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텔레비전에 나오는 거 너 맞지?”
“맞다니까.”
오후 수업 끝나자마자 맥주를 사서 달려온 친구 준형이 쉴 새 없이 광고에서 본 장면을 흉내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예선전이 끝나고 본선까지 일주일 동안 TCM 방송국에서는 대대적인 광고를 시작했다.
본선까지 카운트 다운을 해가면서 예선전을 치른 장면들이 멋들어지게 편집돼서 전파를 탔다.
물론 서인우가 처음 칼질을 선보였을 때 놀라는 심사위원들의 표정도 놓치지 않고 찍어 고스란히 방송에 내보냈다.
핸드폰으로 예고편을 다시 한번 보던 준형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너 칼질 잘하는지는 알았지만, 완전 손놀림이 그냥 기계더라. 아니, 기계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더라. 대박.”
중식도의 정체를 알게 되면 저 턱은 결국 밑으로 빠져 버리겠지...
인우는 사정없이 아래로 향한 준형의 턱이 정말이지 톡 빠져 버릴까 걱정됐다.
“입 좀 닫아라. 그러다 턱 빠지겠다.”
잠시 손등으로 씩 닦던 준형의 입이 다시 벌어졌다.
“우리 과 애들도 지금 난리 났어. 플래카드 만들어 방송국에 가서 너 응원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지 마라. 절대. 나 그런 거 딱 질색인 거 알지?”
“알았어, 인마. 혹시라도 결승전까지 나가게 되면 그때는 말리기 없기다.”
“결승전? 솔직히 욕심은 나지만 전국의 고수란 고수들은 다 모였을 거다. 쉽지 않을 거야.”
준형이 마시던 맥주 캔을 내려놓고 인우의 등을 툭 쳤다.
“왜?”
“1차전이 짬뽕이라며?”
“응.”
“1차에 무조건 통과해야 결승을 꿈이라도 꿀 거 아니야? 내가 술 취하지 않고 멀쩡한 정신으로 냉정하게 평가해 줄게.”
인우가 피식 웃음을 내보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먹고 싶다고 해라.”
“진짜 평가해 준다니까, 물론 먹고 싶기도 하고.”
원룸이라 주방에서 요리하는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경쾌한 도마소리와 코를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
잠시 후 인우가 두 개의 짬뽕을 쟁반에 담아 다가왔다.
“어? 뭐야? 왜 두 개가 달라? 넌 백 짬뽕이냐?”
“둘 다 아빠의 레시피다. 사실 [서풍]에서는 둘 다 인기 메뉴였지. 지금 나도 고민 중이고.”
“그래? 난 백 짬뽕은 못 먹어봤었는데…. 잘됐다.”
준형이 조심스럽게 백 짬뽕 국물을 먹어 보았다.
“헉!”
눈만 깜빡거리던 준형이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국물을 입에 넣었다.
“이, 이거 뭐냐? 인간적으로 너무 맛있는 거 아니냐?”
“아쉬운 대로 토치로 불맛을 낸 거다. 아빠의 맛을 정확히 내려면 여기 화력으로는 안 되거든.”
“그래? 맛있는데…. 그럼 넌 연습을 어떻게 해?”
“내일부터는 매일 아르바이트 하는 아빠 친구 가게에서 하기로 했어.”
“잘됐다, 야.”
준형은 건성으로 대답을 날리고는 후루룩 소리가 끊이지 않게 먹기 바빴다.
이따금 고개를 들어 눈만 깜빡이고는 두 개의 그릇을 번갈아 가며 또다시 먹어댔다.
“아저씨네 주방장 형이 이 대회도 알려줬는데, 손목을 다쳐서 못 나가게 됐어. 나라도 꼭 열심히 해서 우승하라고 주방 한쪽을 비워줬다.”
남은 국물을 그릇째 들이마신 준형이 제대로 듣긴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도 안됐네. 뭐, 기회는 또 있으니까. 그나저나 진짜 맛있다.”
“어때?”
“난 무조건 백 짬뽕. 이런 짬뽕이 있는 줄 알았으면 매일같이 먹었을 텐데... 색만 하얗지, 얼큰하고 시원한 게 정말 해장으로 끝내주겠다.”
“그럼 홍짬뽕은 별로?”
“아니 아니야. 홍짬뽕도 너무 맛있는데…. 그냥 홍짬뽕 해라. 무난한 게 최고지. 익숙하고.”
인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너 최소한 밥값은 해야지? 이랬다저랬다 할래?”
“아이씨, 지난주 본 면접보다 더 어렵다. 짜장면이냐 짬뽕이냐도 결정하기 힘든데...왜 나한테 이런 시련을 주냐?”
“너를 믿은 내가 바보지.”
“그럼 다시....백짬뽕?”
“됐다.”
“그럼...동전 던지기?”
“네가 던져질 수가 있다.”
갑자기 입을 꾹 다문 준형이 5초 후 웃음을 터트렸다.
