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나야.”
-네, 회장님.
“내가 한 얘기 이해 못 했나? 오늘 결과가 어떻게 된 거지?”
-아닙니다. 제가 아주 낮은 점수를 줬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심사위원들이 만점을 주는 바람에….
“그런 핑계가 나한테 통할 거로 생각하나?”
-죄송합니다. 다음 주가 마지막입니다. 이제는 서인우 그자를 방송에서 보시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내가 한 번만 더 믿어보지. 다음엔 성공해야 할 거야. 내가 인내심이 그리 큰 사람이 아니라서.”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을 겁니다.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책상 위에 던져 놓은 김형식이 모니터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미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봤던 서동수의 요리하는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시 봐도 똑같단 말이야.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저렇게 완전 똑같이 할 수는 없는데…. 저걸 어떻게 했는지 그것부터 알아봐야겠어.’
김형식은 먹이를 찾는 굶주린 야수처럼 영상을 노려봤다.
“분명 뭔가 있단 말이야….”
영상을 다시 처음으로 돌려 보는 김형식의 입에서 답답함에 한숨 소리가 연신 쏟아져 나왔다.
* * *
방송이 끝나자마자 항상 그랬듯이 인우의 핸드폰이 정신없이 울어댔다.
그중 모르는 번호가 계속해서 울리자, 잠시 망설이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나 이정복이네.
“아! 안녕하세요? 모르는 번호라 바로 받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늘 방송 잘 봤네. 자네가 결국 다른 심사위원들 입에서 [서풍]이라는 이름을 끌어냈구먼. 자네 아버지 서동수의 이름까지.
“아빠의 요리를 기억해주셔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더 감사한 일이고요.”
-직접 맛을 보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방송으로만 봐도 확실히 서동수가 만든 것과 완전히 똑같았네. 내가 너무 놀라서 방송을 보다가 소리까지 질렀지 뭔가.
“아빠의 요리를 똑같이 재현하기 위해 정말 연습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너무 행복했고요. 그리고...”
인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
“피디님께 들었습니다. 당연히 아무 이름도 없는 제가 물러나는 걸로 결정된 일을 반대하시고 직접 물러나신 거라는 사실을요.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난 이미 유명한데, 몰랐나? 더 유명해질 필요가 없다는 말이야. 자네처럼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줘야지. 그럼 다음 주도 시청자로 기대하고 있겠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인우는 이미 꺼진 지 한참 된 핸드폰 액정을 멍하니 쳐다봤다.
악성 루머 때문에 다시는 경연대회에 참가하지 못할 거로 생각했던 인우에게 대회를 이어갈 기회뿐 아니라, 아빠의 이름을 다시 불리게 하는 기회까지 선물 받았다.
이정복 대가의 희생으로 얻은 기회다.
인우는 그 결정이 의미 있게 느껴지도록 최선을 다할 거라 다짐했다.
잠시도 쉬고 있을 여유 따위 없었다.
주방으로 들어가 요리 연습을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또 뭐 하려고? 좀 쉬자.
“그럴 여유 없어. 연습만이 답이다.”
-네 열정은 노답이다. 너 요즘 잠도 안 자고 너무 무리하고 있어.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앉았다고.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좀비인 줄 알고 깜짝깜짝 놀란단 말이야.
“걱정하지 마. 죽지 않을 만큼 자면서 하는 거니까.”
-너 걱정하는 거 아니야. 내가 심장이 좀 약해서 놀라 기절할까 봐 걱정하는 거지.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인 인우가 냉장고를 다시 닫고는 쓰읍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다음 주제는 뭐가 될까?”
-내가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는 있지. 하지만….
“하지만 뭐? 어떤 주제가 나올지 알 것 같아?”
-그동안 짬밥으로 예상을 해볼까? 내 생각에는 말이야.
중식도가 빙그르르 돌더니 다시 멈춰 섰다.
-면 요리, 만두 둘 중 하나다.
“왜지?”
-대충 돌아가는 판을 봤을 때 이제는 좀 더 디테일한 기술을 보려 할 거라고. 이제부터가 정말 진검승부다. 아, 짜릿해.
“면 요리나 만두라면 결국 밀가루를 얼마나 이해했느냐가 관건이겠군.”
-내가 전에 얘기했나?
“뭘?”
-너 보기보다 똑똑하다고.
“나 보기에도 똑똑해보여.”
-그래, 너 잘났다.
“그 말도 전에 했었어.”
