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스튜디오가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참가자들뿐만 아니라, 담당 피디, 스텝들까지 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있다 들린 전민규의 멘트에 여기저기서 소리를 질러댔다.
“아, 알겠습니다. 스튜디오가 긴장으로 터져 버릴 것 같아서 잠시 여유를 가지시라는 뜻이었습니다. 지금 내 손에 네 명의 이름이 적힌 카드가 있습니다. 바로 호명하겠습니다.”
-누가 떨어질 것 같냐?
인우 역시 긴장한 채 전민규의 카드만 응시하고 있자, 중식도가 슬쩍 물어왔다.
‘글쎄, 도저히 예상이 안 되는데? 너무 훌륭한 요리를 보여줘서.’
-넌 아니야.
‘그걸 어떻게 장담해?’
-내가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건 이미 인정받고 시작한 거지. 만약 네가 떨어지면 이 몸 날린다. 난장판 각오해야 할 거다.
‘난장판 되는 거 막기 위해서라도 합격했으면 좋겠다.’
“첫 번째 합격자는 다람쥐 모양 생선요리를 멋지게 만들어 보여 준 박지훈 참가자입니다. 축하합니다.”
박지훈이 두 손을 맞잡고 기도하는 듯한 포즈를 잠시 취하더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무대로 향했다.
“그럼 두 번째 카드를 확인해볼까요? 다음 합격자는 서인우 참가자입니다. 축하합니다.”
-한 판 놀아볼까 했는데…. 뭐해? 어여 튀어 나가라고.
인우는 옆에 같이 경쟁했던 참가자들에게 고개 숙여 정중하게 인사한 후 무대를 향해 걸어갔다.
[서풍]의 맛을, 아빠 서동수의 맛을 알아봐 주고 인정해준 것만도 너무 감사했다.
그런데, 이제 준준결승이다.
이렇게 된 이상 결승까지 밀어붙일 거다.
그런 인우를 바라보는 남은 세 명 참가자의 눈빛이 가지각색이었다.
한지숙은 부러움의 눈빛을, 최만수는 기뻐하며 응원의 눈빛을 보냈다.
눈썹이 잔뜩 일그러진 김원상은 시기와 질투의 눈빛이 섞여 표정 관리가 힘들어 보였다.
“그럼 세 번째 카드를 보겠습니다. 세 번째 합격 카드를 손에 쥘 사람은 바로 김원상 참가자입니다. 축하합니다.”
김원상의 눈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허리춤으로 불끈 주먹을 움켜쥐어 보이고는 무대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카메라는 남은 두 참가자의 얼굴을 번갈아 비춰주었다.
긴장해서 앞치마만 조물락 거리고 있는 한지숙 참가자와 꾹 다문 입과 대조되게 살짝 떨리는 손을 맞잡은 최만수 참가자.
둘 중 하나는 오늘 이 시간 이후로는 경연대회에 참가하지 못한다.
인우는 묵묵히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이제 제 손에는 한 장의 카드만 남아있습니다. 과연 준준결승을 향한 마지막 자리는 누가 차지하게 될지 너무 긴장돼서 물 한 모금 마시고 이어가겠습니다.”
전민규가 사회자석에 놓인 물을 벌컥 들이마시고는 바로 진행을 이어갔다.
“그럼 발표하겠습니다. 마지막 한 명은 바로 최만수 참가자입니다. 축하합니다.”
인우는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 심사위원과 다른 참가자, 스텝들까지 모두 박수를 보냈다.
최만수는 옆에 끝까지 같이 남아있던 한지숙 참가자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한지숙 또한 같이 인사를 한 후 두 팔을 벌려 최만수를 꼭 안아주었다.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열정적인 카메라 감독이 이런 명장면을 놓칠 리가 없었다.
여러 각도로 둘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여기 네 명의 참가자는 다음 주에 있을 준준결승에서 다시 멋진 대결을 선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아쉽게 이 자리를 떠나게 되는 한지숙 참가자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전민규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한지숙 곁으로 다가갔다.
“오늘 정말 훌륭한 요리를 보여 주셨는데요, 워낙 다른 분들의 솜씨 또한 뛰어났습니다. 심사위원분들 또한 결정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들었습니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너무 긴장해서 시간 계산에 실수가 있었습니다. 마지막 플레이팅 하면서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예상은 했습니다. 하지만, 실망하지는 않으려고요. 여기 계신 우리나라 최고의 중화요리 고수들과 오늘까지 살아남아 경쟁하지 않았습니까? 저 스스로 쓰담쓰담 해줄 생각입니다. 정말 좋은 추억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튜디오에 박수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박정원 심사위원이 카메라를 보며 못다 한 이야기를 전했다.
