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김형식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 김원상이 눈치를 실실 보며 작게 이름을 말했다.
“서인우라고...그냥 흉내 좀 내는 어린놈이에요.”
“서인우?”
낯이 익다.
몇 년간 매일같이 보던 서동수의 요리와 똑같은 방법과 모양을 만들어 낸 자의 이름이 서인우란다.
죽은 서동수의 금쪽같은 외아들 이름도 인우였다.
나이도 저 정도 됐을 텐데...
화면에 잡힌 서인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김형식의 동공이 조금 전보다 더 심하게 흔들렸다.
“여보. 갑자기 왜 그래요?”
“아, 내가 아는 사람인가 해서...”
서동수의 장례식장에서 분명 본 얼굴이다.
아들이 나오는 방송이지만, 2차전까지 올라가면 그때나 보겠다고 차갑게 거절했다.
오늘에야 처음 보는 방송에서 아들 김원상보다 눈길을 끄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자기도 모르게 화가 났다.
젊음을 다 바쳐 요리했지만, 항상 친구인 서동수의 그늘에 묻혀 살았다.
어떻게든 그 이름을 지우려고 아등바등하며 3년을 넘게 악착같이 노력했는데, 내 아들과 경쟁하는 놈이 서동수의 아들이라니.
뭐 이런 엿 같은.
속에서부터 열불이 난 김형식의 얼굴이 잘 익은 고구마처럼 붉게 타올랐다.
“아버지가 저런 어린놈을 어떻게 알아요?”
“어? 아, 아니다. 잘 못 본 것 같다. 그건 그렇고….”
당황해 잠시 말을 멈췄던 김형식의 표정이 다시 무섭게 변했다.
“3차전부터는 숨겨놨던 비장의 무기들을 내놓을 거다. 넌 무슨 요리를 내놓을 생각이냐?”
김원상이 눈을 또르르 굴렸다.
사실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무슨 요리든 다 자신 있는 요리일 거고, 무엇보다 3차전에서 [만가복]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경쟁하면 이미 반은 이긴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눈치를 보니 아직 결정도 못 했군.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다른 놈들한테 잡아 먹혀.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몇 개 요리를 놓고 고민 중이라고요. 내가 잡아먹지 절대 잡아먹히지는 않을 거니까 두고 보세요.”
괜히 분위기 좋았다가 서인우 저 어린놈이 나오면서 영 기분을 망쳐놨다.
어린놈이 나이 많은 노인네랑 친하게 지내는 것도, 왠지 이정복 대가가 특히 더 관심을 가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다 맘에 안 들었다.
무엇보다 더 맘에 들지 않는 건 요리 할 때 보여주는 여유였다.
거침없는 중식도 솜씨로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한 태도, 정말 꼴 보기 싫었다.
‘3차전에는 확실하게 실력을 보여줘서 그런 놈은 [만가복] 회장의 아들이자, 제일 인기 많은 마포점의 점장인 나 같은 사람의 발끝도 못 따라온다는 걸 제대로 보여주고 말 거다. 재수 없는 놈.’
김원상이 입을 굳게 다물자 목을 타고 퍼런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았다.
* * *
3차전 녹화를 하루 앞둔 화요일 오전에 인우의 엄마 이지희와 인우 이모가 원룸을 찾았다.
“연락이라도 하고 오시죠? 청소라도 했을 텐데...”
“안 그래도 집은 치우고, 냉장고는 채우고 그러려고 왔어. 걱정하지 마, 저녁 먹기 전에 갈 거야.”
팔을 걷어붙인 인우 이모가 창문을 열자 매서운 찬 바람이 작은 원룸을 가득 채웠다.
“오랜만에 와서 무슨 청소를 한다고 그래요? 내가 맛있는 거 해줄 테니까 편하게 있다가 점심이나 같이 먹어요.”
카디건을 입으며 하는 인우의 말에는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작전 수행하는 사람처럼 인우 이모는 집 안 청소를 인우 엄마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냉장고 정리를 시작했다.
“알았어요. 그럼 나는 점심을 대접하지.”
“꼬리곰탕 끓여 왔는데…. 하긴 뭐 그건 냉장고에 넣어두고 천천히 먹으면 되지. 그래서, 뭐 해줄 건데?”
