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박정원 요리 전문가의 눈은 제자리를 찾아갈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하나만 더.”
채반 위에 올려놓은 면을 다시 한 가닥 집어 빠른 속도로 입에 넣었다.
“그냥 이 자체로 이미 요리입니다. 짭조름하면서 탱탱한 식감이 정말 욕심나는군요.”
사회자 전민규가 박정원에게 물었다.
“저는 박정원 심사위원의 눈이 이렇게 큰 줄 몰랐습니다. 정말 궁금한데요, 계속 욕심이 나신다고 하시는데 혹시 무슨 생각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과연 이 면을 넣은 요리는 어떤 맛일지 기대가 돼서요. 그 레시피가 욕심난다는 뜻이었습니다.”
“지금 사업가 기질이 발동하신 것 같은데요, 우선 오늘은 공정한 심사를 부탁드립니다.”
“당연합니다.”
다른 참가자들도 인우의 요리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각자 자신의 요리를 완성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네, 이제 종료까지 5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다들 최고의 요리를 선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인데요. 스튜디오 전체가 맛있는 향에 푹 빠져있습니다.”
분주하게 요리를 완성한 참가자들은 플레이팅에 마지막 심혈을 기울였다.
“자, 60분이 다 되었습니다. 이제 요리에서 손을 떼주세요.”
전민규의 말에 카메라가 정면에 있는 커다란 시계를 가까이서 찍었다.
그리고는 이어서 참가자들의 요리를 하나씩 찍기 시작했다.
“저도 긴장되기 시작하는데요. 지금부터 심사위원분들의 심사가 있겠습니다.”
네 명의 심사위원이 무대 중앙에 준비된 테이블 주위로 모였다.
“제일 먼저 박지훈 참가자, 음식을 들고 앞으로 나와 주세요.”
박지훈이 커다란 접시를 들고 심사위원 앞에 준비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하얀 접시 위에 아주 작게 빚어진 만두가 올려져 있었고, 그 주변에 표고버섯과 부추로 마치 산수화 같은 플레이팅을 선보였다.
“이건 요리라기보다는 그냥 작품인데요? 박지훈 씨가 원래 미술도 잘하셨나요? 설마 칼 잡기 전에는 붓을 잡았었다는 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 아니겠죠?”
나영희 요리 전문 평론가의 질문에 박지훈을 포함해 다른 참가자들의 긴장이 조금 풀리는 듯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카메라가 박지훈의 요리를 여러 각도로 찍기 시작했다.
3차전부터는 많은 것들이 달랐다.
모든 참가자의 개인적인 스토리를 포함해 요리도 집중 조명되며 그 요리에 대한 설명도 들을 수 있었다.
“칼 잡기 전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쭉 연필만 잡았습니다.”
박지훈의 말에 방송을 시작하면서 말한 그의 스토리가 떠오른 듯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에 대한 간략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오늘 이 요리는 전분 가루로 만든 작은 만두피 안에 새우와 다진고기를 양념해 넣은 것입니다. 입으로는 새우의 탱글탱글함과 육즙을 느끼시고, 눈으로는 마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살려 음식도 정성을 다하면 미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만든 요리입니다.”
심사위원들의 시식이 이어졌다.
“아무리 멋진 그림 같은 요리라 해도 맛이 없으면 투박한 음식만 못한 법이지요. 그런데, 박지훈 참가자의 이 요리는 입도 눈도 다 즐겁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이정복 대가의 칭찬 일색의 평이었다.
다음은 최만수의 요리였다.
중간에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던 유경동 대가의 눈이 놀라움에 크게 떠졌다.
“동파육을 만든다고 생각했는데요, 이렇게 고기가 꽃을 피우게 될 줄 몰랐습니다.”
유경동 대가의 말에 나영희 심사위원이 말을 보탰다.
“전 고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이렇게 예쁜 돼지고기는 처음 봅니다.”
다른 참가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최만수의 요리로 쏠렸다.
특히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 자신만만해했던 김원상의 얼굴에 놀라움이 그대로 묻어났다.
“저 요리 이름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꽃보다 삼겹살? 하여튼 최만수 참가자의 설명을 안 들을 수 없겠죠?”
전민규가 꽃보다 삼겹살이라 말하는 대목에서 탄성이 들려왔다.
“제가 중국요리에 처음 빠지게 된 게 바로 이정복 대가님의 동파육을 처음 먹어 본 때였습니다. 부드러우면서 감칠맛 나는 동파육의 고소함과 쫄깃함을 살리기 위해 고기를 얇게 편으로 돌려 깎기를 해서 이렇게 꽃 모양으로 돌돌 말아 다시 조려준 것입니다.”
