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 完 (001-200)_(2022_T)
제1화.
한쪽 벽에는 아직 정리하지 않은 박스들이 쌓여있는 원룸에서 인우는 동기 준형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몇 시에 올 건데?”
인우는 창밖으로 보이는 도로가 테트리스처럼 점점 차로 메워져 가는 것을 보며 속으로 테트리스 브금을 흥얼거렸다.
“야, 거기 답답하지 않아? 밖에서 보자니까.”
“여기 우리 집 옥상 뷰가 끝내준다.”
“그럼 맛있는 거 해주나?”
“하는 거 봐서.”
“알았다, 인마. 8시까지 갈게.”
통화를 마친 인우는 다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 정리할 게 많긴 하네.’
문 두 개 달린 옷장에 옷을 다 넣고 나니 이제 박스 두 개가 남아있었다.
전공 책과 나름 교양서적이라고 사놨던 책들이 담겨있는 박스를 정리했다.
“이건 뭐지?”
길쭉한 상자가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겉면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채로.
색이 바랜 상자의 녹색 끈을 풀어보니 네 개의 면이 또 테이프로 꼼꼼하게 밀봉되어 있었다.
‘오만원권이나 잔뜩 들어 있으면 좋겠군.’
인우는 이런 생각을 하며 혼자 피식 웃었다.
가위의 끝부분을 이용해 상자를 열어보니 넓적한 중식도가 하나 들어 있었다.
‘이건…. 이건 아빠가 제일 아끼던 칼이다. 그렇게 찾아도 안보였었는데 이게 왜 내 책들 사이에 들어있는 걸까?’
아빠의 중식도를 보니 다시 콧등이 시큰해져 왔다.
한동안 멍해져 있던 인우는 우선 한쪽 구석에 상자를 내려놓고 다시 남은 책들과 마지막 남은 상자를 정리했다.
“휴, 이제 다 끝났다. 그래도 정리 좀 하니까 훨씬 깔끔하네.”
인우는 잠시 숨을 돌린 후 부엌으로 들어갔다.
준형이 오기 전에 음식을 좀 만들어 놓을 생각에 오전에 장 봐온 재료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돼지고기를 손가락 크기로 잘라서 소금, 후추, 생강즙 등을 버무려 냉장고에 다시 넣어두었다.
그리고는 싱크대 아래 서랍에서 골뱅이 캔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어 그릇에 부어 놓았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미나리나 손질해 놓을까?’
인우는 싱싱한 미나리를 깨끗하게 손질해 놓고는 탕수육 소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근, 양파, 오이만 가지고 간단히 소스를 만들어 맛을 봤다.
‘아빠가 해준 탕수육 소스는 이 맛이 아니었는데…. 수 없이 연습해도 그 맛을 내기가 참 힘들다.’
소스에 식초와 설탕을 조금 더 첨가해 보았다.
더운 날씨에 불 앞에 서 있었던 인우는 잠시 부엌에서 나와 선풍기를 틀고 핸드폰의 시간을 확인했다.
얼추 8시가 다 되어갔다.
준형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디쯤이냐?”
“한 30분쯤 후면 도착할 것 같은데, 왜?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
“그냥 다시 가라.”
“그러니까 나도 너무 보고 싶네.”
“너 그러다 맞는 수가 있다.”
“하하, 금방 갈게.”
인우는 다시 부엌으로 가서 국그릇에 고추장과 고춧가루, 간장, 설탕, 다진 마늘을 넣어 소스를 만들었다.
‘음, 매콤달콤한 게 좋은데….’
양파와 파를 가늘게 채 썰어 물에 담그고, 골뱅이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놓았다.
가스레인지에 기름을 올려놓고는 달걀흰자에 전분, 소금을 넣어 만든 반죽에 재어둔 고기를 담가 튀길 준비를 마쳤다.
8시가 30분이나 넘어서야 준형이 한 손에는 커다란 휴지 더미를, 다른 한 손에는 맥주를 한 봉지 가득 사서 문을 발로 차고 있었다.
“벨을 누르지?”
“시끄럽고, 빨리 받아 인마, 무거워.”
“우선 손부터 씻어.”
“뭐야? 너 이 날씨에 요리하고 있었어? 더운데? 너는 고생하지만 내 입이 호강하겠네. 내가 뭐 도울까?”
“손이나 씻어. 다 완성하면 옥상으로 맥주나 들고 따라와.”
인우는 말을 마치고는 바로 고기를 튀기기 시작했다.
팔팔 끓는 기름에 꽃이 피어났다.
“이야. 보기만 해도 군침 돈다.”