“오늘 한지숙 참가자의 요리는 아주 훌륭했습니다. 경쟁하는 프로그램 아니었으면 최고의 찬사를 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다시 말해 다른 네 명의 참가자 요리가 너무 완벽했기 때문에, 작은 실수가 감점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우리 심사위원뿐 아니라 시청자 여러분들 기억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스튜디오에 잔잔한 음악이 깔리며 한지숙의 얼굴이 한 번 더 카메라에 잡혔다.
“네. 오늘 방송은 이것으로 마칩니다. 다음 주 있을 준준결승전을 기대해주시길 바랍니다. [중화요리 최고의 고수를 찾아서]는 쭈욱 계속됩니다. 감사합니다.”
음악 소리가 점점 더 커지며 녹화가 끝이 났다.
심사위원들이 한지숙 참가자에게 악수를 권하자, 그때를 놓치지 않으리라 맘이라도 먹은 것처럼 그새 눈물 자국을 지워버린 한지숙이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심사위원들과 한 컷.
사회자와 한 컷.
그리고는 참가자들과 한 컷.
이제는 홀가분한 표정이 된 한지숙이 자리를 정리하고 있던 서인우에게 다가왔다.
“그동안 같이 경쟁할 수 있어서 재미있었어요.”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항상 멋진 요리 보여 주실 거라 믿습니다.”
“나한테 뭘 배워...잘생긴 총각이 겸손하기까지 하네. 이것도 인연인데, 나랑 기념사진 한 장 찍어요.”
“방금 찍었는데….”
“단둘이.”
“아, 네. 알겠습니다.”
두리번거리던 한지숙이 지나가던 김원상을 불러 세웠다.
“저 김원상 씨.”
“네?”
“사진 좀….”
“그러시죠. 옆에 서세요.”
“아니 우리 좀 찍어 달라고요. 호호호.”
당황해 얼굴이 금세 가을 홍옥처럼 붉어진 김원상이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한지숙의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셀카로 찍으면 내 얼굴이 찐빵처럼 나와서…. 미안해요.”
김원상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 둘을 힐끗 쳐다봤다.
인우가 옆에 서자 어깨에도 닿지 않는 한지숙이 까치발을 하느라 몸이 흔들리고 있었다.
인우가 말없이 다리를 굽혀 키를 맞추자 함박웃음을 보여 주며 사진을 연달아 다섯 번이나 찍어달라 요구했다.
핸드폰을 돌려주고 돌아선 김원상이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냥 찍어도 찐빵 맞구만. 기분 나쁘게.”
다행히 입이 귀에 걸린 한지숙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실은 서인우는 갈수록 커지는 긴장감에 어깨가 빳빳하게 굳어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기분은 좋았다.
바라던 대로 심사위원들이 인우의 요리를 보고 [서풍]을, 아빠 서동수를 떠올렸다.
그런 날을 바라며 죽어라 연습했지만, 그런 날이 실제로 올 거라고는 믿지 못했었나 보다.
지하철 창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면서도 오늘 있었던 일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집에 돌아온 인우는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침대에 대자로 누웠다.
피곤했다.
하지만, 커다랗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 막 빠져나온 것처럼 기분은 상쾌했다.
갑자기 눈물을 흘리던 한지숙의 얼굴이 떠올랐다.
요리하는 과정부터 모양까지 완벽하게 보였지만, 아주 작은 실수로 탈락을 하고 말았다.
이제 정말 고수 중의 고수들만 살아남았다.
그 속에서 경쟁해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이 어깨를 누르는 것 같았다.
내일의 일은 내일 생각할 거다.
난 오늘 최선을 다했으니까.
* * *
노란 조명이 은은하게 비치고 수많은 양주병이 벽에 붙어 있는 투명한 유리 장식장에 하나씩 놓여있었다.
그 앞에 서 있는 바텐더가 얼음이 담긴 잔에 양주를 조금 따라 두 잔을 만들어 내려놓았다.
오늘도 오후에 있었던 회의에서 김형식의 호통을 있는 대로 받아낸 차성철 팀장은 홍보팀의 유현주 대리와 나란히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은은한 째즈 풍의 노래가 이따금 들리고 사람들의 대화 소리도 시끄럽지 않을 정도로 들려왔다.
“다들 열심히 잘하고 있는데, 왜 아직 없어진 지 오래된 [서풍]하고 비교를 당해야 하는지….”
“팀장님! 퇴근하고도 계속 일 얘기만 하실 거예요?”차성철 팀장은 잔을 입에 가져가려다 잠시 멈추고는 유현주 대리를 쳐다봤다.
