. 그럼 수고해 주십시오.”
전민규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서인우 앞으로 다가왔다.
“4번 서인우 참가자, 지금 가지를 불에 구웠는데요, 이건 뭐에 쓰는 건가요?”
“구운 가지의 껍질을 벗겨 소주를 조금 넣고 끓여줄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사과를 채를 썰어 같이 넣어 끓여 반죽 물을 만들어 주면 밀가루 냄새도 없애주고 부드러워집니다.”
“아, 정말 신기한 방법이네요. 이렇게 네 명의 참가자가 면을 만드는 모습을 보니 오늘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될지 더 궁금해졌습니다.”
전민규가 멘트를 하며 무대 중앙으로 오는 동안 김원상이 살짝 인상을 쓰며 힐끗 서인우를 바라봤다.
‘분명히 영상에는 사과를 쓰는 것만 보였는데…. 저놈이 개발한 비법인가?’
며칠 전 서동수의 영상을 보고 힌트를 얻은 김원상은 자신의 반죽 비법에 서동수의 비법인 사과를 넣어 면을 만들어 보았다.
전보다 훨씬 부드럽고 향이 좋아지자 사과 물의 농도를 여러 가지로 바꿔보며 수없이 연습했다.
지난번처럼 자신 있는 요리를 만들어 보라고 하면 열심히 연구한 면 반죽으로 시원한 사천탕면을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반죽하면서 계속 서인우의 비법이 신경이 쓰이는 김원상이 고개를 흔들며 다시 자신의 반죽에 온 정성을 쏟았다.
탁! 탁!
어디선가 반죽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최만수가 지난번 예선전 때 보여줬던 능숙한 솜씨로 제일 먼저 수타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를 전담하는 카메라 감독이 가까이에서 넓적한 반죽이 면으로 바뀌는 과정을 자세히 찍고 있었다.
-저 양반 요리에 정말 진심이군.
‘지난번에 들었잖아? 꿈을 좇아 요리하는 지금이 청춘이라고. 저 표정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한테서만 나오는 표정이지.’
-그래, 너도 볼 줄 아는구나. 내 표정이랑 똑같잖아.
‘네 표정? 넙데데한 면이 얼굴인가?’
-뭐? 나 빈정 상하면 지금부터 협조하지 않는 수가 있다. 칼자루를 네가 잡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경기도 오산.
‘아빠한테 아재 개그만 배워서. 대회 마치면 내가 젊은 감각으로 업그레이드시켜주지.’
-너 약속했다. 이거 녹음해놔.
제한된 시간이 거의 끝나가자, 참가자들이 만든 면을 삶아 그릇에 담기 시작했다.
최만수와 서인우는 수타면을, 박지훈과 김원상은 밀대로 밀어 칼로 균일하게 썰어 면을 만들었다.
“자 이제 주어진 시간이 끝났습니다. 네 명의 참가자는 여기 무대 중앙에 준비해놓은 테이블로 면이 담긴 그릇을 가지고 나와 주시길 바랍니다.”
무대에 길게 준비된 테이블 위에 1번부터 4번까지 번호 팻말이 놓여있었다.
각 참가자는 그 번호를 찾아 자신이 만든 면이 담긴 그릇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바로 유경동 심사위원이 직접 자신이 만든 짜장 소스를 얹었다.
“진짜 먹음직스럽습니다. 시청자분들이 지금 이 냄새를 맡을 수 있다면 정말 참기 힘들 것 같은데요. 그럼 바로 심사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명의 심사위원이 1번부터 4번까지 빠른 속도로 조금씩 덜어 짜장면을 맛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면 요리다 보니 순서에 따른 불이익이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나영희 심사위원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1번 박지훈 참가자의 면은 건강해 보이는 초록색이 특징인데요, 부추 향이 살짝 도는 부드러운 면입니다. 초록색 면은 아무래도 호불호가 조금 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박지훈의 안경에 가려진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부추가 밀가루 냄새를 잘 잡아 주었습니다. 건강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좋아하겠어요.”
박정원 심사위원이 박지훈의 짜장면을 짧게 평한 뒤 바로 김원상에게 질문을 던졌다.
“2번 김원상 참가자는 면 반죽에 사과 물을 넣었는데요, 사과가 밀가루 냄새도 없애고 면을 부드럽게 해주었습니다. 자칫하면 사과 향이 날 수도 있었는데, 그 농도는 어떻게 맞춘 건가요?”
“사실 처음 밀가루 냄새를 없애기 위해 연구 끝에 사과를 끓인 물을 넣었을 때는 면에서 사과 향이 많이 느껴졌습니다.”