큰 볼에 양파, 파, 미나리, 골뱅이를 넣고 소스를 부었다.
한 번 휙 버무리고는 캔에 있는 국물과 식초 깨를 넣고 다시 한번 버무려 접시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기름을 뺀 고기에 탕수육 소스를 부었다.
인우는 접시 두 개를 들고 준형을 데리고 옥상으로 넘어왔다.
“여기서 보면 마포구 전체가 다 보이는 것 같아. 어때?”
잠시 숨을 돌린 후 준형도 인우 옆에서 환하게 불 켜진 마포 거리를 내려보고 있었다.
“야, 쬐끔 좋긴 하다. 그런데 뷰보다 난 저 요리가 더 멋진데.”
옥상에 펼쳐져 있는 나무 평상 위에 인우가 만든 탕수육과 골뱅이무침을 놓고 시원하게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더 못 참겠다. 나 먹는다.”
준형은 탕수육을 하나 집어 먹고는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지, 이 맛이지!”
준형은 또 옆에 있는 골뱅이무침을 미나리 잔뜩 올려서 한 젓가락 먹어보았다.
“인우야?”
“왜?”
“나랑 결혼하자.”
“미친놈.”
“네가 왜 남자냐? 아니 나는 왜 남자냐?”
“먹기나 해.”
둘은 다시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런데, 넌 언제 복학할 거야? 이번에 해도 동기들보다 1년이나 늦는 건데.”
준형은 탕수육을 입에 잔뜩 넣고는 물었다.
“글쎄다, 이번 학기만 쉬고 복학해야지.”
인우는 다 마신 맥주 캔을 사정없이 찌그러트리고는 새로운 캔을 하나 땄다.
1학년을 마치고 남자 동기들 여럿이 군대 간다고 휴학계를 냈던 시기에 인우도 갑자기 휴학계를 냈다.
친하지 않았던 동기들은 그저 군대에 가나 보다 생각했던 그 시기에, 인우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학교를 1년 쉬었다.
그리고 곧이어 그도 입대했었다.
“이제 막 이사했으니 몇 개월만 준비하고 바로 복학해야지.
준형이 넌 내년이면 4학년이네, 4학년이라는 단어가 참 무겁게 느껴진다.”
“말도 마라. 벌써 취업 준비한다고 다들 정신없다.”
새로 딴 맥주를 한 번에 반 이상을 들이킨 준형은 말을 하다 말고 인우의 표정을 살폈다.
“넌…. 이제 괜찮은 거냐?”
“나? 나야 뭐…. 아르바이트도 계속하고 천천히 복학 준비도 해야지.”
인우는 준형이 뭘 걱정하는지 알기에 잠시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가 다시 폈다.
그리고 바로 맥주를 입에 털어 넣고는 캔을 찌그러트렸다.
“너희 아버지가 해주신 요리 정말 끝내줬었는데….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어.”
“맞아, 아빠 요리를 맛본 사람은 정말 다 인정했었지.”
인우는 거의 3년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울컥하고 뭔가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멀리 지방에서까지 우리 아빠 요리를 맛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찾아왔었지. 나 아빠 덕에 유명한 연예인들도 많이 봤다.”
“그래?”
“여배우 송혜미도 봤었는데...”
“여신 송혜미? 야, 이 부러운 자식. 또, 유명인사들도 많이 왔었지?”
“그랬지. 어려서 나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을 실제로 보는 게 너무 신기했다.”
인우는 잠시 회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맥주 캔에 맺힌 물방울만 하염없이 쳐다봤다.
“항상 너를 지켜보고 계실 거다. 그러니 힘내 인마.”
인우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한참을 있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난 군대에서 밤마다 아빠를 생각했다. 아빠가 해준 얘기들이며 만들어 준 음식들, 그리고 아빠의 음식을 사랑해준 사람들.”
“그랬을 거야.”
“준형아, 난...”
“무슨 얘긴데 이렇게 심각해?”
“내가 아빠와 같은 요리를 할 수만 있다면 아빠의 뒤를 잇고 싶어.”
“야, 너 이렇게 요리를 잘하는데 충분히 할 수 있지.”
“아니, 아빠의 요리에 비하면 많이 부족해. 아무리 연습해도 그 맛을 낼 수가 없다.”
“너 그래서 계속 거기서 아르바이트 하는 거냐? 요리 연습하려고?”
인우가 잠시 멈췄던 말을 이어갔다.
“거기 사장님 우리 아빠랑 형님 동생 하며 제일 친하게 지내셨던 분이다. 그래서 내가 제대하고 바로 찾아가서 아르바이트하고 싶다고 부탁했던 거고.”
