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오랜만에 일요일이라 늦잠을 자고 있던 인우의 핸드폰이 요란스럽게 울려댔다.
한쪽 눈만 간신히 뜬 채 집어 든 핸드폰 액정엔 친구 준형의 이름이 둥실둥실 떠 있었다.
“일요일이다, 잠 좀 자자.”
-너 지금 한가하게 자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나 밤새 요리 연습하고 해 뜨는 거 보고 잤어. 급한 일 아니면 나중에 통화하자.”
-급한 일 맞아. 아니, 아주 중요한 일이야. 빨리 일어나 정신 차리고 앉아 인마.
인우는 평상시보다 흥분된 준형의 목소리에 고개를 흔들어 억지로 잠을 깨며 침대에 앉았다.
“뭔데 그래?”
-잠 깼으면 바로 인터넷 좀 들어가 봐. 너 전보다 더 유명해졌어.
“또 댓글 보라고 피곤한 나를 깨운 거냐? 끊어, 인마. 그런 거 관심 없어.”
-이정복 심사위원하고 너하고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글이 올라왔어. 둘이 대화하는 영상하고 같이.
“뭐? 알았다.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급히 통화를 마친 인우는 인터넷을 열어보았다.
애써 찾을 필요도 없이 프로그램의 인기만큼 엄청난 조회 수의 영상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
이정복 심사위원과 가까이서 대화하는 모습과 웃으며 인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가는 모습까지 담긴 영상이 그대로 흘러나왔다.
순간 인우의 시선이 정지된 한 화면과 그 밑에 깔아 놓은 자막에 꽂혔다.
이정복 심사위원의 입 모양이 벌어져 있었고, 그 아래 자막에는 [4차전] 이라는 글이 크게 번쩍이고 있었다.
3차전을 마치고 나오는 서인우 참가자에게 다음 4차전의 대결과제를 알려주고 있는 이정복 심사위원이라는 설명과 함께.
음성은 전혀 녹음되어 있지 않은 동영상.
둘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당연히 당사자들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교묘하게 입 모양에 맞춰 깔아 놓은 자막이 네티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이건 절대 사실이 아니다.
인우는 누가 이런 영상을 만들고, 조작까지 했는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평생을 진실하게 살아왔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념으로.
하지만, 그런 신념만으로 무시하기에는 조회 수와 댓글이 너무 폭발적이었다.
화면을 스크롤 하던 인우의 손이 순간 한 댓글에 멈춰 섰다.
→ 서인우는 이정복의 숨겨진 아들.
→ 그래서 계속 아버지 얘기를 했던 거네. 이건 완전히 짜 고치는 고스톱이구만.
인우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아빠의 이름을 다시 찾기 위해 시작한 요리경연대회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며칠 전 경연을 마치고 이정복 심사위원이 [서풍]을 입에 올렸을 때의 감동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순간 어깨를 두드려주었던 이정복 심사위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방송에서 확실하게 해명할 것이다.
하지만, 녹화가 있는 수요일까지 계속될 거짓 정보를 무시하고 넘길 수만도 없었다.
인우는 프로그램 담당 피디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피디님. 저 서인우입니다.”
-어? 인우씨?
피디의 목소리가 평상시보다 부쩍 무겁게 느껴졌다.
아주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방금 저에 관한 영상을 보고 전화드렸습니다. 당연히 피디님도 보셨겠죠?”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지금 방송국이 발칵 뒤집혔어요. 사실은 아니죠?
“네. 당연히 사실이 아닙니다. 이정복 대가님한테도 확인해보시면 알 겁니다.”
-우리도 사실이 아니라는 말 믿습니다. 분명 경쟁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누군가 서인우 씨를 깎아내리려 한 것 같아요. 하지만, 영상물의 파급 효과라는 게 엄청난 거라서요.
피디의 목소리가 한 층 더 아래 동굴을 파기 시작했다.
- 지금 영상을 내리려고 조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너무 크게 논란이 됐기 때문에, 더는 둘이 한 방송에 나올 수는 없다는 결론입니다.
인우의 머릿속이 순간 도화지처럼 하얘지는 것 같았다.
프로그램의 핵심 심사위원이자 이미 전국적으로 유명한 이정복 대가와 이제 막 방송에서 요리를 선보이기 시작한 무명의 참가자 서인우.
그 둘 중 누군가 하나를 빼야 한다면 그건 당연히 일개 참가자겠지.
너무나 자명하게 답이 나오자 인우는 순간 목구멍에서 씁쓸한 뭔가가 올라오는 듯했다.
쓴웃음을 대신 집어삼키며 물었다.
