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누구든 면이 너무 먹고 싶지만, 위장 문제 때문에 먹지 못하고 참아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가 만든 새우면이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박정원 심사위원의 사업 제안을 받아들이시는 건가요?”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전민규를 비롯해 심사위원들과 모든 참가자가 인우를 응시했다.
“제 모든 요리 레시피는 원조이신 저희 아버지 이름을 걸고 만들 것입니다.”
전민규가 궁금했는지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
“처음 개인 스토리를 말씀하실 때부터 궁금했는데요, 서인우씨 아버지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그건...”
인우는 잠시 하던 말을 멈췄다.
스튜디오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건….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인우씨 각오가 대단한데요, 반드시 끝까지 살아남아서 저희뿐 아니라 모든 시청자의 궁금증을 풀어 주시길 바랍니다.”참가자 일곱 명의 요리에 대한 심사가 모두 끝이 났다.
심사위원들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에 들어갔다.
“오늘 3차전을 통과한 다섯 명의 참가자는 4차전 방송이 시작될 때 오늘 못다 한 스토리를 전부 공개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4차전에서는 요리와 참가자들의 개인 스토리를 엮어 가며 방송을 진행할 생각인 것 같았다.
인우는 대결 횟수가 많아질수록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그의 요리를 맛보고 [서풍]을, 서동수를 떠올릴 수 있길 바랐다.
자신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게 아빠의 뒤를 이을 수 있는 자격을 주게 되리라 생각했다.
무대로 걸어 나오는 심사위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일곱 명 중에서 두 명은 오늘 대회를 끝으로 더는 대회에 참가할 수가 없다.
모두 최선을 다한 것을 알기에 결정이 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드디어 심사 결과가 나온 것 같습니다.”
유경동 대가가 손에 들고 있던 카드 봉투를 전민규에게 전했다.
“지금 제 손안에 4차전으로 갈 참가자의 명단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 두 명은 오늘이 마지막이겠네요. 긴장된 순간입니다.”
잔뜩 굳어있는 일곱 명의 얼굴을 카메라가 천천히 찍기 시작했다.
“그럼 다음 주에 있을 4차전에 참가할 첫 번째 이름은 바로...박지훈 참가자입니다. 축하합니다.”
심사위원과 참가자들 모두 진심을 담아 박수를 건넸다.
“다음은 서인우 참가자. 축하합니다.”
“세 번째 참가자는 최만수 참가자. 축하합니다. 이제 단 두 명의 카드만 남아 있는데요, 아직 호명되지 않은 사람은 정말 피가 마를 듯하네요.”
전민규가 아직 호명되지 않아 앞으로 나가지 못한 네 명의 참가자들 얼굴을 천천히 바라봤다.
그 시선을 따라 카메라가 그들의 긴장되는 얼굴을 잡았다.
“바로 발표하겠습니다. 네 번째 참가자는 여성 파워를 보여주신 한지숙 참가자입니다. 축하합니다.”
여성이라는 단어에 카메라가 재빨리 한지숙과 유다인을 잡았다.
희비가 교차하는 순간 또한 놓치지 않고 찍었다.
베테랑 카메라 감독인 듯했다.
지금까지 이름이 호명되지 않은 김원상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황당하고 화가 났지만, 계속해서 호명되지 않은 사람들 얼굴을 카메라가 집중 촬영을 하자 억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 그럼 마지막 한 장의 카드만 남아 있습니다. 4차전을 겨룰 수 있는 마지막 한 명은 바로 [만가복]의 김원상 참가자입니다. 축하합니다.”
스튜디오에 경쾌한 음악 소리와 함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메라는 다섯 명의 3차전 합격자의 얼굴을 하나하나 천천히 찍은 후 다시 사회자에게로 넘어갔다.
“유다인 참가자와 안정훈 참가자도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쉽지만,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소감을 짧게 부탁드립니다.”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던 유다인이 마이크를 잡자마자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참아내는 듯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저,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후회는 없어요. 다만, 여기 있는 참가자분들의 요리 실력을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게 너무 아쉬울 뿐입니다.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저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코를 훌쩍거리던 유다인이 전민규의 허락을 기다리는 듯 그를 빤히 응시했다.
“네, 어떤 부탁이신가요?”
“저기 심사위원으로 계시는 이정복 대가님이 제 롤모델 이십니다. 싸인 한 장만 부탁해도 될까요?”
이정복 대가가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싸인 여러 장 받아 가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번에는 안정훈 참가자의 소감을 듣겠습니다.”