“너 그래도 배달까지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과외를 하던지 다른 아르바이트 많이 있는데.”
“왜? 난 배달하는 거 아무렇지도 않아. 사람들이 기대에 차서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지 네가 몰라서 그래.”
“그래도 난...”
준형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준형아, 난 거기서 배달하고, 사이사이에 요리하는 것도 보고 또 어떻게 만든 건지 물어보기도 하면서 정말 행복하다. 무엇보다 아저씨랑 아빠 얘기를 자주 할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아.”
준형은 캔에 남아 있는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넌 지금도 충분히 자격이 있어, 만약 너 정도 음식솜씨 있는 사람이 식당을 하면 난 무조건 가서 먹는다.”
인우는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난 그냥 아무 식당 말고 아빠의 [서풍]을 이어가고 싶다.”
“나도 [서풍]이 다시 일어나는 걸 진심으로 보고는 싶다. 음식이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걸, 그리고 음식이 추억이 될 수 있다는 걸 너희 아빠를 통해 처음 알게 됐거든.”
“그래, 바로 그런 음식을 만들고 싶다.”
“우선 복학부터 해, 인마.”
“이 형님이 고민이 많다.”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건물들에 하나씩 불이 꺼지기 시작했다.
준형이 사 온 맥주를 다 마시고 나서야 술자리가 끝이 났다.
준형이 집으로 돌아가고 재활용 봉투 가득 찌그러진 맥주 캔을 담아놓고 바로 샤워를 했다.
키가 큰 인우의 머리에 샤워기 헤드가 자꾸 닿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머리를 감으면서 새삼 작은 집으로 이사 온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샤워기를 통해 나오는 물이 인우의 머리부터 다부진 어깨와 가슴 근육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얀 거품이 하수구 구멍으로 정신없이 빨려 들어갔다.
찬물을 더 틀어 시원하게 마지막으로 한번 더 몸을 씻고는 수건으로 짧은 머리를 툭툭 털어 말렸다.
물이 똑똑 떨어지는 앞머리를 뒤로 넘기자 기다랗고 진하게 그린 듯한 눈매와 오뚝한 코가 거울에 선명하게 비쳤다.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 또한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창문은 활짝 열어둔 상태로 선풍기 타이머를 3시간에 맞춰놓고 작은 침대에 누웠다.
‘푹 자고 내일은 아르바이트 다시 가야겠다.’
인우는 짧지만, 아직 물기가 조금 남아 있는 머리가 베개에 닿는 것이 신경 쓰여 뒤척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인우의 귀에 자꾸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여기. 여기라고.
‘이 집이 다 좋은데 방음이 전혀 안 되는군. 여름이라 문을 열어놔서 그런가?’
다시 잠을 청하려 하는데 또 소리가 들려왔다.
-야, 들었으면 아는 척 좀 해보지. 자는 척 말고.
침대에 붙어있던 몸을 일으킨 인우는 윗집이나 아랫집에서 나는 소리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뚜렷하게 들리는 소리에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소리지? 어디서 나는 거야?’
인우는 방을 왔다 갔다 걸으며 소리가 나는 곳이 어디인지 온 신경이 다 귀에 쏠리는 느낌이었다.
창문을 닫고 다시 침대에 누워 보았다.
그러자 또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쌩까지 말고 여기로 좀 와보지.
다시 몸을 일으킨 인우가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귀를 기울이던 그때 방구석에서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참 둔하긴. 여기 안 들려? 너 청각에 문제 있는 거 아니냐? 난청 검사를 꼭 해봐야 겠구만.
구석 쪽으로 점점 가까이 간 인우는 숨죽이며 귀를 기울였다.
-그래, 여기라고 인마!
“아이씨, 깜짝이야!”
짐 정리하며 구석에 내려놓은 작은 박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정확히는 인우에게 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럽게 박스 뚜껑을 열어보던 인우는 갑자기 튀어나온 중식도를 보고 놀라서 입을 벌린 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박스 안에서 튀어나온 중식도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며 말을 했다.
-야, 너 정말로 이제 눈치챈 거냐? 왜 이렇게 둔하냐 넌?
인우는 너무 놀라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한참을 정신이 빠져있던 인우에게 계속해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희 아빠는 정말 영리하고 빠릿빠릿했는데, 참 답답하네.
인우는 기가 막혀 말이 한참 나오지 않았다.
지금 상황이 믿기지도 않았다.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거야. 그래, 오랜만에 취해서 엉뚱한 소리가 들리는 거지. 그럼 그럴 수 있어.’
인우는 눈을 비벼보고 침대 옆에 놓아둔 물도 벌컥벌컥 마셨다.
하지만 여전히 중식도는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