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럼 오늘 오리엔테이션 끝인가? 가 봐도 되나……요?”
“식물 표본 만드는 법은 최대한 빨리…….”
“블랑한, 아니 블랑 교수님한테 몇 년 전에 배웠으니 안 배워도 됩니다. 그냥 종강 때까지 이파리 말려서 붙인 거 30개 만들어 오면 되는 거죠?”
“그럴 수는 없고 정식 수업은 해야죠.”
“아, 그럼 뒤로 빼시든가. 3번만 결석 안 하면 F는 안 준다, 이거잖아. 그럼 난 마지막 두 번은 결석할 예정이니 수업 계획 짤 때 참고해요.”
“…….”
“괜히 기다리게 하는 건 나도 마음 안 좋으니까 미리 말해 두는 겁니다. 내가 전출하면, 마지막 두 번은 교수님도 아예 오지 말아요. 그 시간에 인류의 복지에 이바지하셔야지.”
“…….”
“그렇게 좋아하는 강의 계획서의 기준에 딱 맞는데, 왜.”
“뭐, 그럼 알았어요.”
그렇게 그들의 이상한 첫 수업은 끝났다.
* * *
“르엘라!”
꽤 늦은 저녁, 르엘라의 연구실로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
르엘라는 그녀답지 않게 따뜻하게 웃으며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나야 뭘, 기사가 데려다주고 데리러오는데.”
방문자는 양손에 온갖 간식거리를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금발 머리의 발랄한 여학생이었다. 학부생 때 돈이 부족하여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부유한 집의 여자 아이를 가장 오래 가르쳤다. 그리고 그 아이가 알고 보니 아메탄의 혼외자인 아셰 아메탄이었다.
르엘라의 조카와 동갑이어서 그런지, 어쩌다 보니 친해진 둘은 서로 말을 편히 하게 되었다. 아셰가 기숙사가 있는 중학교에 들어가며 과외는 끝났지만 그들은 꽤 오랫동안 인연을 유지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 특히 유명 연예인인 아셰의 엄마가 상당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아셰는 어린 시절부터 르엘라를 상당히 믿고 따르는 편이었다.
“그나저나 골치 아프지 않아?”
“응?”
“루벤 말이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기사 떴거든.”
아셰가 휴대폰 액정을 들이대며 씩 웃었다. [아메탄의 탕아 루벤, 이번에는 대학 졸업장 딸 수 있을까]라는 기사 헤드라인이 한눈에 들어왔다. 대충 슥 훑어보니 루벤은 그 나이에도 ‘식물 분류학’이라는 한 과목 때문에 아직 졸업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함께, 이제 와서 졸업장을 따는 이유로는 후계 싸움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것 아니겠냐는 추측이 이어졌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사건이라 인터넷에서 수강 편람까지 찾아봤지. 근데 교수 이름이 르엘라 하카트고, 정원은 한 명이더라고?”
르엘라는 그제야 아셰가 갑자기 연락하여 들이닥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동시에 대학에 다니지 않는 사람도 쉽게 열람할 수 있는 수강 편람을 당사자인 루벤은 단 한 번도 확인하지 않고 수업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머리가 아파 왔다.
“친해? 어쨌든 이복 오누이니까…….”
“아니.”
아셰의 대답은 빨랐다.
“같은 숨겨진 여자인 주제에 테스티가 얼마나 우리 엄마를 괴롭혔는데. 뭐, 어쨌든 테스티는 그 집 안방마님으로 올라가고 우리 엄마는 여전히 숨겨진 여자이니 괴롭힌 보람은 있었겠지. 그리고 루벤은 나와 달라. 같은 혼외자 처지이지만 말이야.”
“호적 말하는 거야?”
“그 외에도.”
아셰는 휴대폰을 들어 ‘루벤’이라는 검색어만 쳐도 줄줄 나오는 온갖 기사와 게시물들을 보여주며 새침하게 말했다.
“나처럼 가만히 숨죽여 살면서 야금야금 그 많은 재산이나 빼먹고 살면 될 것을…… 꼭 이렇게 오만 사람들한테 욕먹으면서까지 나서고 싶을까?”
르엘라는 끝없이 이어지는 게시물들의 활자를 보며 문득 아까 전 루벤의 불량스러운 목소리를 떠올렸다. 자신의 이름을 검색해 보라던 그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셈인가. 아셰가 한심하다는 어조로 기사 헤드라인을 몇 개 읽었다.
“안정된 아메탄 그룹에 갑자기 들이닥친 후계자 싸움……. 말도 안 되는 투자 계획서로 경영진들을 모두 당황시켜……. 갑자기 굴러 들어온 탐욕스러운 혼외자, 정통 후계자 윌리엄을 몰아내나…….”
어디서 굴러먹다 온 양아치 새끼가 아메탄을 집어 삼키려고 날뛴다는 댓글까지 친절하게 읽어 준 아셰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거기에 나람 케이슨하고 스캔들까지.”
이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어린 배우, 나람 케이슨에 대해서 르엘라는 잘 몰랐다. 그냥 전형적인 어리고 예쁜 여자?
“분명 잘못 걸려든 거야. 내가 루벤을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여자관계 하나만큼은 깔끔한 것 같았거든. 아니, 그런 말로도 부족하고…… 그냥 그런 이성적인 것에 대해 무감한 느낌? 이건 다니엘 의견도 마찬가지였어.”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르엘라 앞에서 아셰는 조잘조잘 떠들었다.
