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인우는 최대한 기억을 살려 보려고 애를 썼다.
“어려운데…. 지금도 맛은 있어. 그런데 아빠가 해줬을 때 그 맛하고 아주 미세하게 달라.”
중식도는 인우의 눈앞에 멈춰서 한 바퀴 크게 돌았다.
-다시 한번 먹어보고 전에 먹어봤던 기억과 네 혀의 미각을 다 깨워봐.
인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골고루 섞었다.
소스를 잘 묻혀서 한 젓가락 먹어 보았다.
그리고는….
“아, 눈물, 콧물!”
-네 아빠가 열심히 하긴 했지만, 요리에 눈물 콧물을 쏟지는 않았는데.
“아니 그게 아니고 겨자, 겨자가 부족해. 내가 소스를 많이 묻혀서 먹다가 눈물 콧물이 다 났었거든.”
-어쭈, 제법인데. [서풍]의 양장피는 겨자소스를 따로 내주지 않고 네 아빠가 개발한 특별한 소스를 굴 소스와 함께 볶아서 항상 같은 맛을 냈지.
인우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었을 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사부 뭐해?”
-응?
“다시 만들어야지.”
-아, 오늘도 잠은 다 잤네.
* * *
밤새 눈이 내린 골목은 군데군데 얼어 있어 걷는 사람마다 아슬아슬한 게 상당히 미끄러웠다.
[양자강]문을 열고 들어간 인우는 따뜻한 온기에 얼었던 볼이 녹는 것 같았다.
“밖이 상당히 춥지?”
“네, 올해는 눈도 자주 오네요.”
“그래서 장사가 더 잘되니 나야 좋지.”
“네?”
“사람들이 눈이나 비가 오면 더 짜장면이나 짬뽕을 먹고 싶어 하지. 넌 안 그러냐?”
“아, 듣고 보니 그렇네요. 제가 요즘은 정신이 없어서 생각도 못 했어요.”
인우가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람들 심리가 다 똑같아.”
“아저씨, 오늘 제가 요리하나 해봐도 될까요? 아저씨한테 꼭 평가를 받고 싶은데….”
“그래? 그럼 오늘 저녁은 우리 인우가 해준 요리로 먹어봐야겠다.”
“네. 오후 바쁜 시간 좀 지나면 한 번 해볼게요.”
인우는 여느 때처럼 홀 정리부터 시작했다.
테이블도 한 번씩 더 닦고, 수저 세트도 케이스에 하나하나 넣었다.
주문 전화가 오자 재빠르게 음식을 포장해 나갔다.
“눈길이라 미끄러우니 조심해서 다녀와!”
인우의 뒷모습을 보며 최영만이 소리쳤다.
인우가 평상시보다 더 오래 돌아오지 않자 최영만이 자꾸 문을 열어 밖을 확인했다.
막 전화를 하려는데 문을 열고 인우가 들어왔다.
두꺼운 패딩 왼쪽 팔에서 시커멓게 더러워진 솜이 밖으로 나와 있는 모습에 최영만은 기겁하며 인우의 몸을 살폈다.
“너 넘어졌냐?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안 다쳤어요. 패딩이 두꺼워서 옷만 찢어졌어요. 배달하고 돌아오다 넘어져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웃고 있는 인우를 보며 최영만은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팔다리를 들어보라며 난리를 쳤다.
인우는 패딩을 벗고는 일부러 더 팔다리를 심하게 흔들어 보였다.
왼쪽 손등이 시커멓게 쓸려서 피가 조금씩 나고 있었다.
“너 손에서 피나잖아?”
“아, 이건 넘어지면서 살짝 긁힌 겁니다. 다친 것도 아니에요.”
최영만은 자기가 다친 것처럼 잔뜩 얼굴을 구기고 수건에 물을 묻혀 상처를 닦고 약을 발라 주었다.
인우는 다시 아무렇지 않게 홀을 정리하고 음식 서빙을 하다가 또 배달 주문이 오면 배달을 했다.
한바탕 불이 붙은 것처럼 정신없던 식당은 이제 두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만이 남아있었다.
인우는 주방에 들어가 아빠의 양장피를 연습한 대로 만들었다.
물론 중식도를 챙겨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저씨, 드셔 보세요.”
최영만은 인우가 섞어주는 접시를 한참을 쳐다보더니 조심스럽게 한 젓가락 먹어 보았다.
“너…. 너 이 녀석. 정말 동수의 맛을 내는구나!”
“저 정말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그래서 아저씨한테 꼭 평가를 받고 싶었어요.”
최영만은 인우의 손을 잡고 감동에 벅차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처음에 네가 접시를 내왔을 때 모양을 보고 놀랐는데, 이렇게 맛까지 똑같을 줄이야. 이제 준비가 다 된 것 같구나.”
“네, 내년에는 작게 시작해 보려고 해요.”
