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의 이유-75화 (75/79)

외전 7화.

“아, 뭐 그것만은 아니고.”

그의 금발이 여름날의 쨍한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게 밝았다.

“그냥 나는 새로운 걸 보는 게 좋고, 그 속에서 이것저것 알아 가는 게 재밌어요. 내가 이렇게 유명해지기 전에는 어느 시골짝 길거리에서 잡동사니를 파는 노점상을 열어 본 적도 있거든요.”

“뭐라고요?”

“나라마다 상황이 다 다르고 직접 부대껴 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어서…… 그냥 정해진 대로만 하면 재미없잖아요. 다 아는 길로 가면 도태되기도 싶고. 모르겠네, 내가 경영학과도 아니고 딱히 경영 관련 수업도 안 들어서 그런가?”

실제로 외국 유명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까지 딴 윌리엄에 비해, 자연 과학 전공에 그것도 학부 졸업도 못한 루벤은 배경 자체가 달랐다. 르엘라는 루벤을 보며 속으로 어제 아셰가 했던 혁신이니 하는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진짜 재밌었지. 타르안도 코앞에서 봤어요. 아, 아이돌 관심 없나?”

“리한 카드민 정도는 알아요.”

“아, 교수님도 리더는 아시는군. 진짜 기깔나게 잘생겼던데.”

“어느 정도예요?”

“내 옆에 엄청 키 작은 여자애 하나가 있었는데 혼을 빼놓고 보더군. 초등학생 같아 보이는 애 눈에도 잘생긴 건 잘생긴 건지……. 옆에 있는 제 친구가 정신 좀 차리라며 소리쳐도 넋을 빼놓고 보던걸. 얼마나 친구가 이름을 계속 불러대도 들은 척도 안하던지 그 이름도 외웠어. 유진이던가, 유린이던가.”

“그건 이름을 외웠다고 하는 게 아닌데요. 그리고 아메탄 정도면 아예 타르안을 가족 행사에 초청할 수 있지 않나요?”

“그거랑 또 다르지.”

뭐가 다르냐고 묻기 전에 루벤이 말을 이었다.

“그런 것 때문에 아메탄을 욕심내는 건 아니에요.”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이 인프라, 이 자본, 이 인적 자원…… 어쩌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몰라. 윌리엄 방식은 너무 고리타분하지 않나. 세상은 자꾸 변하는데 계속 옛 사업만 쥐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아…… 이런.”

“왜요?”

“그냥, 이런 진지한 얘기를 하는 것도 처음이고 그래서 민망하네. 그냥 생각 없이 돈에만 눈 뒤집힌 놈처럼 보일까 봐 한 말이에요.”

“뭐…… 이제 슬슬 가죠.”

르엘라는 길을 막아선 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곧 교수 회의가 있어서요.”

“좀 늦으면 안 돼요? 나 내일 출국이라니까.”

“죄송하지만 제가 주인공이라.”

“네?”

“이번 연구 결과가 상업적으로 이용될 여지가 많거든요. 온갖 제약 회사에서 독점하고 싶다며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데 제가 거절하고 있어요. 학과 입장에서는 학교 이름으로 기술을 팔고 싶어 하고…… 뭐 그런 상황이에요.”

“썩을 놈들이 왜 교수님 결과 가지고 지들이 왈가왈부하는 거죠?”

“상관없어요. 어차피 타협 안 할 거니까. 이참에 돈 벌려고 한 연구가 아니라는 점을 못 박아야죠.”

돈이 될 만한 연구는 맞았지만, 그래도 공익을 위한 학문을 한다는 그녀의 신념에 따라 그녀는 딱히 한 기업에서 기술을 독점하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르엘라는 실제로 전혀 걱정하고 있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가 이끄는 연구팀에서 발견해 낸 것들이고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든 학교는 그녀를 버릴 수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그녀의 명성은 대단했고 이 학교를 벗어나더라도 먹고 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대학은 돈이 필요할 텐데.”

“그게 문제기는 한데, 한번 타협하면 자꾸 공익과는 멀어지니까. 돈 없는 대학원생들 장학금 좀 챙겨 줄 수 있는 건 좀 끌리지만 아무래도 오픈 소스로 남겨 두는 게 일반인들에게는 좋겠죠.”

“멋있다, 교수님.”

루벤은 살짝 길을 비키며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해.”

“학교 사람들은 별로 안 좋아하더군요. 아무래도 연구비 따는 데에는 방해가 되니까.”

“연구비가 그렇게 탐나면 지들이 그런 결과를 내라고 해요. 괜히 남의 신념 들쑤시지 말고.”

“그럼 건강히 다녀오세요.”

르엘라는 가볍게 인사한 뒤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이 주제에 대해서 더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르엘라의 연구팀이 만들어 낸 신물질에 대하여 가장 먼저 연락을 해 온 사람이 아메탄의 테스티였다. 그녀는 가장 먼저 독점권을 요구하고 나섰다. 루벤의 졸업을 압박해 온 것처럼, 실제로 인맥이 닿는 교수들에게 모두 청탁 아닌 청탁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런 식이니 사람들이 테스티의 아들인 루벤을 싫어하는구나…….

혼자 캠퍼스로 돌아오면서, 르엘라는 문득 자신이 마지막 수업을 살짝 아쉬워한다는 생각을 했다.

공부와 연구만 해 왔던 르엘라는 이런 모든 감정이 불쾌했고, 특히나 그 상대가 자신과 너무 다른 남자인 루벤이라면 그냥 도망가고만 싶었다. 이렇게 끝내고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잊히고 다시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꼬장꼬장한 태도로 교수 회의에서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고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다가 중학생 조카가 잠들어 버린 시각에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까지 그에게 메시지는 없었다.