인우는 말끝에 웃음소리를 같이 내보이며 큰 볼에 밀가루를 부었다.
* * *
4차전 방영 다음 날 김원상은 테블릿으로 방송에 관한 댓글을 보고 있었다.
→서인우 씨가 만든 양장피 분명 내가 먹어 본 집인 듯.
→[서풍] 말하는 거죠? 그럼 우리 [서풍] 요리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건가요?
→저런 실력자를 억울하게 만들 뻔한 동영상 제작자를 찾 아 손모가지를 똑.
서인우에 관한 댓글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신나서 욕해댈 때는 언제고...
기분이 상한 김원상이 테블릿의 전원을 꺼버리고 막 침대에 누우려는데 핸드폰으로 문자가 하나 날아왔다.
[약속한 잔금 바로 오늘까지 입금 부탁합니다.]
빌어먹을.
눈엣가시같이 거슬리는 서인우를 좀 치워볼까 했더니, 오히려 더 유명하게 만들어 준 꼴이라니.
잠시 침대에 대자로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김원상이 다시 몸을 일으켜 테블릿을 펼쳤다.
아버지 김형식이 매일같이 보던 [서풍] 서동수의 요리 장면이 나오는 영상을 죄다 찾아보았다.
한참을 보던 김원상이 급하게 화면을 멈추고 테블릿을 더 가까이 가져왔다.
분명 며칠 전 4차전 녹화에서 봤던 양장피와 채소와 해물의 크기, 소스의 색깔까지 완벽하게 똑같았다.
‘이럴 수가!’
아버지 김형식이 요리하는 모습을 수없이 보고 옆에서 배워온 김원상이지만, 한 번도 똑같은 모양을 만들어 낸 적은 없었다.
‘영상을 틀어놓고 그대로 흉내 내는 연습을 했다는 건가?’
화면을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계속해서 영상을 보고 있던 김원상의 시선이 면 요리를 하는 장면에서 잠시 멈췄다.
테블릿을 끄고 주방으로 향하는 김원상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슬며시 떠올랐다.
* * *
준준결승이 펼쳐질 스튜디오는 지난주보다 훨씬 분주한 모습이었다.
일주일 동안 면 요리를 비롯해 여러 가지 요리들을 연습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던 인우는 두 손을 비벼 충혈된 눈을 잠시 눌러주고 있었다.
“오늘도 일찍 왔구만.”
“안녕하세요, 어르신.”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잠을 잘 못 잤수?”
인우는 대답 대신 작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항상 일찍 도착하는 게 습관인 사람이라 그런데, 서인우 씨는 매번 왜 이렇게 일찍 오는 거요?”
“저도 약속에 일찍 가는 편입니다. 특히 오늘은 생방송으로 경연대회를 하는 곳이라 조금이라도 익숙해지려고 더 일찍 나왔습니다.”
“그렇지. 먼저 탈락한 사람들도 다 실력자들인데, 자기 주방이 아니라 실수를 하는 거지.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 한 사람들도 있을 거요.”
둘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스튜디오는 여러 가지 새로운 장비를 점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담당 피디와 스텝들도 도착하는 참가자마다 오늘부터 바뀌는 여러 가지 시스템에 관해 설명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방송 시간이 되어가자 박지훈과 김원상까지 모습을 나타냈다.
북적이던 참가자들이 점점 줄어들다 이제 단 네 명만이 실력을 겨루게 되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각자 자기 이름과 번호가 적힌 조리대를 찾아가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스튜디오에 환한 조명이 죄다 켜지고 시작을 알리는 음악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회자 전민규가 무대로 걸어 나오며 참가자들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생방송 [중화요리 최고의 고수를 찾아서]의 사회를 맡은 전민규입니다.”
음악 소리가 좀 더 크게 울리더니 다시 작아졌다.
“오늘 드디어 준준결승전이 열리게 되는데요.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부터는 시청자 여러분들도 심사에 참여하게 됩니다. 지금 자막으로 나가는 번호로 응원하는 참가자의 번호를 눌러 주시면 됩니다.”
카메라가 무대 위쪽 전광판에 보이는 번호를 찍고는 다시 전민규를 가까이 찍었다.
“그럼 오늘 준준결승에 참가할 네 명의 셰프들을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1번 박지훈 참가자입니다.”
“안녕하십니까? 1번 박지훈입니다. 멋진 요리 보여드리겠습니다. 많은 응원 바랍니다.”
박지훈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1번을 강조했다.
카메라가 그런 박지훈 얼굴과 손가락, 이름을 빠르게 연결해 담았다.