매콤하고 시원한 해물 냄새와 준형과 인우의 웃음소리가 한 데 섞여 화끈한 열기로 방안이 가득했다.
* * *
두 가지의 짬뽕만 죽어라 연습하며 일주일이 지났다.
드디어 본선 1차전이 열리는 날.
30분이나 일찍 방송국에 도착한 인우는 그보다 먼저 와있는 사람을 보고 서서히 다가갔다.
예선전에서 인우의 앞번호였던 77번 최만수.
아마도 본선 참가자 중 최고령자일듯한 그의 모습이 보이자 인우는 걸음에 속도를 내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일찍 나오셨네요?”
“자네도 일찍 왔구만. 난 원래 무슨 약속이든 1시간은 먼저 가는 게 습관이라서.”
“지난번 보여주신 수타면 솜씨 정말 멋졌습니다.”
“자네 덕에 안 떨어서 간신히 붙었수.”
“그 실력을 못 보여주셨으면 여기 방송국 손해지요. 훌륭했습니다.”
하나둘씩 참가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튜디오는 지난번 예선 때보다 더 화려하게 변해 있었다.
검은색 휘장에 커다란 금색 글씨로 [중화요리 최고의 고수를 찾아서] 라는 대회명이 적혀있었다.
참가자 서른 명의 이름도 그 아래 작은 깃발 위에 적혀 휘날리고 있었다.
드디어 본선의 막이 올랐다.
웅장한 음악 소리와 함께 예선전의 사회를 맡았던 아나운서가 무대 중앙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드디어 [중화요리 최고의 고수를 찾아서]의 화려한 막이 올랐습니다. 안녕하세요. 전민규입니다.”
참가자들이 박수를 보냈다.
“네, 예선전 때 강렬한 인상을 안겨주신 분들 얼굴이 많이 보이는데요, 오늘은 또 어떤 멋진 요리를 보여주실지 벌써 기대가 됩니다.”
사회자 전민규가 참가자들을 천천히 둘러보자, 여러 카메라가 훅 가까이 들어와 긴장된 참가자들의 얼굴을 근접 촬영하기 시작했다.
몇몇은 여유 있게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몇몇은 쑥스러운 웃음을 웃어 보이기도 했다.
인우는 나름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그럼 예선전부터 심사를 맡아주신 심사위원분들을 무대로 모시겠습니다.”
사회자 전민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경쾌한 음악이 스튜디오에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예선전 심사를 맡았던 유경동 대가와 이정복 대가, 나영희 요리 평론가와 마지막으로 박정원 요리전문가가 무대로 모습을 나타냈다.
예선전 때와 같은 사회자의 소개가 끝나고 그들이 심사위원석으로 돌아가자 다시 음악이 웅장하게 바뀌었다.
“본선 1차전은 예고해 드린 대로 짬뽕입니다. 여기 모인 서른 명의 참가자는 열 명씩 총 세 개의 조로 나뉘어 대결하게 됩니다.”
전민규의 설명에 참가자들이 웅성거리며 옆 사람을 살폈다.
예선전에서 같은 조였던 사람들과 서로 다른 조였던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지난번 예선 때처럼 한 조에서 다섯 명만이 2차전에 나갈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러니, 죽음의 조에 걸리면 안 되겠죠?”
참가자들은 마음속으로 저 사람만 같은 조가 안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듯 서로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인우는 누가 같은 조가 될지 그저 호기심에 찬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 TCM 방송국은 어디까지나 공정성을 중시한다는 거 다들 아시죠? 그래서 여기 참가자의 이름이 적힌 깃발을 준비했습니다. 각자 자신의 이름이 적힌 깃발을 가져가시기를 바랍니다.”
어리둥절한 참가자들이 각자 깃발을 가져가자 사회자 전민규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그럼, 여기 준비해 놓은 1부터 3까지 적혀있는 세 개의 통 중 원하는 곳에 깃발을 넣어주세요. 깃발이 들어갈 때마다 숫자가 찍히게 됩니다. 단 숫자 10이 된 곳에는 깃발을 넣을 수 없습니다.”
결국 조 선택은 본인 스스로 하라는 거였다.
방송국의 어떤 조작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참가자들이 분주하게 깃발을 넣자 통 위에 있는 전광판에 빠른 속도로 숫자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왕 하는 거 빨리 끝내는 게 낫지.’
인우는 1번 통에 자신의 깃발을 넣었다.
인우보다 빠른 속도로 깃발을 들고 달려간 김원상은 3번 통을 선택했다.
“네, 이렇게 조 편성이 끝났습니다. 그럼 바로 1차전 대결과제를 공개하겠습니다.”
짬뽕.
대회명이 적힌 화려한 휘장 옆으로 흰색 휘장이 펼쳐졌다.
“예고한 대로 각자 준비한 비밀 병기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여기에 놓인 재료만 이용해서 최고의 요리를 만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참가자들은 꼭꼭 숨겨놓은 자신만의 비밀 레시피가 들어있는 가방을 쳐다보며 열의에 찬 눈빛을 보였다.
