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몇 초 사이에 얼굴색을 확 바꾼 마영준 셰프의 인사말이 시작됐다.
“안녕하십니까? 이정복 세프님 같은 대가의 자리를 대신하려니 부담감이 엄청난데요. 그래도 젊은 감각으로 밀어 부쳐보겠습니다. 공정한 심사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다들 환영의 박수를 한 번 보내 드릴까요?”
참가자를 비롯해 스튜디오에 있던 스텝까지 환영의 박수를 보냈다.
마영준 셰프가 심사위원석으로 돌아가자 전민규의 멘트가 다시 시작됐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요? 4차전에서 경쟁할 다섯 명의 참가자를 다시 한번 소개합니다.”
이제 방송에 조금 익숙해진 듯한 다섯 명의 참가자들이 전보다는 훨씬 편해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민규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조리대 앞에 서 있는 참가자들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 그럼 제일 먼저 박지훈 참가자.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십니까?”
“지난번 인터뷰 이후로 사이트에 박지훈 참가자에 관한 질문이 엄청나게 쏟아진 걸로 아는데요, 그 궁금증을 이제 풀어주셔야겠습니다.”
박지훈이 습관인 듯 손가락으로 안경을 올리며 작게 웃어 보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3년 내내 한 번도 일등을 놓친 적이 없었습니다. 전민규 씨도 들어보셨죠? 엄친아라고. 제가 바로 그 유명한 엄친아였습니다.”
“아, 저도 우리 동네에서 유명한 엄친아였는데요.”
스튜디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물론 저는 고등학교 때 일등은 딱 한 번 해보긴 했지만요.”
“누구나 꿈꾸던 한국 의대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지만, 레지던트 2년 차에 진로를 바꿨습니다. 그 뒤부터는 엄친아에서 이 구역 미친놈으로 불렸죠.”
“그래도 어찌 됐든 칼을 잡긴 잡은 거니까 뭐 크게 바뀐 건 아니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뭐든 의미 두기 나름이니까요. 요리에 꽂혀 이 칼을 들었으니 저는 조금의 후회도 없습니다.”
박지훈이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중식도를 살짝 들어 올렸다.
“오늘도 후회 없는 요리를 선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인우는 박지훈의 용기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주변의 기대를 저버릴 수 있는 용기, 자신이 원하는 걸 알고 쫓을 수 있는 그 판단력에 응원을 보내고 싶었다.
“안녕하세요, 김원상 참가자.”
“안녕하십니까?”
“지난주 방송 이후로 [만가복] 매출에 변화가 좀 생겼습니까? 진짜 궁금합니다.”
“네, 특히 제가 있는 마포점의 매출이 대폭 상승 했습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김원상 씨의 이야기를 마저 들려주시죠.”
김원상의 입꼬리가 살짝 치솟았다.
“사실 제 아버지가 [만가복]의 김형식 회장님이십니다.”
여기저기 놀라운 탄성이 들렸다.
“고등학교 때부터 아버지에게 요리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해 대학도 관련 분야로 졸업했습니다.”
“아, 말 그대로 요리 인생이시군요. 더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또 듣도록 하겠습니다.”
“네, 멋진 요리 보여드리겠습니다.”
김원상의 인터뷰를 유심히 듣고 있던 서인우는 김형식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김형식.
인우가 아르바이트하는 [양자강]의 최형만과 방금 들은 김형식이라는 이름.
서동수의 가장 오랜 고향 친구들로 어려서부터 수없이 들었던 이름이었다.
아빠와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만가복]의 회장일 줄이야.
지금 눈앞에 있는 김원상이 왠지 더 반갑게 느껴졌다.
인터뷰를 마치고 시선을 돌리고 있는 김원상이 반가움에 활짝 웃어 보이는 인우와 눈이 마주치자 기분 나쁘다는 듯이 노려보며 고개를 돌렸다.
“다음으로 유일한 여성 참가자인 한지숙 씨를 만나 보겠습니다. 지난번에 본인을 서당 개라고 소개를 하셨는데요.”
“네, [북경반점] 서당 개 한지숙입니다. 태어나보니 동네에서 제일 유명한 중화요리 집 손녀였지만, 할아버지는 제가 요리를 배우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셨어요.”
“아니 이유가 뭔가요?”
“사실 중화요리는 크고 무거운 웍을 움직이는 손목의 스냅이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여자들에게는 힘든 분야인 건 사실입니다. 저도 여기 인대를 두 번이나 수술했어요.”