“오늘 연습하려고 사놓은 채소가 많아요. 가지도 있고, 새우도 있고, 각종 해물도 풍부하고…. 또 냉장고에 양장피도 있는데….”
양장피라는 말에 인우 엄마 이지희의 어깨가 움찔했다.
인우가 몸을 낮춰 엄마의 눈을 바라봤다.
“엄마, 내가 엄마가 제일 좋아했던 아빠 양장피 만들어 줄게. 조금만 기다려요.”
다시 몸을 돌려 묵묵히 냉장고를 정리하는 이지희의 눈에 살짝 고인 눈물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작은 원룸에 모인 세 명이 각자 한 구역씩 차지하고 자신의 업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말 그대로 각개전투였다.
그래봤자 뒤돌면 부딪칠만한 거리였지만.
조리대 앞에 선 인우는 이제 완벽하게 머릿속에 있는 아빠의 레시피를 떠올리며 요리를 시작했다.
-배운 대로 실수 없이 하도록 한다. 실시.
“걱정하지 말라고. 사부.”
인우가 작게 대답하자마자 인우 이모가 큰소리로 물었다.
“뭐라고?”
“아니에요. 요리하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습관이 있어서.”
혼자 있을 때의 습관처럼 입 밖으로 한 말이 들린 모양이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는 바로 채소 손질부터 시작했다.
가지를 넓적하게 벌어지게 잘라 그 틈에 양념한 다진 새우, 부추 등을 넣어 반죽에 묻혀 튀긴 요리와 각종 채소와 해물을 겨자 소스에 버무리는 양장피를 만들어 내놓았다.
꽃 모양으로 담은 채소와 해물에 인우가 직접 양장피 소스를 부어 비비자 인우 이모가 호들갑스럽게 손뼉을 쳤다.
“어머 어머, 이거 완전 형부가 한 거랑 똑같아. 모양도 소스를 직접 비벼주는 것도. 그치 언니?”
인우는 평상시보다 한층 더 어두워진 표정을 짓고 있는 엄마 이지희의 앞접시에 양장피를 덜어 놔주었다.
“엄마, 아빠의 맛이 느껴지나 먹어봐.”
인우가 건넨 젓가락을 잡은 이지희는 입안 가득 양장피를 머금고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큰 눈망울에 이슬이 맺혀있었다.
음식은 많은 것을 담아낸다.
특히 추억이 깃든 음식은 그 추억을 같이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고스란히 전해 준다.
인우는 엄마 이지희의 촉촉한 눈동자에서 아빠와의 추억을 엿본 것 같았다.
드디어 3차전이 열리는 수요일 녹화 날.
전날 갑자기 찾아온 이모와 엄마가 인우에게는 무엇보다 큰 응원이 되었다.
자신감을 회복한 인우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자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만.”
오늘도 역시 일찍 도착했는지, 최만수가 손목을 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3차전은 어떤 과제가 나올지 궁금하군. 지금쯤이면 가장 자신 있는 요리가 대결과제로 나올 법한데….”
“네. 긴장되네요.”
백 명이 넘는 참가자로 시작한 대회가 이제 고작 일곱 명 남았다.
예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정말 멋진 요리를 선보인 사람들이다.
이제는 익숙해진 시작을 알리는 웅장한 음악이 스튜디오에 울려 퍼졌다.
“드디어 3차전이 시작됩니다. 지금쯤이면 시청자 여러분들도 최종 우승자를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을 텐데요. 오늘 있을 3차전에서 확실히 결정하실 수 있을 겁니다.”
카메라가 일곱 명의 참가자 얼굴을 하나씩 비추기 시작했다.
“대결에 앞서 오늘은 간단한 인터뷰를 통해 참가자들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사회자 전민규가 박지훈 참가자 앞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박지훈 참가자. 당신은 누구십니까?”
깨끗하게 닦은 금테 안경을 살짝 올리며 박지훈이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다른 칼을 잡다 3년 전에 요리에 빠져 이 칼을 잡게 된 박지훈입니다.”
“다른 칼이요? 혹시 싸움 이런 건 아니겠죠?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요.”
“한국대학병원 레지던트 2년 차에서 현재 연남동 [오장육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전민규를 비롯해 다른 참가자들의 눈이 동그랗게 치떠졌다.