최영만은 다시 한번 먹고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여기 일은 이번 달만 하고 끝내도록 하고, 내가 오늘, 네 월급 통장에 돈을 좀 넣었다.”“네?”
“많지는 않지만, 도움이 됐으면 좋겠구나.”
“아니에요. 지금까지 도움 주신 거로 충분합니다.”
최영만이 갑자기 바지를 올려 다리를 인우 쪽으로 내밀었다.
“여기 수술 자국 보이지?”
“네. 어쩌다가...”
“우리 매달 있는 산행에서 내가 다쳤을 때 네 아빠가 날 업고 병원까지 데리고 갔다. 안 그랬으면 난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지. 벌써 10년도 넘은 일이네.”
최영만은 다시 바지를 내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아빠의 가게를 잇겠다고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실 이 가게를 팔아서라도 너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야, 그러니 그 돈만이라도 받아라.”
“그래도 그건...”최영만은 인상을 쓰며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나랑 연 끊으려면 다시 돌려보내고!”
“아, 아저씨.”
어쩔 줄을 몰라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뒤 인우는 최영만의 굳은 표정을 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성공하는 거로 보답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되는 거야.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하려 하는데...”
“네?”
“이왕 이 길로 나서기로 마음먹었으면 젊은 패기를 보여줘 봐. 이거..”
최영만이 주머니 안쪽에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우리 가게 안복동 셰프가 보고 있길래 내가 한 장 얻어왔다. 이거 한 번 나가보면 어떠냐?”
“방송에서 하는 요리 대결이잖아요? 전국의 중화요리 고수들이 다 나올 텐데….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방금 자신 있다면서? 너만 [서풍]을 잇겠다고 떠들어대면 누가 인정해준다더냐?”
인우의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가 퍽 소리를 내며 박히는 것 같았다.
세상 사람들에게 [서풍]을 이을 자격을 인정받는 자리.
이 도전이 시작이다.
“아저씨. 해볼게요. 아니, 꼭 도전해서 인정받을 겁니다.”
최영만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본사 건물에 오랜만에 들른 김원상은 회장실 앞에서 옷매무새를 다시 점검하고 노크를 했다.
“아버지, 저 왔어요.”
김형식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매서운 눈으로 김원상을 노려봤다.
“회사다. 호칭 똑바로 해!”
“네, 회장님.”
긴 테이블을 앞에 놓고 김형식의 왼편으로 앉은 김원상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이번 달 마포지점 매출이 지날 달 대비 2.5배나 늘었습니다. 여기 보고서 한번 보시라고.”
김형식은 김원상을 힐끗 한 번 쳐다보더니 바로 시선을 서류로 옮겼다.
“이번에 새로 온 셰프가 실력이 좋다면서?”
“네, 차은석이라고 그 유명한 이정복 중화요리 대가의 수제자입니다.”
“그자가 왔다고 요리 연습을 게을리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네가 잘해야 결국 셰프들도 네 입맛에 맞게 다룰 수 있는 거야.”
“항상 열심히 연습하고 있습니다.”
“그 셰프놈 몸값에 얼마를 썼는데, 이번 달 매출 좀 올랐다고 신이 나서는…. 좀 멀리 보란 말이야.”
김원상은 칭찬 한 번 하지 않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일부러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지난달에 스카우트 해와서 이번 달 매출부터 보여주고 있으니 안심하시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제 시작이란 말입니다. 두고 보세요.”
김형식은 고개를 들어 원상을 한참 쳐다봤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 내가 한 번 두고 보지. 여러 번 말하지만, 이 회사는 능력 있는 자가 차지할 거야. 유일한 아들이라고 네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란 말이다. 알아들어?”
원상은 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것을 꾹꾹 눌러 참았다.
“아버지, 아니 회장님이 저 고등학교 때부터 쭉 해왔던 얘기를 내가 잊었을 리가요? 명심하고 열심히 죽어라 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알았으면 어서 가서 자리를 지켜. 요리 연습도 더 열심히 하고. 항상 윗대가리가 감시하고 지키고 있어야 직원들도 정신 차리고 일하는 거야. 대충 농땡이 칠 생각 하지 말고 매장에 붙어있으라고!”
원상은 깍듯하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회장실을 빠져나왔다.
‘잘했다고 칭찬 한 번 해주면 어디 부러지기라도 하나? 인정 없는 노인네 같으니.’
원상은 칭찬을 바라고 또 인정받기를 바라고 아버지를 찾아간 자신을 후회하고 있었다.
* * *
전날 새벽 3시가 넘어서까지 요리 연구하다 잠든 인우는 얼굴 위로 살며시 비추는 아침 햇살에 간신히 눈을 떴다.
간단히 씻고 뻐근한 손목과 허리 스트레칭을 해준 뒤 운동복을 챙겨 입었다.