“그럼 저는 이제 대회에 참가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담당 피디의 답이 바로 넘어오지 않았다.
-아직 확실한 건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좀 더 회의한 후에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통화를 하는 도중에도, 막 통화를 끝낸 후에도 계속해서 문자가 날아왔다.
전화벨도 끊임없이 울어댔다.
이모부를 비롯해 모르는 번호까지 계속해서 전화가 걸려왔다.
인우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꿔놓고 전화를 받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누굴까?
왜 이런 영상이 올라오게 된 걸까?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며 누군가에게 미움 살 일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제대로 할 각오로 뛰어든 지금 뭣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후가 되자 다행히 영상은 사라졌다.
그렇다고 사람들 머릿속에 이미 자리 잡은 각종 추측과 거짓 정보까지 다 사라지는 건 아니다.
4차전에 참가하지 못한다 해도 이일은 반드시 확실히 하고 넘어갈 것이다.
심란할 때는 뭐다?
인우는 운동복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갔다.
일요일 오전, 아니 오전이라기보다는 이미 정오를 향해가는 시간의 주변 풍경은 한가롭고 조용했다.
골목에서 조금 벗어나 아빠의 [서풍]이 있던 곳으로 발을 돌리자, 맛있는 곳을 찾는 설렘 가득한 가족과 연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따라 그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러웠다.
가족과 손잡고 외식하러 나온 일곱 살짜리 꼬마가 부러운 건 아니었다.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던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이 눈앞에 보이는 이들을 부럽게 만들었다.
인우는 뒤집어쓴 점퍼의 후드를 더 밑으로 내리고 속도를 내어 골목을 뛰었다.
한 시간을 달리고 등이 축축하게 땀에 젖은 게 느껴졌지만, 머릿속은 전혀 개운해지지 않았다.
침대 위에 점퍼를 벗어놓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머리부터 굴곡진 가슴 근육을 타고 흘러내리는 하얀 비누 거품을 한참을 바라봤다.
손목이 퉁퉁 붓도록 매일같이 죽어라 요리 연습만 했다.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머리만 대충 말리고 요리 연습을 위해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떻게든 참가해 실력으로 보여 줄 거다.
그리고...
끝까지 남아서 아빠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말할 거다.
어금니를 세게 악물고 있는 인우 앞에서 중식도가 슬쩍 말을 걸었다.
-너 오늘 낯설다.
“응?”
-왜 이렇게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거냐?
“그냥...머릿속이 좀 복잡해서.”
-난 널 제자로 받아들이면서 내 모든 걸 바칠 생각을 했는데...너는 아닌가 보구나. 그래, 우리가 피를 나눈 사이도 아니고, 다 뒤돌아서면 남인 거지.
“무슨 말이냐?”
-그냥 섭섭하다는 거지. 서동수는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다 나와 함께 했건만….
인우는 중식도를 빤히 쳐다봤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보면 나 좀 쑥스러운데….
중식도의 말에 기분이 조금 나아진 인우는 인터넷에 떠도는 자신에 관한 거짓 소문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씽씽 소리를 내가며 잠시 돌던 중식도가 순간 멈춰 섰다.
-이런 시베리아허스키 같은 놈이 어디서 내 친구 서동수 아들을 건드려?
“뭐? 시베리아 뭐라고?”
-넌 이런 고급진 욕 안 쓰냐? 서동수가 가르쳐 줬는데.
인우가 소리 내서 웃자 중식도가 쓱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가 이번 4차전에서 제대로 본때를 보여 주자고. [서풍]의 시그니처 메뉴가 뭔가 제군?
“목소리는 왜 그래?”
-이젠 전쟁이다. 이 시간 이후로 그 시베리아허스키 같은 놈한테 전쟁을 선포한다. 알았나?
[서풍]의 시그니처 메뉴.
아빠만의 비법 소스와 독특한 모양으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메뉴, 바로 양장피.
언젠가는 그 양장피를 그대로 재현해 심사위원들과 시청자들로부터 [서풍]을 떠올리게 할 거다.
그렇게 떠도는 동영상이 조작됐다는 걸 보여 주고 말 거라고.
재료를 꺼내 놓고 소매를 걷어붙인 인우가 매서운 눈빛을 보이며 중식도를 잡았다.
양장피를 비롯해 [서풍]의 인기 메뉴를 밤낮으로 연습하며 하루하루 지났지만, 방송국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영상을 내리고 그냥 없던 일로 넘어가기로 한 걸까?
사실확인을 했으니 그냥 무시하기로 한 건가 보다.
