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서류와 면접을 통해 깐깐하게 선발된 사람들만 백 명이 넘었다.
그중 1차전에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은 단 서른 명.
1차전 메뉴는 짬뽕으로 정해졌지만, 예선전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은 채 예선 당일이 불쑥 찾아왔다.
인우는 이모, 이모부의 기대. 친구 준형의 놀라움을 뒤로하고 예선전이 펼쳐질 방송국을 찾았다.
유치원 다닐 적엔가 한 번 와 본 방송국에 다시 올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예선전은 실제 방송으로 나가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저 짤막하게 찍어 1차전이 시작하기 전에 광고영상으로 사용할 것이라는 게 방송국 놈들의 설명이었다.
상관없었다.
무엇을 하든 예선탈락은 하지 않을 것이니까.
음식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주로 찍었던 스튜디오는 실제 주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모든 시설이 완벽했다.
한 번에 열 명이 넘게 동시에 진행할 수 있게 세팅되어 있었다.
화려한 조명들과 스텝들만으로도 공연장처럼 정신이 없었다.
그 속에서 사회자인 듯 무대 중앙에 나선 사람의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군대에서 동기들이 목놓아 응원했던 걸그룹을 뽑는 대회, 바로 그 대회에서 봤던 아나운서 출신 사회자였다.
텔레비전으로 보던 사람을 직접 보니 갑자기 방송이라는 게 확 실감이 났다.
“[중화요리 최고의 고수를 찾아서]를 향한 멋진 도전을 시작합니다.”
사회자 전민규의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음성이 스튜디오에 울려 퍼졌다.
실제 방송으로는 안 나간다고 들었는데, 여기저기에서 카메라가 정신없이 사회자를 찍어댔다.
마치 유명한 공연을 보기 위해 방청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저 무대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우승을 거머쥐며 전 국민이 보는 방송에서 아빠의 이름을 말할 수 있을까?
인우의 심장이 심하게 방망이질을 시작했다.
다시 사회자의 음성이 들렸다.
“중화요리는 속도죠. 예선전은 두 차례로 진행됩니다. 우선 첫 번째로는 모든 요리의 기본인 능숙한 칼솜씨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칼솜씨라고?
이거 너무 쉽게 가는 거 아닌가?
인우는 가방에 얌전히 놓여있을 중식도를 떠올리며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러 가지 채소를 비롯해서, 각종 고기와 해산물들을 능숙하게 손질하는 경연이었다.
중식 칼질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편(片 저미기), 조(絛 막대 모양으로 썰기), 사(絲 채 썰기), 정(丁 깍뚝 썰기), 마지막으로 용니 (茸泥 다지기) 이렇게 다섯 가지 방법이 테스트였다.
각자 앞에 놓인 재료들을 정해진 칼질법에 따라 정확하고 빠르게 손질하는 것으로 기본기를 보겠다는 거였다.
가장 중요한 건 일정한 크기와 모양, 그리고 스피드였다.
그 속에서 각 재료에 대한 이해와 요리에 대한 자세를 본다는 것이 사회자가 덧붙인 설명이었다.
예선전에 참가한 셰프들 모두 소중하게 여기는 자신들만의 조리용 칼을 꺼내 들었다.
열 명씩 정해진 순서에 따라 예선전이 진행된다.
서인우는 78번이라는 번호표를 목에 걸고 조명이 비추지 않는 대기자석에 앉아 있었다.
그보다 세 줄 앞에 36번 번호표를 걸고 있는 김원상이 지루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심사위원의 소개가 시작됐다.
대한민국 중식의 소위 문파를 만들어 낸 유경동 대가가 제일 먼저 소개됐다.
다음으로 퓨전 중식으로 유명한 이정복 대가가 소개되자 예선을 앞두고 긴장돼있던 대기자석이 술렁거렸다.
인우도 익히 잘 아는 얼굴이었다.
인우의 아빠 서동수의 장례식장에서 밤늦게까지 혼자 남아 술을 마시며 자리를 지켰었다.
세 번째로 소개된 심사위원은 독설로 악명높은 음식 평론가 나영희였다.
뭔가 실수가 발견되면 가차 없는 독설을 퍼부어 결국 참가자가 울음을 터트리거나 대회를 포기하게 만들기로 유명했다.
마지막 심사위원은 이미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으로 전 국민에게 얼굴이 알려진 박정원이었다.
사회자는 그를 요리전문가 겸 사업가로 소개했다.
하긴 전국에 그의 이름이 달린 음식점이 없는 곳이 없으니…. 사업가라고 소개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았다.
하나같이 쟁쟁한 심사위원들을 보니 대회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알 것 같았다.