-너도 기억하지?
‘그럼, 정확히 기억하지. 아빠의 레시피를 알게 되기까지 나도 정말 연구 많이 했지.’
-고수의 비법은 뭐든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고.
인우는 자기와 같은 실수를 범했지만, 멋지게 성공해 보인 김원상을 쳐다보며 역시 [만가복]의 레시피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다.
“밀가루에 사과 끓인 물을 조금 넣고 거기에 콩기름을 한 컵 넣어 반죽한 겁니다. 사과 물과 콩기름이 섞여 밀가루 냄새를 없애주면서 부드러운 면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사과 끓인 물과 콩기름이 아주 적절하게 섞여서 잡내는 없애주고 부드러움만 남은 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영준 셰프가 입가에 맴돌고 있던 미소를 티슈로 닦아냈다.
“3번 최만수 참가자의 면은 다른 면보다 살짝 노란색을 띠고 고소한 풍미를 잘 살렸습니다. 볶은 귀리 가루를 넣으셨죠?”
유경동 심사위원의 질문이었다.
“네, 밀가루 요리는 몸에 좋지 않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없애기 위해 많은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그래서 볶은 귀리 가루와 콩가루를 섞어 면 반죽을 해서 건강하고 고소한 면을 만들었습니다.”
나영희 심사위원이 입가를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소한 맛을 아주 잘 살렸습니다. 수타면이라 그런지 식감도 아주 쫄깃합니다.”
“감사합니다.”
최만수의 얼굴에 기쁜 표정이 조금씩 자리 잡았다.
“4번 서인우 참가자의 면은 밀가루 냄새가 전혀 나지 않고 부드러우면서 쫄깃합니다. 이것도 [서풍]에서 먹어본 면하고 똑같은 식감이네요. 정말 대단합니다.”
박정원 심사위원이 평을 하면서도 연신 입맛을 다셨다.
“네, 평생을 요리 연구만 하셨던 아버지의 레시피 그대로입니다.”
“서인우 참가자는 아버지 서동수 셰프의 레시피를 그대로 연습만 한 것 같군요. 뭔가 변화를 주려 노력을 해야 발전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마영준 셰프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번 대회에서 [서풍]과 똑같은 맛을 낼 수 있다는 인정을 받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요. [서풍]을 다시 일으킬 겁니다. 반드시 이 손으로.”
서인우의 전담 카메라가 인우의 굳게 다문 입술과 얼굴을 가까이서 찍은 후 그가 만든 짜장면을 다시 한번 비췄다.
“네, 정말 우열을 가리기 힘든 대결입니다. 이제 심사가 끝난 건가요?”
전민규가 심사위원들을 바라보며 묻자, 유경동 심사위원이 얼굴에 미소를 가득 지어 보였다.
“지금 심사평을 말하는 동안 대략 15분 정도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 우리 심사위원들이 네 명 참가자의 짜장면을 다시 먹어보겠습니다.”
“네?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처음에 마영준 셰프가 말한 심사기준을 기억하실 겁니다. 첫 번째, 최대한 불지 않는 면. 두 번째, 밀가루 냄새 없애기. 세 번째, 탱탱하지만 질기지 않고 부드럽지만 물컹하지 않을 것.”
전민규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다시 시식해보면 면이 얼마나 불었는지 또는 아직 탱탱한지 알 수 있겠군요. 그럼 시식을 시작해 주시길 바랍니다.”
심사위원들이 네 참가자의 짜장면을 다시 작은 그릇에 덜었다.
이미 한 덩어리가 되어있는 면을 다시 비벼서 최대한 풀어준 후 그대로 카메라에 가까이 비춰주었다.
면의 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약간씩 불고 풀어진 모습이었다.
신중하게 시식을 마친 심사위원들이 모두 티슈로 입을 닦았다.
마영준 셰프가 박지훈 참가자의 면을 한 가닥 들어서 두 손으로 잡아당겼다.
조금 늘어나던 면이 툭 하고 끊어졌다.
박지훈의 표정도 같이 툭 한 대 맞은 것처럼 변했다.
다음으로 김원상 참가자의 면도 같은 방식으로 잡아당겼다.
역시 조금 늘어나다가 툭 끊어졌다.
긴장하고 있던 김원상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짧게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손을 티슈로 닦고는 바로 이어서 최만수의 면을 잡아당기자 늘어날 새도 없이 바로 툭 끊어졌다.
최만수와 서인우의 얼굴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마지막으로 인우의 면을 잡아당긴 순간 마영준 심사위원이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