“일 얘기하러 여기까지 찾아온 거 아니었어?”유현주 대리는 손에 들고 있는 잔을 흔들어 얼음이 움직이는 것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시선은 그대로 흔들리는 얼음 조각에 두고 입만 움직여 대답했다.
“난 여기 팀장님하고 술 한잔하고 싶어서 온 건데요. 사실 어제도 그저께도 왔었어요.”“뭐?”
“팀장님이 가끔 여기서 혼자 한 잔씩하고 가신다고 해서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연출해볼까 했었죠.”
차성철 팀장은 당황해 흔들리는 눈빛을 보이지 않으려 눈을 지그시 감으며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차성철은 유현주의 당돌함을 신선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재미있군.”
“뭐가요?”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연출하려다 말았다는 얘기잖아? 왜 갑자기 작전을 바꿔 솔직해진 거지?”
유현주는 긴 포크로 네모난 치즈를 콕 찍어 입에 넣었다.
볼을 움푹 집어넣으며 치즈를 녹이다가 차성철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난 답답한 건 질색이라. 연기를 좀 해볼까 하다가 말았다는 얘기죠.”
차성철은 가지런한 머리를 다시 한번 넘기고는 말을 했다.
“난 홍보팀에 있는 유 대리를 만난 김에 회장님 지시대로 홍보 문제를 의논하려 했는데…. 유대리 말대로 퇴근했으니 일 얘기를 하는 건 매너가 아니었네.”
유현주는 피식 웃으며 치즈 옆에 놓여있는 블루베리를 입 안에 넣었다.
“그럼 유 대리는 무슨 얘기가 하고 싶어 나를 찾은 건데?”
유현주는 잔을 들어 얼음이 녹아 살짝 흐려진 양주로 입 안에 남아있는 블루베리 조각을 한데 모아 같이 삼켰다.
“차성철이라는 남자 얘기요.”
차성철은 조금 전의 신선한 느낌이 점점 불편하게 변하는 것 같이 보였다.
“난 아직 회사 사람들과 사적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은데, 좀 더 가까워지면 기회가 있겠지.”
유현주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일 얘기를 더 자주 해서 가까워지자는 말씀이죠? 그럼 퇴근은 했지만 친해지기 위해 홍보팀에서 오늘 오후에 회의한 내용 좀 말씀드려 볼까요?”
차성철은 소리 없이 웃으며 유현주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마포점의 김원상 점장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명성을 얻고 있죠. 그걸 이번 회사 홍보에 적극적으로 이용해 보려고 합니다.”
“어떻게?”
“음…. 회장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지만, 바닥부터 어떻게 요리를 해왔는지, 그의 요리 인생을 재조명해보려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회장님의 요리에 대한 열정도 같이 홍보해 보려고 합니다.”
차성철 팀장이 무미건조하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은 뭐죠?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은데요?”
“역시 퇴근 후 술자리에서 일 얘기를 하니 별로긴 하네. 그만 일어나지.”유현주는 망설임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차성철 팀장이 서운했지만, 또 그런 모습을 좋아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네, 그럼 다음 회의 때 자세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차성철은 작게 고개만 끄덕여 보인 후 술집 문을 열고 밖으로 향했다.
유현주는 그런 그를 한참을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 * *
금요일 저녁 [최고의 중화요리 고수를 찾아서]가 방송되는 시간에 사무실에 불도 켜지 않은 채 앉아 있던 김형식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특히, 서인우가 완성한 양장피가 카메라에 잡히는 순간 마우스 위에 얹어놓은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사진으로 찍어놓은 것처럼 완벽한 모양을 저놈이 무슨 재주로? 그때 분명 내가 그렇게 레시피를 물었지만,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말했었는데...”
컴퓨터로 복사해 붙여놓은 것처럼 정확한 크기의 채소와 해물들, 게다가 플레이팅 순서와 모양까지 기억 속의 그것과 완벽하게 같았다.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삐거덕거리는 플라스틱 소리가 들렸다.
준준결승에 참가할 네 명의 이름이 호명되자 방송에 한 명씩 얼굴이 나오기 시작했다.
“저놈이 더는 경연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그 자리에 꽂아 줬더니, 뭐 하고 있는 거야? 내가 거기에 얼마를 쏟아부었는데. 멍청한 자식 같으니라고.”
쾅!
화가 난 김형식이 손에 쥐고 있던 마우스를 벽으로 집어 던지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마우스의 잔해가 사방으로 튀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핸드폰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날카로운 눈빛이 순간 번뜩하고 불을 내뿜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