며칠 잠도 설치며 칼을 갈고 온 녹화 날.
방송국에 도착한 인우를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은 한지숙 참가자였다.
“서인우씨. 괜찮아요?”
“안녕하세요. 괜찮지 않습니다. 이제 너무 유명해져서 지하철 타기 불편해질까 걱정입니다.”
“하긴, 그런 일 없어도 대중교통은 좀 불편할 것 같아요.”
“네? 왜요?”
“그 얼굴로 대중교통 막 타고 질서를 흐트러트리고 그러면 안되는 거야. 그러다 여자들 충돌사고 난다고. 호호호.”
고개를 젖히고 웃으며 손뼉을 치던 한지숙 참가자가 순간 웃음을 뚝 그치며 가까이 다가왔다.
“내 생각에는 대회에서 떨어진 사람 중에 누가 자기한테 해코지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실력이 뛰어나니까, 그냥 배가 아픈 거지. 신경 쓰지 말고 오늘도 멋진 요리 부탁해요.”
대회에서 떨어진 사람?
그건 아닐 거다.
분명 지난 3차전이 끝나고 스튜디오를 나올 때 이정복 대가와 둘이 나누는 대화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일 거다.
그렇다면, 3차전에서 살아남은 다섯 명의 참가자 중 한 명일 수도 있다.
인우는 4차전을 위해 모인 참가자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쳐다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누군가를 의심하고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으니까.
진실은 언젠가는 승리할 거고, 난 오늘 실력으로 모든 걸 증명해 보일 거니까.
앞치마 끈을 바짝 다시 묶으며 각오를 다지고 있던 인우의 귀에 시작을 알리는 경쾌한 음악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중화요리 최고의 고수를 찾아서]의 4차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 전민규의 힘찬 목소리에 웅장한 음악 소리가 더해지며 카메라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시작에 앞서 오늘도 수고해 주실 심사위원을 소개해야 하는데요. 이번 주부터 새로운 심사위원 한 분이 합류하셨습니다. 그럼 한 번 만나볼까요?”
전민규의 멘트가 끝나자 뒤쪽에서 무대로 걸어 나오는 네 명의 심사위원이 보였다.
익숙한 실루엣의 네 명의 심사위원이 무대 중앙에 모습을 드러냈다.
3차전까지 심사를 맡았던 유경동 대가, 이정복 대가, 나영희 음식 전문 평론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정원 요리전문가까지 바뀐 것은 없었다.
그때였다,
이정복 대가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오더니 크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이정복입니다.”
인우를 비롯해 모든 참가자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미 3차전 이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동영상은 다 본 사람들일 테니.
“지난주 대결 이후 재미있는 동영상이 엄청난 조회 수를 자랑한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그걸 보고 저게 사실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에 며칠 잠을 못 잤습니다.”
이정복의 표정을 살피던 전민규가 조심스러운 듯 물었다.
“이정복 심사위원님.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이미 다들 보셨을 테니 편하게 얘기하겠습니다. 서인우 참가자가 내 숨겨진 아들이라는 댓글처럼 내 유전자에서 저렇게 잘 생기고 요리 실력도 뛰어난 아들이 나왔다면 그건 로또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아쉽겠습니까?”
참가자들과 심사위원들 모두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미 사실이 아닌 건 확인이 됐지만, 괜한 오해로 참가자에게 억울한 일이 생기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있을 4차전부터 저는 심사위원에서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참가자들의 놀란 표정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찍혔다.
서인우 역시 미간에 주름이 잡히도록 인상을 쓰고 있는 모습이 그대로 영상에 담겼다.
눈이 마주친 인우에게 티 나지 않게 미소를 지어 보인 이정복 대가의 말이 이어졌다.
“오늘부터 다른 심사위원들과 함께 공정한 평가를 해줄 새로운 심사위원을 소개하고 저는 물러나겠습니다. 그럼 마영준셰프를 소개하겠습니다.”
카메라 하나가 키가 크고 젊은 마영준 셰프를 따라가는 동안, 다른 하나가 꾸벅 인사를 하고 뒤돌아 들어가는 이정복 대가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인우의 눈도 카메라를 따라 이정복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자신의 요리를 통해 아빠를 기억해준 이정복 심사위원이 그를 위해 자리에서 물러났다.
꽉 움켜쥔 인우의 두 주먹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자, 오늘부터 새로운 심사위원으로 합류하게 된 마영준 셰프는 퓨전 중화요리로 이미 명성을 날리고 계십니다. 짧게 인사 부탁드립니다.”
마영준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는 서인우를 향해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기대해. 내가 시원하게 보내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