그에 대한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사회자는 좀 더 격양된 목소리로 대회 우승자의 특전에 관해 설명했다.
“이번 대회의 최종 우승자 일인에게는 이미 알려진 것처럼 1억 원의 상금과 SUV 자동차 한 대가 주어집니다. 요리라고는 라면밖에 못 만드는 저도 참가하고 싶을 정도로 아주 대단한 상금이 걸려있으니 참가자 여러분들 모두 최대한 기량을 발휘해주시길 바랍니다.”
사회자의 멘트가 끝남과 동시에 웅장한 음악 소리가 온 스튜디오에 울려 퍼졌다.
쿵쿵 울리는 음악 소리에 따라 인우의 심장도 빨라졌다.
꾸준히 해왔던 요리였지만, 중식도를 발견한 뒤로 하루도 쉬지 않고 연구하고 연습했다.
맛있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반드시 [서풍]의 맛을 되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오늘 이 자리에 섰다.
드디어 첫 조의 예선전이 시작됐다.
가방에서 중식도를 조심스럽게 꺼내든 인우는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속으로 말했다.
‘이번이 정말 나를 위해 실력을 발휘해 줄 기회군. 사부. 잘 부탁해.’
-첫 번째 예선전은 너한테 행운이네. 하지만, 이런 행운이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명심하라고.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능숙하게 채소를 손질해 보였다.
여기저기서 경쾌한 도마 소리가 들렸다.
열 명의 참가자들이 정해진 대로 재료를 써는 동안 심사위원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띵동.
모든 재료를 다 손질한 사람은 앞에 놓인 벨을 눌렀고, 심사위원들은 재빨리 크기와 모양을 심사했다.
심사위원들의 손짓에 따라 참가자들 위에 놓인 전광판에 1부터 5까지 번호가 반짝였다.
다들 의아해하는 속에서 사회자의 설명이 이어졌다.
“지금 참가자들 머리 위쪽으로 보이는 전광판에 1부터 5까지 숫자가 반짝이고 있습니다. 보이시나요?”
“네.”
대기자석에서 단체로 쏟아내는 함성이 들렸다.
“번호를 받지 못한 다섯 분은 안타깝지만, 앞치마를 벗고 스튜디오를 나가 주시길 바랍니다.”
그 사이 마이크를 잡은 이정복 대가의 차분하지만 강인함이 묻어있는 음성이 들렸다.
“음식을 하는 데 있어서 속도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냥 중화요리 전문가를 뽑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고수를 찾는 겁니다. 빠르고 정확한 칼질이 기본 중의 기본 조건입니다.”
황당해하며 화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던 몇몇 참가자의 고개가 숙어졌다.
예선전은 계속되었다.
비장감마저 도는 스튜디오는 참가자들의 열정 가득한 눈빛으로 이미 과열된 상태였다.
사회자가 김원상이 속해있는 조의 시작을 알렸다.
앞에서 줄줄이 탈락해 스튜디오를 나가는 모습을 보며 잠시 긴장한듯했던 김원상은 제대로 실력 발휘도 하지 못하고 떨어질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고등학교 입학하면서부터 아버지한테 맞아가며 배운 칼질이다.
한때는 좋아했던 요리지만, [만가복]만 차지하면 절대 칼을 잡지 않으리라 맘먹고 오늘까지 왔다.
그 목표를 위해서는 반드시 이번 대회에서 우승해야만 했다.
머리 위에 숫자가 반짝이자 주먹을 움켜쥐고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앞의 조가 끝나고 나면 드디어 인우가 속한 조가 시작된다.
인우 앞에 77번을 목에 걸고 있는 족히 칠십은 되어 보이는 참가자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보였다.
“어르신. 떨지 마세요. 손에 힘 딱 주고 파이팅 하세요.”
다른 사람 일에 잘 참견하지 않는 인우지만, 아버지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 어르신이 연신 마른침을 삼키며 떠는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고마워요. 내가 이런 대회는 처음이라.”
77번 참가자 최만수는 눈가에 주름을 만들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에 인우도 답이라도 하듯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시작음과 동시에 인우의 손에 들려있는 중식도는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였다.
심사위원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보였다.
최근 몇 년 힘들게만 살아온 인우에게 이렇게 거저 얻어지는 일이 생겼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아주 우습게 첫 번째 예선전을 통과했다.
총 120명으로 시작된 첫 번째 예선전은 절반의 탈락으로 60명만 남게 되었다.
“와우. 정말 긴장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역시 내가 낄 곳은 아니구나 하는 반성을 하게 만드는 시간이기도 했구요.”