군대에서 훈련으로 다져진 근육들이 요리 연습한다고 집에만 박혀있으면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요리대회를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숱한 연습을 위한 체력이라는 생각에 다시 시작한 아침 운동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아빠의 [서풍]이 있었던 이 동네가 좋았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골목마다 아침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 힘들지만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물로 흘린 땀을 씻어낸 후 주방으로 향했다.
“사부, 좋은 아침.”
-이 활기찬 전개는 뭐지?
“내가 목표가 생겼거든.”
-알아. 네 아빠 가게를 다시 연다면서?
“그전에 요리대회에 참가하려고.”
-요리대회?
“[중화요리 최고의 고수를 찾아서]라는 요리 경연 프로그램이야.”
중식도가 빙그르르 돌면서 인우의 말을 따라 했다.
-[중화요리 최고의 고수를 찾아서]…. 날 찾는다는 말이군. 이거 참. 난 시끄러워지는 건 딱 질색인데 말이야.
“1차전 메뉴가 짬뽕이다. 이건 내가 절대 양보할 수 없지. 아빠의 맛을 반드시 찾아 선보일 거라고.”
-짬뽕이라? 쉽지 않겠군.
“[서풍]에서는 홍짬뽕, 백짬뽕이 거의 비슷한 인기를 끌었다고 들었어. 나는 출전하는 그 날까지 둘 다 완벽하게 완성해 놓을 거다.”
-지난번 짬뽕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지?
“신선한 재료와 감칠맛 나는 육수. 그래서 시장부터 다녀올게.”
-빨리 와. 날 너무 오래 혼자 두지 마.
멋진 미소를 쓱 날려 준 뒤 두꺼운 패딩을 걸친 인우는 성큼성큼 시장으로 향했다.
신선한 해물이 잔뜩 담긴 봉투에서 나는 비릿한 바다 냄새와 패딩에서 슬쩍슬쩍 묻어 나오는 바람 냄새가 교묘하게 섞여 코를 자극했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감각이 예민했던 인우는 그 속에서 미세하게 느껴지는 짠 내를 맡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우선 신선한 해물을 깨끗이 손질해 물기를 빼고 싱싱한 채소를 씻어 채반에 건져 놓았다.
채소용 도마 위에 양파를 올리고 중식도를 손에 쥐었다.
며칠 전까지 남아있던 어색함 마저 사라져 한 몸이 된 듯 편안했다.
중식도가 빠르고 정확하게 채소와 해물을 손질해 놓았다.
“지난번도 그렇고 오징어 겉면에도 칼집을 내는 이유는 뭐지?”
-오징어 겉면의 결을 끊어주어 부드럽게 해주고, 양념도 잘 베어내게 해준다는 것. 이것 또한 네 아빠의 연구 끝에 나온 결과지.
“좋았어. 그럼 재료는 이제 완벽하게 준비됐고, 문제는 국물인데…. 뭔가 아빠의 비법이 있을 텐데….”
-물론 있지. 그걸 찾아낸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몇 번을 연습해서든 오늘은 꼭 찾아내고 말 거다.”
웍에 기름을 붓고 약한 불로 썰어놓은 파와 마늘을 은근하게 볶았다.
그러자 향긋한 향이 온 집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태국 고추 두 개를 잘게 부숴 넣고 거기에 간장을 팬에 둘러 촤라락 부었다.
준비한 채소를 모두 넣어 최고의 화력으로 빠르게 볶다가 고춧가루를 넣고 볶으며 전날 만들어 놓은 닭 육수를 부었다.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해물파티.
소금과 굴소스로 간을 한 후 목이버섯을 넣으면 완성.
“어때, 사부?”
-모양은 완벽해. 하지만, 중요한 건 맛이라는 거 알지?
그 맛을 찾아내는 건 오롯이 인우의 몫이었다.
냉수로 다시 입을 헹군 후 국물을 떠먹어 보았다.
“맛있다.”
-당연하지, 어느 분의 솜씨인데?
“그런데, 아빠의 맛은 아니다. 뭔가 조금 달라. 뭐랄까? 맛은 있는데, 깊은 맛이 부족해.”
-그 차이를 느끼는 거냐?
“내가 어려서부터 아주 예민한 미각을 자랑했지. 분명 재료는 같아. 하지만, 조리법에서 뭔가 차이가 있을 거야. 그게 뭔지 사부는 알고 있지?”
-대회가 언제라고?
“한 달 후.”
-내가 주는 미션이야. 이건 요리대회를 위한 것도 되지만, 정말 내 제자가 될 자격이 있는지 테스트하는 것도 되니까 잘해보라고.
인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절대 그냥 가르쳐주는 법이 없군.”
-왜? 서운해?
“아니, 맘에 든다. 너무 쉽게 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거든.”
-자신감 좋아. 그럼 비법을 잘 찾아봐.
인우는 대답 대신 짬뽕 국물을 먹어보고 또 먹어보았다.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