“저한테는 정말 많은 것을 배워가는 대회였습니다. 특히 오늘 서인우 참가자의 요리를 보고 저도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즐길 수 있는 요리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안정훈을 찍던 카메라가 서인우에게로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
얼떨결에 카메라에 잡힌 인우는 어색함을 이기기 위해 손 브이를 만들어 보였다.
“서인우 씨, 지금 표정 엄청 어색한 거 아세요?”
전민규의 멘트에 스튜디오에 있는 스텝들까지 모두 빵 터졌다.
단 한 사람 김원상만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주목받는 상황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저 어린놈은 이상하게 재수가 없단 말이야. 짜증 나게 혼자 여유 있는 척하고.’
지난주 방송을 같이 보다가 아버지 김형식이 서인우를 바라보는 눈빛이 남달랐다는 걸 눈치챈 이후로는 더 꼴 보기 싫었다.
“시청자 여러분 방금 인터뷰를 마친 유다인, 안정훈 참가자의 이름도 꼭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전민규를 시작으로 심사위원들과 스튜디오에 있는 모든 사람이 떠나는 둘에게 손뼉을 힘껏 쳐주었다.
유다인과 안정훈이 스튜디오 문을 열고 나가자, 전민규의 멘트가 이어졌다.
“이제 단 다섯 명의 참가자가 남았습니다. 다음 주에 있을 4차전에서는 최종 세 명의 참가자를 뽑게 됩니다. 과연 여기 있는 다섯 명 중에서 누가 남고 누가 이곳을 떠나게 될지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카메라가 상기되어 있는 다섯 명의 참가자를 가까이서 찍고 있는 동안 대회의 막이 내리는 웅장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중화요리 최고의 고수를 찾아서]는 다음 주 이 시간에 새로운 대결과제로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많은 응원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심사위원들이 다섯 명의 참가자 앞으로 다가와 악수를 권하며 합격을 축하해 주었다.
참가자들도 서로 축하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스튜디오가 어두워지며 참가자들이 각자 준비해온 것들을 챙겨 하나씩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다.
인우가 스튜디오를 막 나왔을 때 조용히 곁으로 다가온 이정복 대가가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권했다.
“서인우 참가자. 오늘 요리 아주 훌륭했어요. 아버지도 분명히 좋아하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바로 알아보지 못했는데…. 지난번 백 짬뽕을 맛봤을 때 그때서야 알겠더라고.”
“네?”
인우는 이정복이 하는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서풍]의 백 짬뽕하고 똑같은 맛을 맛보고서야 자네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본 걸 기억해냈지.”
놀라고 감격한 인우의 눈이 두 배는 더 커졌다.
이정복 대가의 입에서 [서풍]의 백 짬뽕하고 똑같은 맛이라는 말이 드디어 나왔다.
“감사합니다. 다른 분들도 제 요리를 통해 아버지의 요리를 기억해주신다면 제가 이 대회에 나온 목적을 달성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끝까지 비밀로 해줘야겠군. 그래야 정말 제대로 인정을 받는 걸 테니까.”
“네, 반드시 제 요리에서 [서풍]을 떠올릴 수 있게 만들 겁니다. 그러려면 제 음식을 맛보일 기회를 더 많이 드려야 해서 결승까지 가보려 합니다.”
이정복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인우의 눈을 바라봤다.
“좋은 결과를 바라네. 난 끝까지 공정하게 심사할 거라는 것도 명심하고.”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인우는 어깨를 두드려주고 자리를 뜨는 이정복의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처음부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김원상이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을 다시 보며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둘이 아는 사이 같은데…. 심사에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가면 안 되지. 그건 공평하지 않다고. 내가 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인데 어쩌나?’
비릿한 웃음을 내보인 김원상이 핸드폰에 입력된 번호를 하나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금요일 본방이 나간 후 인우는 계속해서 걸려오는 전화와 문자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군대에서 인우를 제일 못살게 굴던 선임으로부터 동업할 생각 없냐고 묻는 전화까지 받았다.
인우는 그날 저녁 다시 입대하는 악몽까지 꿨다.
끊임없이 울려대는 핸드폰을 결국 무음으로 해놓고 아침 일찍 운동을 다녀온 인우의 원룸 앞에 친구 준형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준형아, 너 추운데 왜 여기 이러고 있어?”
“너 유명해졌다고 내 전화도 안 받기냐?”
준형의 표정이 정말 화가 난 듯 보였다.
“전화했었어? 미안. 시끄러워서 무음으로 해놔서 못 들었다. 너도 알다시피 친구라고 만나는 사람도 너 하나다. 그런데, 요즘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사람들이 전화하고 좀 불편해서.”
“얼른 문이나 열어 인마, 이러다 동태 되겠다. 에이, 커피도 다 식었네.”