사회자의 말에 조금이나마 긴장이 풀린 참가자들이 하나씩 웃기 시작했다.
“다들 빨리 끝내고 집에 돌아가고 싶으시죠? 그래서 제가 두 번째 예선전을 빨리 알려드리려 합니다.”
참가자 대기석 어딘가에서 한숨 소리가 크게 들렸다.
마지막 조에서 합격한 4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에게로 모든 시선이 모였다.
“이제 막 첫 번째 테스트 끝냈는데, 바로 두 번째 테스트한다고 하니 한숨이 나오죠? 나도 시키는 대로 대본 읽는 겁니다. 내가 하라고 한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저 미워하지 마세요.”
사회자의 넉살에 다시금 웃음소리가 스튜디오에 울렸다.
“그럼 두 번째 테스트 주제를 소개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준비 요원들이 손에 뭔가를 들고 와서 열 개의 조리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스튜디오 대형 화면에 심사위원으로 나온 유경동, 이정복 대가의 수타면 만드는 장면이 빠르게 지나갔다.
“자, 눈치채셨나요? 맞습니다. 두 번째 주제는 수타면입니다. 단, 예선전이니만큼 면 반죽은 같은 조건입니다. 누가 더 빠르고 가늘게 면을 뽑아내는지를 보는 시합입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첫 번째 테스트에서 가장 빨리 끝냈던 인우 또래로 보이는 박지훈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모습에 카메라가 근접 촬영을 하는듯했다.
그것 또한 전혀 의식하지 않은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서인우 또한 자신이 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수타면? 그거라면 나도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지.’
-다 이 사부님이 밤낮으로 훈련시킨 결과 아니겠냐?
‘그렇지, 다 사부 덕이지. 아빠의 레시피를 끝까지 안 가르쳐 준 덕에 팔목이 부러지라고 연습했으니까.’
-이거 칭찬이지? 어째 가시가 있는 것 같은데?
첫 번째 예선 1조와 2조에서 살아남은 열 명이 다시 한 조가 되어 조리대 앞에 섰다.
똑같은 조건의 반죽으로 수타면을 뽑는 대결이다.
결국 이번에도 기본기를 테스트하겠다는 거다.
좀 전에 자신감을 어필했던 박지훈은 시작과 함께 화려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손을 높이 올려 밀가루를 흩뿌린 후, 큰 키에 기다란 팔을 이용해 최대한 길게 면을 늘어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빠른 속도로 툭 치고는 부드럽게 면을 꼬아 다시 툭.
순식간에 길고 가느다란 면을 뽑아낸 박지훈은 이번에도 제일 먼저 완성 벨을 울렸다.
심사위원들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수타면은 처음인지 당황하는 사람도 몇 몇 보였다.
또한 할 줄은 알지만 능숙하지 않아 결국 완성을 못한 사람도 있었다.
이번에도 머리 위에 숫자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심사위원 유경동 대가가 마이크를 잡았다.
“면은 기계가 뽑으면 되는데 왜 이걸 테스트로 하느냐고 억울해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수타면 하나 뽑지 못한다면 과연 중화요리의 고수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저는 열다섯 살에 처음 요리를 배우면서 5년 동안 이 손으로 면을 만들고 뽑는 것만 연습했습니다.”
참가자 전원이 유경동 대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물론 면 반죽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본선에서는 참가자가 직접 면을 만들어와서 대결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은 아주 기본기만 본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유경동의 말이 끝나자 옆에 앉아서 듣고 있던 나영희 평론가가 마이크를 잡았다.
“제가 한마디 덧붙이자면 오늘 떨어진 참가자들은 다시 말해 기본도 안된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조용히 스튜디오를 나가 주세요.”
찬바람이 싸늘하게...
스튜디오에 갑자기 북풍이 몰아쳤다.
번호를 받지 못한 참가자들이 앞다투어 스튜디오를 빠져나갔다.
다음을 준비하고 있는 참가자들의 얼굴이 몇 배는 더 긴장된 듯 보였다.
-인우야. 나 저 여자 무셔. 나 좀 꼭 안아줘.
‘난 맘에 드는데? 다 맞는 소리지. 뭐든 기본이 제일 중요하지. 나랑 처음 만났을 때 누구도 어마어마한 무를 썰면서 기본기를 다지라고 하지 않았나?’
-누구? 여보세요? 어디?
인우는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피식 웃다가 바로 표정 관리를 했다.
김원상도 서인우도 거뜬하게 예선전을 통과했다.
일주일 후 드디어 서른 명의 칼잡이들로 구성된 본격적인 요리 경연의 서막이 열린다.
짬뽕, 어디까지 먹어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