“그럼 내가 꼭 먹어보고 냉정한 심사평을 해줘야겠는데요?”
이정복 대가가 꽃잎 같은 고기를 조금 잘라 곧장 입에 넣었다.
이어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던 나영희 심사위원도 얇은 고기를 조금 잘라 젓가락으로 집었다.
마치 유치원생들이 좋아하는 젤리처럼 젓가락 끝에 걸려 탱글탱글한 자태를 뽐내는 고기를 카메라에 몇 번 흔들어 보이고는 곧장 입으로 집어넣었다.
“너무 쫄깃하고 맛있어요. 고기 냄새는 전혀 나지 않고, 이 감칠맛 나는 양념을 한 번 맛보면 절대 젓가락을 내려놓지 못할 것 같군요. 정말 맛있습니다.”
이정복 대가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모양도 맛도 아주 훌륭합니다. 정말 주제에 맞게 발상의 전환입니다.”
전민규가 절로 나오는 침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 크게 삼켰다.
“지금이 요리대회인지 미술 전시회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입니다. 너무 훌륭한 요리입니다.”
최만수가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인우는 그런 최만수에게 오른손을 주먹 쥐어 보이며 응원을 보냈다.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온 김원상이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콧바람을 흥하고 내보냈다.
서로 응원하는 꼴은 보기 싫었지만, 김원상의 눈에도 최만수의 동파육은 지금까지 봐온 그 누구의 것보다 화려하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김원상은 바로 앞에서 극찬을 들은 참가자의 다음 순서라는 게 조금 걸렸지만, 그래도 본인의 요리에 자신 있었다.
“이번에는 김원상 참가자의 요리를 보겠습니다. 앞으로 나와 주세요.”
쟁반에 잘 쪄진 등갈비와 매콤한 향이 가득한 채소볶음을 담아 심사위원들 앞 테이블에 놓았다.
“저거 정말 하나 뜯어먹고 싶네요. 이런 고문 방송이 어디 있습니까?”
전민규의 투정이 또 시작됐다.
“정말 먹고 싶지만 참아야겠죠? 김원상 참가자, 가지고 나온 요리를 설명해 주시죠.”
카메라가 김원상의 요리를 가까이 찍은 후 김원상을 찍기 시작했다.
“중국요리 중에 파이구 미판 이라는 요리가 있습니다. 그건 갈비가 밥 위에 올려 나오는 요리인데요. 밥알이 묻어있는 갈비를 뜯으면서 아이디어를 얻은 요리입니다. 찹쌀을 그대로 묻히면 너무 밥 같은 느낌이라 불린 찹쌀을 밀대로 밀어 갈비에 묻힌 겁니다.”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네요.”
전민규의 말이 끝나자 심사위원들이 시식을 시작했다.
“매콤한 고추기름에 살짝 볶은 채소를 위에 올려 같이 드셔 보세요. 고기 냄새와 느끼함을 잡아 줄 겁니다.”
심사위원들은 그냥 갈비를 먼저 먹어보고, 그 후엔 김원상의 설명대로 채소볶음을 올려서 먹었다.
“이런 갈비찜은 처음 먹어보는데요, 쫄깃한 식감과 간이 잘 맞는 등갈비 고기 그 자체로도 너무 맛있습니다. 좀 느끼하다 싶을 때 올려준 매콤한 채소볶음은 야구로 치자면 변화구 같은 맛입니다.”
오랜만에 온 힘을 기울여 요리한 김원상의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하게 달아올랐다.
“저 메뉴는 [만가복]에 가면 먹을 수 있는 건가요?”
“아직은 메뉴에 없습니다. 오늘 훌륭한 심사위원들의 평가가 있었으니, 이제 정식 메뉴로 올려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저는 [만가복]에 가서 먹어봐야겠군요.”
김원상은 이 방송을 볼 아버지 김형식의 반응이 궁금했다.
‘이런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겠지? 이거면 [만가복]의 차기 주자로 전혀 손색이 없다고 느낄 거라고.’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힘겹게 잡은 김원상의 눈은 이미 승리를 확신하는 듯한 자신감이 가득했다.
가는 당면 위에 다진 마늘과 함께 올린 가리비 요리를 선보인 유다인은 해물의 비린 맛을 완전히 잡지 못해 나영희 심사위원의 독설을 들었다.
뒤이어 안정훈 역시 돼지 족발 요리를 시도했지만, 잡내를 잡지 못한 이유로 좋은 평가를 듣지 못했다.