이제 더 이상 그에게 메시지가 올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핸드폰을 확인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데, 동시에 또 무언가가 두려웠다. 아마 루벤 아메탄이라는 남자가 가진 너무나 특수한 성질 때문일 것이다.

“어차피…… 이제 끝인데.”

르엘라는 새로운 메시지가 없는 핸드폰 액정을 가만히 보다가 늦게 잠들었다. 새벽녘, 이미 그가 먼 나라로 떠났을 것을 끊임없이 상기하면서.

학생이 한 명인 강의인데 그가 개강 첫날부터 마지막 2회는 결석한다고 공언했다. 심지어 비행기까지 예매했다고 초반부터 말했다.

그러므로 르엘라는 강의 자체를 잊어버리려고 애쓰며 실험실에서 다른 대학원생들과 함께 실험을 하고 있었다.

“어?”

대학원생 한 명이 피펫을 가져오다가 가는 눈을 뜨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장마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비가 오네요?”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있던 르엘라의 어깨가 살짝 움찔했다.

“우산 가져 왔어, 다들?”

“망했다. 일기 예보에 그런 얘기 없었는데.”

“실험실에 몇 개 있을걸? 내가 알기로 표본실에도 있고.”

“표본실에 장미 표본 봤어?”

“그거 루벤 아메탄이라고 이름 적혀 있던데. 비싼 품종 장미도 있던데 돈지랄도 가지가지하나 싶었지.”

대학원생들이 낄낄거리며 저들끼리 수다를 떨 동안, 르엘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비가 애매하게 오네…… 막 쏟아질 것 같지도 않고, 금방 멈출 것 같지도 않고.”

창밖을 기웃거리던 대학원생 하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릴 때였다.

르엘라의 휴대폰에 거짓말처럼 알림이 떴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실험복에서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바라보았다.

[비가 찔끔찔끔 오는 것 같은데요. 강의실 수업인가요?]

분명히 오늘 새벽에 외국으로 떠난다고 했는데. 게다가 졸업할 수 있는 학점을 주겠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녀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천천히 메시지를 보냈다.

[강의실로 오세요.]

뻔히 핸드폰 액정에 시간이 나와 있는데도 그녀는 얼핏 벽에 걸린 벽시계의 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강의 시작 시간이 5분 남은 상태였다. 르엘라는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에 모두가 돌아보았다.

“교수님?”

“어? 어디 가시려고요?”

실험복을 벗고 우산을 집어 드는 르엘라를 보며 대학원생들이 얼떨떨한 듯 물었다. 르엘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짧게 대답했다.

“수업에 가려고요.”

그녀보다 나이가 많은 대학원생도 종종 연구팀에 들어와서 그녀는 모두에게 존대를 쓰곤 했다. 대학원생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원래 더 일찍 나가시지 않으세요? 안 나가시기에 휴강인 줄 알았는데…….”

“예, 어쩌다 보니 제가 좀 늦었네요.”

절대 늦지 않는 르엘라를 익히 알고 있는지라 모두가 멍하니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르엘라는 실험 지시를 몇 개 한 다음 무표정으로 실험실을 나갔다. 우산을 펴들고 걷기 시작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빠듯하게 출발한지라 수업 시간이 코앞이었다. 늘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는 그녀의 성향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강의실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거의 뛰고 있었다.

“아.”

벌컥 문을 열었을 때, 장미 꽃다발을 든 루벤이 책상 위에 앉아 있었다. 그의 긴 다리가 허공 위에서 제멋대로 까닥거리고 있었다.

“왔네요.”

숨을 헐떡이는 르엘라를 보고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그를 본 르엘라는 표본도 다 제출해서 더 이상 장미를 사올 이유가 없는데 왜 저런 걸 사 왔을까 생각하다가, 원래부터 표본을 만들기 위해 꽃다발을 사 오는 남자가 정상이 아님을 상기했다.

“……오늘 출국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르엘라는 안경에 튄 빗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강의실 문 앞에서 물었다. 루벤은 천천히 책상에서 내려왔다. 장미 꽃다발처럼 화사한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의 날카로운 얼굴엔 평소와 같은 불량스러운 미소조차 걸려 있지 않았다.

“왠지 비가 올 것 같아서 못 가겠더라고.”

“그게 무슨.”

“비 오면 연락하고 싶어지거든요.”

“…….”

“그런데 연락하다 보면 보고 싶어지거든.”

르엘라는 자신이 뛰어서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는지, 아니면 무언가가 두려워서 온몸이 긴장 상태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난 원래 보고 싶은 게 있으면 세상 끝까지 가는 인간이었어요. 이번에도 그냥 그대로 행동한 것뿐이야.”

첫인상이 최악이었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싫어하는 그 남자가 그녀의 눈에 그대로 꽂혔다.

“뭐 가르치러 왔어요? 수업할 내용이 남아 있나?”

“……강의 계획서를 다시 볼까요. 잠시만요.”

“아니면…….”

그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다가왔다. 르엘라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가 문에 등을 부딪치고 말았다.

“조금이라도 나 보고 싶어서 온 건가요?”

“…….”

세계 내로라하는 석학들 앞에서도 한 번도 주눅 들어 보지 않은 르엘라인데, 장미 꽃다발을 들고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하얘졌다.

“표본 핑계로 꽃다발 주는 것도 이제는 못하는데.”

뭐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루벤이 천천히 꽃다발을 내밀었다.

“이제 이거 주려면, 애인이라도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교수님 말대로라면.”

“…….”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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