“자세한 스토리가 궁금한데요. 박지훈 참가자의 자세한 스토리는 3차전을 통과하면 다시 이어집니다.”
전민규의 맛깔나는 진행이 돋보였다.
“다음은 한지숙 참가자인데요. 안녕하세요?”
예선전에서 한숨을 크게 쉬어 참가자들에게 웃음을 안겨줬던 40대로 보이는 여성 참가자였다.
“안녕하세요, 인천 [북경반점] 서당 개 한지숙입니다.”
“서당 개요?”
“네. 태어나보니 할아버지가 인천에서 중화요리 집을 하셨고, 친구들이 놀이터에서 놀 때 저는 할아버지 주방에서 국자 가지고 놀았어요. 그러다가….”
“네, 오늘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한지숙 씨의 남은 스토리도 3차전 통과 후에 듣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참가자들 뿐 아니라 심사위원들까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역시 베테랑 전민규는 방송을 잘 끌고 갔다.
담당 피디의 입꼬리가 한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세 번째로 만나 볼 참가자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원상 참가자.”
김원상의 자신만만한 얼굴이 카메라에 가득했다.
“안녕하십니까? 대한민국 최고의 중화요리 전문점 [만가복]의 마포 지점 점장 김원상입니다.”
“아, 어디서 봤나 했더니…. 그런데, [만가복] 셰프님이 아니고, 점장님이라고요?”
“네, 저희 아버지가 바로...”
“거, 거기까지. 그 뒷얘기는 3차전 통과 후로 남겨놓겠습니다.”
전민규가 급하게 말을 자르자 김원상의 얼굴이 아쉬움으로 일그러졌다.
서둘러 전민규가 자리를 옮겼다.
다음은 최만수의 차례였다.
“네, 이번 대회 최고령자이신 최만수 참가자입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열여섯 살부터 시작해 거의 40년을 넘게 장사만 하다가 10년 전부터 요리도 만들고 장사도 하는 서산에서 온 최만수입니다.”
“그럼 요리를 50대 중반이 넘어서 시작하신 거네요?”
“그렇습니다. 내가 젊어서 꿈이 요리사였는데….”
“죄송합니다. 최만수 참가자. 다른 참가자들처럼 남은 얘기는 3차전 통과하신 후 들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인우는 최만수의 인터뷰를 듣자, 예선전 때 심하게 손을 떨던 모습이 떠올랐다.
늦게 찾은 꿈.
그리고 더 높은 도약을 위한 지금 이 행보가 멋져 보였다.
30대로 보이는 안정훈은 고등학교 때 아르바이트 하면서 곁눈질로 시작해 지금은 강남에 2층짜리 중식당 [만리장성]을 운영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안정훈 다음으로 인터뷰를 한 2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유다인은 인사에 앞서 자신의 손과 팔을 화면에 비췄다.
칼에 베이고 불에 덴 상처가 얼마나 힘들게 이 자리에 왔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유다인 또한 한지숙 참가자처럼 중화요리 계에서 보기 힘든 여성 요리사였다.
인우는 희고 가는 팔에 난 상처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서인우 참가자 차례인데요. 마지막이라 화가 났나요? 인상을 쓰고 있는 것 같은데요?”
-야, 네 차례야. 인상 펴라. 내가 고기 필 때처럼 두드리기 전에.
중식도의 말에 정신을 차리자 카메라가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다른 분들 사연이 인상적이어서 너무 빠져있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4년 전에는 철없는 대학생, 작년까지는 군바리, 지금은 아버지 이름을 찾기 위해 요리에 목숨을 건 서인우입니다.”
전민규가 인우의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아버지 이름을 찾기 위해 요리를 하신다고요? 아버지가 누구신데요?”
“그건…. 3차전 통과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역시 젊은 사람이라 방송을 아는군요. 그럼 서인우 씨의 남은 스토리도 오늘 대결에서 통과한 후에 듣도록 하겠습니다.”
심사위원석에 앉아 참가자들의 인터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이정복 대가가 눈에 한껏 힘을 주며 인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의 참가자 김원상 또한 아버지 김형식이 서인우 방송을 봤을 때의 눈빛을 떠올리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딘지 살벌하고 기분 나쁜 눈빛이 아무것도 모르고 대결을 준비하고 있는 인우의 뒤통수에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