다음은 초록색 고기 튀김으로 나영희 심사위원의 관심을 받았던 한지숙 참가자의 요리였다.
고기는 처음 보는 초록색이지만 모양과 향은 일반 탕수육과 같아 보였다.
특이한 건 잘 튀겨진 고기 위에 눈에 띌 만큼 엄청난 양의 부추와 양파가 산을 만들고 있다는 거였다.
또한 그 위에 잘 튀겨진 마늘이 올라가 있었다.
“한지숙 참가자. 이 요리는 정체가 뭔가요?”
“웰빙 탕수육입니다. 사실 제가 할아버지 요리 중에 탕수육을 제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먹을수록 너무 달고 기름지다는 생각이 들어서 탄산음료를 맛이 찾았어요. 덕분에 허리 사이즈만 계속 늘어났고요. 호호호.”
간신히 배를 가리고 있던 앞치마를 평평하게 잡아당기며 한지숙이 소리 내 웃었다.
박정원 요리전문가가 덩달아 웃으며 자신의 배에 힘을 줬다.
“저도 요리 연구하면서 배가 이렇게 커진 겁니다. 안 믿기시겠지만, 저 원래 날씬했어요.”
“네, 안 믿깁니다.”
전민규의 짧은 대답에 사람들이 모두 큰소리로 웃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던 박정원도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같이 소리 내 웃었다.
“내 허리 사이즈는 잊어버리시고 그럼 시식해볼까요?”
박정원을 시작으로 다른 심사위원들이 시식을 시작했다.
테두리에 뿌려놓은 소스에 고기를 묻힌 후 부추, 양파를 잔뜩 올려 먹었다.
“한지숙 참가자 말대로 느끼함을 제대로 잡아 주는군요. 아주 맛있습니다.”
“네, 같이 먹는 부추와 양파가 고기의 기름기를 쫙 빼주는 느낌입니다. 하나 아쉬운 건 생채소가 올라갔으니까 뭔가 찍어 먹을 소스가 곁들여지면 더 좋을 것 같은데요.”
이정복 대가의 날카로운 지적에 한지숙 참가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집에 가자마자 곁들일 소스를 연구해야겠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서인우의 차례였다.
다진 새우를 이용해 만든 면 위에 불맛을 살린 채소를 올리고 그 위에 육수를 부어 깔끔하면서도 시원한 면 요리를 선보였다.
“이제 서인우 참가자의 요리에 대한 심사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다른 참가자들과 달리 면 요리를 선보였는데요, 유경동 심사위원님. 면은 불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서인우 참가자의 요리를 제일 먼저 심사해야 했던 거 아닌가요?”
전민규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맞습니다. 원래 요리대회에서 심사할 때 면 요리는 빨리 퍼지고 불어날 수 있어서 심사 순서가 아주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 서인우 씨가 만든 요리는 과연 어떤 결과를 보여줄지 저희 심사위원도 기대가 큽니다.”
“아, 그렇군요. 심사위원분들은 다 계획이 있으시군요.”
또 한 번 스튜디오에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서인우 참가자의 요리 설명을 듣겠습니다.”
“이 요리는 저를 이 자리에 서게 해준 제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들어있는 요리입니다. 저희 할머니는 젊어서 국수나 우동, 전 등 밀가루 음식을 아주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그런 할머니가 위암 수술을 하신 후 국수를 너무 드시고 싶어 하셔서 아버지가 오랜 시간 연구 끝에 만들어 낸 요리입니다.”
“밀가루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우동 같은 느낌인데요, 과연 그 맛이 어떨지 정말 궁금합니다.”
요리를 설명하는 서인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이정복 대가가 가장 먼저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스튜디오에 후루룩 면발 올라가는 소리가 절로 군침을 삼키게 했다.
“면이, 이건 면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데요. 면이 아직도 탱글탱글하고 짭조름한 새우 맛이 느껴져 너무 맛있습니다. 게다가 국물이 정말 끝내주네요.”
“어제 술을 안 마신 게 너무 아쉽습니다. 맑은 국물이지만 해장으로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서인우 참가자는 맑은 국물을 참 잘 만드는군요. 좀 전에 말한 대로 이 레시피 정말 욕심납니다. 방송 끝나고 따로 얘기를 좀 나누도록 하죠.”
“이렇게 박정원 요리전문가가 사업 제안을 하는 건가요? 이건 정말 극찬인데요. 서인우 참가자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우가 심사위원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둘러봤다.
그리고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