한지숙이 왼쪽 손목을 가리켰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하시는 거네요?”
“저는 요리가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웍을 감싸고 올라오는 불꽃을 보고 있으면 황홀할 정도이니까요.”
“그 열정에 박수를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좋은 결과 있길 바랍니다.”
카메라가 한지숙의 손목을 한 번 더 가까이 비춰주었다.
그 장면에 이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최만수의 주름진 얼굴이 비쳤다.
“지금 카메라가 다음 참가자인 최만수 씨를 찍고 있는데요. 사실 경연대회 사회를 여러 번 봤지만, 아마도 제가 만난 참가자 중 가장 고령자일 듯싶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니까요.”
“맞습니다. 늦게 요리를 시작하셨다고 하셨는데요?”
“어려서부터 요리사가 제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꿈보다 돈을 좇아야 했습니다. 내가 젊어서부터 안 팔아 본 것이 없습니다.”
잠시 회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최만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다행히 이제는 돈이 나를 좇아오니, 나는 다시 꿈을 좇고 있는 겁니다. 요리를 할 수 있는 지금이 나의 청춘입니다.”
우와!
갑자기 어디선가 들리는 탄성과 함께 박수 소리가 스튜디오에 넓게 퍼졌다.
인우 또한 힘차게 손뼉을 치며 진심으로 최만수 참가자를 응원했다.
멋지다.
요리를 할 수 있는 지금이 나의 청춘이다?
지금 청춘을 보내고 있는 20대의 인우는 오히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말이었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역사가 있다.
여기 참가자들의 인생이 어떠했는지 감히 다 알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냥 다 좋았다.
“다음 마지막으로 만나볼 참가자는 서인우 씨입니다. 요 며칠 아마 가장 유명해진 분이 아닐까 싶은데요.”
“네, 잠시지만 감히 따라가지도 못할 이정복 심사위원의 아들도 되어보고 정말 새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도 아직 논란이 완전히 사그라진 것은 아니라서 조심스럽기도 할 텐데요.”
“그렇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기까지 힘들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결국 밝혀지는 거니까요. 누가 어떤 이유에서 그런 영상을 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결국 논란을 인정하는 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우는 진지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아버지의 이름이 다시 불려질 날을 위해 이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끝까지 멋진 요리로 대결하겠습니다.”
“네, 대단한 각오를 보여준 서인우 참가자의 멋진 요리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전민규의 멘트가 끝남과 동시에 요리대회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웅장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자 그럼 4차전의 대결과제를 소개하겠습니다.”
검은 휘장 옆으로 펼쳐진 하얀색 휘장에는 아무런 글씨도 적혀 있지 않았다.
“오늘의 대결과제는 무제입니까?”
유경동 심사위원의 설명이 이어졌다.
“오늘 4차전에 참가한 최종 5인은 이미 훌륭한 요리 솜씨를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가장 자신 있는 요리, 가장 선보이고 싶은 요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시간을 주도록 하겠습니다. 쉽게 말해 자유주제입니다.”
“지금 까지는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서로 다른 요리를 선보여 왔었는데요, 오늘은 말 그대로 실력 발휘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참가자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살짝 스쳐 갔다.
그것도 잠시.
각자 어떤 요리를 선보일지 머릿속이 바빠진 듯 심각한 표정을 보였다.
서인우 또한 잠시 고민에 빠졌다.
‘무슨 요리를 선보이면 좋을까?’
-답정너.
‘뭐?’
-이미 답은 나온 거 아니냐? 그 시베리아허스키 같은 놈 혼내줘야지.
‘[서풍]의 대표 메뉴를 공개하자는 얘기지? 과연 내가 아빠의 맛을 그대로 재연해낼 수 있을까?’
-서인우 답지 않게 왠 약한 모습? 나랑 처음 만난 여름부터 몇 개월을 연습했는데 아직도 자신 없는 거냐?
‘아니, 자신 있어. 오늘 내 요리 이름은 [서풍]이다.’
-아, 깜짝이야. 난 또 허풍이라는 줄.
갑자기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덕분에 긴장해서 살짝 쫄깃해진 심장도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결정을 내린 인우는 거침없이 팬트리로 가서 필요한 재료를 모두 준비해왔다.
채소를 깨끗이 씻어 준비해놓자 중식도가 여느 때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채소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팬트리에 한참을 서 있던 김원상도 드디어 결정했는지 재료들을 담기 시작했다.