인우는 얼른 도어락에 번호를 눌러 준형이 먼저 들어가길 기다렸다.
“그런데 너 우리 집 비번 알지 않아?”
“아, 그러네. 나 번호 아는데?”
인우가 피식 웃음을 내보였다.
“이제 너 유명해졌는데 내가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 거냐? 혹시 예쁜 걸그룹하고 같이 있는 현장을 목격할 수도 있고...”
“헛소리하려면 그냥 돌아가라.”
“헛소리 아니거든. 너 요즘 인기 장난 아니야.”
준형이 핸드폰으로 [중화요리 최고의 고수를 찾아서] 방송이 나간 후에 올라온 댓글들을 보여주었다.
→ 요리 천재 서인우.
→ 저 백 짬뽕 한 번 먹어봤으면.
→ 우리 엄마도 위가 안 좋아서 밀가루 못 드시는데…. 서 인우 셰프님. 얼른 식당 차리세요.
→ 아무래도 전생에 무사였을 듯. 칼솜씨가 장난 아님.
“여기 봐봐. 더 재미있는 글 있어.”
준형이 신이 나서 다른 댓글들을 보여주었다.
→ 서인우는 진짜 요리사는 아닌 듯. 모델 아니야?
→ 맞아요. 아무래도 방송 지망생인 것으로 보임.
→ 한마디로 요섹남.
→ 서인우 전화번호 삽니다.
→ 윗사람 돈 받고 따불로.
“이거 보여주려고 주말인데 늦잠도 안 자고 튀어 온 거냐?”
“그것도 있지만...”
준형이 인우를 힐끗 쳐다봤다.
“너 나랑 사진 한 장 찍자. 이리 와봐.”
“갑자기 왜 사진을 찍어?”
“내가 너랑 절친이라고 했는데, 아무도 안 믿어. 치, 뭐 너랑 나랑 외모가 안 어울린다나? 내가 정말 기분 나빠서.”
준형이 벽에 걸린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여러 각도로 비춰보더니 운동복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인우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너 이렇게 깊고 큰 모자 쓰고 다녀라. 요리대회인데 실력으로 유명해져야지. 외모로 유명해지면 되겠냐?”
거울 앞에 선 준형이 손으로 눈을 가렸다가 코를 가렸다가 다시 하관을 가리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보았다.
“인우야, 나 이 이렇게 하관을 가리면 좀 낫지 않냐? 얼굴형만 빼면 그래도 좀 먹어주지 않냐?”
“너 얼굴 괜찮아. 눈, 코, 입만 빼면.”
“그렇지? 뭐, 인마?”
인우가 뒤집어쓴 후드를 뒤로 넘기며 크게 웃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준형이 기운 빠진 어조로 한마디 더 했다.
“짜식, 잘 생기긴 했네.”
“맛있는 거 해줄게. 밥이나 같이 먹자.”
“에이 밥맛 떨어졌어.”
“그럼 그냥 집에 갈래?”
인우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살짝 물었다.
“나 배 아파. 나도 새우면 해줘!”
배 아프다는 말을 툭 던져 놓은 준형이 실실 웃기 시작했다.
인우도 덩달아 웃으며 냉장고에 넣어둔 새우를 꺼냈다.
* * *
회장실에 불려 온 [만가복] 분석팀장 차성철이 테이블 위에 놓인 태블릿을 펼쳐 김형식 회장에게 보였다.
“김원상 점장이 요리대회에 출전한 그 주부터 매출이 2배 올랐습니다. 지난주 금요일 방송이 나가고 나서는 주말 예약률이 3배가 넘었습니다.”
김형식이 손에 들고 있던 돋보기를 쓰고 화면을 꼼꼼하게 살폈다.
표정에 변화는 크게 없었지만,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가는 걸 알아본 차성철이 방송 후 댓글이 나온 화면을 찾아 펼쳤다.
“본방이 나간 후에 올라온 댓글 들입니다. 김원상 점장의 요리는 언제 정식 메뉴가 되는지, 그리고 그 메뉴를 [만가복]에서 꼭 먹어보고 싶다는 글이 많이 올라왔습니다.”
“원상이 요리에 관한 글이 제일 많다는 얘긴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김형식이 돋보기 위로 눈을 치켜떴다.
“그럼?”
“아무래도 그 방송으로 스타가 된 셰프는 서인우 참가자이니까요. 그 셰프의 요리뿐 아니라 외모, 스토리까지 지금 인터넷에 화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주인공은 서인우라고? 내 아들까지 나처럼 들러리가 되게 할 수는 없지.’
순간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힌 김형식이 주먹을 꽉 움켜쥐며 화면 속의 서인우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