“그럼 본격적인 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순서는 3,2,1입니다. 3조 참가자분들은 조리대로 자리를 옮겨 주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1이 먼저일 거로 생각했던 참가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너무 뻔하면 재미없잖아요?”
사회자 전민규가 능글맞은 웃음을 보이며 말을 덧붙였다.
‘빨리 끝내고 긴장을 좀 풀려고 했는데…. 예상 밖이군.’
인우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대기자석에 앉아 조리대로 이동하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김원상은 잔뜩 인상을 쓰며 조리대로 이동하다 그의 얼굴을 카메라가 쫓아가자 그새 표정을 바꾸며 손 브이를 만들어 보였다.
각자 본인의 칼을 펼치고 비밀 레시피가 담겨있는 가방을 옆에 놓고는 사회자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예선전 때 수타면을 멋진 퍼포먼스와 함께 보여주었던 박지훈도 금테 안경을 손으로 올리며 주위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자, 그럼 앞에 놓인 재료와 자신의 비밀 레시피를 맘껏 활용해서 최고의 짬뽕을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모든 재료를 반드시 다 사용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각자 원하는 재료를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응용해주시길 바라며 지금부터 60분 안에 요리를 완성해야 합니다.”
참가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긴장된 눈으로 정면에 놓인 커다란 시계를 쳐다봤다.
사회자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와 동시에 여기저기서 경쾌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혹시 경마장인가요? 이 소리는 언제 들어도 듣기 좋습니다.”
사회자의 농담에 웃음을 터트리는 대기자석과 요리를 시작한 조리대에 선 참가자들의 표정이 확연히 달랐다.
심사위원들이 요리하는 과정을 꼼꼼히 체크하며 질문을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카메라가 그들을 쫓아가며 방송 분량을 뽑아대기 바빴다.
웍에 채소를 볶는 걸 찍던 카메라맨이 갑자기 솟아오르는 불길에 놀라 뒷걸음질 치는 걸 또 다른 카메라가 놓치지 않고 찍었다.
스튜디오는 금세 매콤한 불 향이 코를 자극했다.
-긴장되냐?
슬며시 중식도가 말을 걸어왔다.
‘다들 자신만의 요리를 선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 물론 나도 그럴 거다.’
-나한테 특훈을 받았다는 영광스러운 사실만 잊지 마라.
티 나지 않게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 인우는 참가자 한 명에게 카메라가 몰리자 그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수타면 퍼포먼스를 멋지게 펼쳤던 박지훈이 이번에는 한쪽 입꼬리를 잔뜩 올린 채 화려한 불 쇼를 선보였다.
웍을 만지는 손동작과 그 뒤에 이어지는 면을 뽑는 행동까지 남들보다 유독 크고 화려했다.
“박지훈 씨가 멋진 불 쇼를 선보이는데요, 곳곳에서 불이 피어올라 마치 불꽃놀이라도 구경하러 온 것 같습니다.”
사회자 전민규의 설명이 있었다.
드디어 제한 시간이 다 되고 모두 완성된 요리를 앞에 둔 채 긴장된 표정으로 심사위원을 바라봤다.
“자, 그럼 심사위원분들의 심사가 있겠습니다.”
“해물이 너무 질깁니다. 시간 조절에 실패한 것 같군요.”
“면이 안 익었는데, 알고 있습니까?”
“정말 매콤하면서 시원한 맛이 일품입니다.”
심사위원의 한마디 한마디에 참가자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3조에서 김원상과 박지훈을 포함해 다섯 명이 2차전의 참가 자격을 얻었다.
2조에서는 예선전에서 큰 웃음을 주었던 한지숙을 포함해 다섯 명이 합격 통보를 받았다.
이제 서인우가 포함된 1조가 조리대 앞에 서서 요리를 준비했다.
‘사부, 우리 잘해보자.’
-하던 대로만 해. 쫄아서 실수하지 말고.
‘사부 목소리가 더 떨리는데?’
-티 나냐?
사회자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스튜디오에 울렸다.
인우는 고민 끝에 선택한 육수를 비장의 레시피로 준비했다.
중식도의 화려한 칼솜씨는 이번에도 역시 카메라맨들의 시선을 끌었다.
인우의 큰 키와 기다랗고 깊은 눈, 오뚝한 콧날까지 합한 시너지 효과를 노리는 듯했다.
인우의 옆에서 또 한 명의 참가자 최만수 또한 카메라 세례를 받기 바빴다.
자연스러운 웍의 움직임, 면을 뽑는 동작들과 주름이 잡힌 얼굴, 손을 번갈아 찍는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1조의 요리가 끝났다.
심사위원들의 냉정한 평가만이 남아있었다.
드디어 심사위원들이 서인우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때 인우의 짬뽕을 맛본 이정복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져 있었다.
“이럴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