새우를 잔뜩 담아온 걸로 보아 새우요리를 할 듯 보였다.
새우 수염과 꼬리를 손질한 후 이쑤시개로 내장을 제거한 김원상은 다시 그 새우를 깨끗이 씻어 소금, 후추, 설탕, 맛술을 넣고 절여 두었다.
그리고는 산초와 건 고추를 잘라 물에 불려 놓고 바로 마늘과 생강을 편으로 썰기 시작했다.
벌써 매콤한 향이 코를 자극하는 것 같았다.
최만수 또한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잔뜩 긴장한 듯한 최만수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두부였다.
두부를 네모반듯하게 잘라 물기를 빼고는 기름에 노릇하게 튀겼다.
잘 튀겨진 두부의 기름기를 빼는 동안 잘게 다진 돼지고기를 기름에 볶다, 마늘, 생강, 파를 다져 함께 넣어 볶았다.
고기가 다 익어 갈 때쯤 고추장을 한 숟가락 넣어 고추기름을 만들었다.
고기와 마늘, 고추기름이 어우러져 그것만 밥에 비벼 먹어도 맛있을 듯 보였다.
뭔가 분주해 보이는 박지훈 참가자는 커다란 물고기를 머리 부분과 몸통 부분으로 잘라 손질하고 있었다.
가운데 긴 가시를 회 뜨듯이 도려내고 몸통만 남긴 후, 생선 살에 세로로 길게 칼집을 여러 개 냈다.
그리고는 다시 가로로 칼집을 내어 마치 겨울철 처마 끝 고드름처럼 여러 개의 생선 살이 껍질에 붙어 있게 손질했다.
잘 손질된 생선을 다시 깨끗이 씻어 그 위에 편으로 썬 생강과 쪽파를 넣어 비린내를 잡고 달걀 하나와 맛술, 소금을 넣어 절여 놓았다.
한지숙은 고기에 진심인 듯 이번에도 돼지갈비를 손질하고 있었다.
돼지갈비를 툭툭 힘을 주며 잘라 준비해놓고, 채소를 손질했다.
대파는 어슷하게 썰어놓고, 마늘과 생강은 편으로 썰어놓았다.
거기에 계피, 팔각과 산초를 넣어 또 한쪽에 준비해놓았다.
여러 대의 카메라가 다섯 명 참가자의 요리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밀착 촬영을 하고 있었다.
인우는 굴 소스와 여러 향신료 등을 넣어 화력을 최대로 해 볶은 각종 해물과 채소를 볶았다.
그런 후, 편으로 썰어놓은 오이와 벌집 모양의 오징어, 편육 등을 가지런히 접시의 가장자리 쪽으로 둥글게 깔아 놓았다.
다음으로 차가운 오이와 오징어 등의 재료와 가운데 따뜻한 해물 채소볶음의 경계에 양장피를 올려 마치 화려한 꽃처럼 플레이팅을 했다.
심사위원들 또한 다섯 명의 참가자가 각각 요리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피며 평가지에 내용을 적느라 분주했다.
오늘부터 새로 합류한 마영준 셰프 또한 재료 하나하나를 꼼꼼히 체크하고 맛을 보고 있었다.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맘먹은 듯 표정에는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던 마영준 셰프가 김원상의 요리를 보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거 매콤한 게 마라의 향이 느껴지는데요?”
“네, 유명한 영화에 나와 제법 알려진 마라롱샤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안 먹어봐도 딱 알겠네요. 맥주를 부르는 맛이라는 걸 말입니다.”
김원상의 입꼬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는 바로 최만수의 요리를 빤히 보던 마영준 셰프가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오늘같이 중요한 대회에서 이런 단순한 재료로 승부를 보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이건 모험일 텐데요?”
“쉽게 접할 수 있는 재료가 포인트입니다.”
들릴 듯 말 듯 한 비웃음이 잠시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자, 유경동 심사위원이 말을 덧붙였다.
“흔한 재료로 최고의 맛을 낼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을 건 없겠지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여전히 오른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마영준 셰프가 서인우의 요리를 보며 노골적으로 인상을 쓰고 있었다.
“뭔가 특별한 요리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거 양장피를 준비하고 있는 거죠? 너무 흔한 요리라 좀 실망스러운데요?”
그때였다.
인우가 요리하는 조리대 앞에서 발길을 멈춘 나영희 요리전문 평론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거...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