“다음은 2번 김원상 참가자입니다.”
“안녕하십니까? 2번 [만가복] 김원상입니다. 최고의 요리를 선보이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번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김원상 또한 손가락 두 개를 펼쳐 카메라에 자신의 번호를 부각하려 애썼다.
“네, 이번에는 3번 최만수 참가자입니다.”
“안녕하십니까? 3번 최만수입니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만수가 쑥스러운 듯 시작 전에 피디가 알려준 대로 손가락을 세 개 펼쳐 보였다.
“마지막 4번은 서인우 참가자입니다.”
“안녕하십니까? 4번 서인우입니다. 후회 없는 요리를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서인우 또한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손가락을 네 개 펼쳐 보였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하는 경연대회를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자기 번호를 홍보하는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카메라가 계속해서 인우를 찍고 있자 빨리 지나가기만 바라며 어색함에 뒷머리만 쓸어내리고 있었다.
“시작부터 달라진 걸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준준결승에서 살아남은 세 명의 참가자는 전 국민이 인정하고 응원하는 진정한 고수들입니다. 그럼 과연 오늘의 주제는 무엇인지 펼쳐보도록 하겠습니다.”
전민규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면 麵]이라는 한 글자가 적힌 하얀색 휘장이 펼쳐졌다.
인우의 조리대에 가지런히 올려둔 중식도가 불쑥 말을 걸었다.
-봤지? 내 실력?
‘나도 예상은 했어. 지난번 수타면 할 때 본선에서는 반죽을 직접 해서 면을 뽑는 걸 본다고 했었어.
-어쭈. 내가 차린 밥상에 숟가락 얹는 거냐?
’하지만, 오늘 일 줄 몰랐는데, 사부 감 좋은데?
“오늘의 주제를 설명해주시고 심사를 진행해주실 심사위원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전민규가 심사위원을 한 명씩 소개할 때마다 카메라가 얼굴을 가까이서 비췄다.
네 명의 심사위원에 대한 소개가 끝나자 유경동 심사위원이 무대 앞으로 나왔다.
“오늘의 주제는 면입니다. 중국요리 중에 면 요리는 시청자 여러분들도 알고 있겠지만, 그 종류가 정말 많습니다.”
“그렇죠, 가장 대표적인 짜장면부터 짬뽕, 우동, 울면, 기스면 등등 엄청나죠.”
“네, 그래서 오늘 제가 짜장면 소스를 만들어왔습니다.”
“아, 어쩐지 아직 요리를 시작도 안 했는데 스튜디오에 계속 맛있는 냄새가 나서 이상하다 했거든요.”
전민규가 말을 하며 계속 여기저기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네 명의 참가자가 직접 반죽하고 면을 뽑아 준비하면 제가 만든 소스를 부어 심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정확하게 면이 주는 식감과 맛의 차이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저는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같은 짜장 소스면 같은 맛이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중에 심사할 때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네. 설명 잘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각자 자신 있는 면 요리를 하기보다 훨씬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심사기준이 있나요?”
지난주부터 새로 합류한 마영준 셰프가 마이크를 잡았다.
“첫 번째, 최대한 불지 않는 면. 두 번째, 밀가루 냄새 없애기. 세 번째, 탱탱하지만 질기지 않고 부드럽지만 물컹하지 않을 것.”
-뭐래? 저 사람 나 좀 보자 그래.
‘왜?’
-저런 면을 자기는 만들 수 있대? 가능한 소리를 해야지.
마영준의 설명이 이어졌다.
“지금 제가 말한 조건을 듣고 가능한 소리냐고 의문이 생길 텐데요.”
-저 사람 뭐냐? 내가 하는 말 들리는 거 아냐?
인우는 피식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설명을 들으려 애썼다.
‘아빠 레시피라면 가능하지. 안 그래? 그러니 잘해보자고.’
“그냥 중화 요리사가 아니라 대한민국 최고의 고수라면 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들의 숨겨진 비법을 최대한 활용해 멋진 면을 만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마영준이 자리로 돌아가자 전민규의 멘트가 이어졌다.
“역시 준준결승답게 조건이 훨씬 어려워졌습니다. 지금부터 60분간 최고의 면을 만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시작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네 명의 참가자 모두 팬트리로 가서 각자 필요한 재료를 준비해왔다.
아빠의 비법재료인 사과를 가지고 반죽 물을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던 인우의 옆에서 똑같이 사과를 손에 들고 있는 김원상이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