“오히려 이상한 데 꽂힌 사람 같아. 좀 이상한 취향이야. 나는 일체 관여하지 않지만, 다니엘 말로는 진짜 이상한 투자 계획서를 써 온대. 아메탄이 전혀 관심 없던 분야에 갑자기 사업 확장을 얘기하지를 않나…… 확실히 전문적으로 어릴 때부터 경영 교육을 받아 온 윌리엄하고는 완전히 다른가 봐. 문제는 은근히 설득력이 있어서 꽤 많은 임원들이 솔깃하고 있다는 거지.”
“……그래?”
“언론이 이렇게 물어뜯는 것 보면 모르겠어? 진짜로 미래가 없는 삼류 양아치한테 반응하는 여론은 없어. 좀 이상하고 어이없는데도 그 인간이 뭔가 될 것 같으니까 더 난리들인 거야. 그러니까 다들 윌리엄의 편을 들지. 갑자기 등장한 양아치 혼외자에게 아메탄을 뺏길 가능성이 없지 않아 보이니까.”
가만히 숨죽여 살면서 야금야금 많은 재산이나 빼먹으며 살겠다는 말과는 달리, 아셰는 문득문득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 주곤 했다. 세상에 대해 상당히 냉소적인 시선을 가진 탓에 이런 말을 할 때 아셰의 얼굴에는 이상한 환멸이 감돌고는 했다. 평소의 밝고 명랑하며 잘 웃는 성격 이면에 존재하는 깊은 어둠을 가끔 드러내는 듯이.
“여하튼 대충 하고 끝내 버려. 전 국민이 손가락질하는 문제아인데. 아…… 르엘라 성격상 그게 안 되나?”
조용히 살겠다는 혼외자인 아셰도 가끔 어둠을 숨기지 못하는데, 전 국민이 손가락질하는 시끄러운 혼외자의 속은 어떨지 르엘라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물론 예의가 형편없는 학생이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욕먹을 정도로 개차반은 아니던데. 르엘라는 아셰가 사 온 쿠키와 함께 먹기 위해 진한 커피를 타며 생각했다.
“너도 루벤이 싫어?”
아직 어린 아셰에게는 커피 대신 주스 한 잔을 건네며 그녀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쿠키를 오드득거리며 먹던 아셰가 눈을 굴렸다.
“딱히 악감정이야 당연히 없지만, 테스티 아들이잖아. 테스티는 우리 모녀를 잡아먹으려고 한다고. 그러니까 싫을 수밖에 없지. 테스티가 인덕이 없으니…… 아메탄 가문에 루벤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어?”
결국 누군가의 그림자 때문에 미움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그의 불량스러운 태도를 억지로 떠올려 봐도 묘한 연민이 차올랐다.
* * *
르엘라가 내심 걱정한 것과는 달리 의외로 루벤은 성실했다. 물론 끝에 두 번을 빠지기 위한 얼마간의 후퇴라는 것을 언제나 분명히 하곤 했지만.
둘은 의심할 바 없이 맑은 날에는 특정 식물 군락지에 가서 직접 채집을 하며 수업을 진행했고 비가 오는 날에는 그때그때 스케줄을 조정했다. 보통 멀지 않은 곳으로 비를 맞아 가며 야외 수업을 진행했지만 너무 폭우가 쏟아질 때에는 강의실에서 이론 수업을 했다.
루벤과 처음 야외 수업을 나가던 날, 르엘라는 아무 생각 없이 교목과 관목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다가 갑자기 어디선가 들리는 셔터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루벤은 성가시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 툴툴거렸다.
“신경 쓰지 마세요. 딱히 쓸 데는 없는 사진일 테니까. 그래도 짜증나면 내가 가서 카메라 부수고 꺼지라고 하겠지만 그럼 더 시끄러워질 겁니다.”
“이렇게 남의 사진을 막 찍어도 되는 겁니까?”
“역시 불쾌한가요? 사진 찍지 말라고 여기서 저 인간 끌어다가 한 대 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랬다가는 교수님까지 뉴스에 나갈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요?”
실제로 그는 파파라치 폭행 등의 사건으로 몇 번 뉴스에 나온 적이 있었다.
“익숙하신가 봐요?”
“젠장, 저것들 멋대로 손가락 놀려 대는 건 익숙하다 못해 지긋지긋하지……요.”
그는 여린 나뭇가지를 뚝뚝 부러트리다가 르엘라의 날카로운 시선에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그 후에 약간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수업 대충대충 해도 된다니까……요.”
“네?”
“교수님도 성가실 거 아닙니까. 나라는 빌어먹을 학생의 특수성이 있으니.”
“특수성이 있죠.”
르엘라는 투둑투둑 떨어지기 시작한 빗물 때문에 시야가 흐릿해진 안경을 대충 닦으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말투가 여전히 조금 불량스러운 점, 자꾸만 식물을 훼손하는 점, 아직까지 표본을 하나도 제출하지 않은 점을 보면 확실히 특수하군요.”
“사실 내가 식물 분류학을 이렇게 열정적으로 공부할 필요는 전혀 없는데. 원래 학부 강의란 아직 진로를 못 정한 풋내기 대학생들이 적성을 찾기 위해 넓고 얕게 지식을 쌓는 용도 아니었나……요?”
“제게 중요한 건 제 수업을 신청한 학생에게 강의 계획서에 적힌 학습 목표를 모두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쓸데없는 요인만 자꾸 말씀하시는군요. 머리가 나쁘셔서 F를 받은 건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
자신을 가지고 얘기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 루벤이 화제의 방향을 바꿨다.
“교수님 약학 대학 소속이라 세부 전공도 식물하고 상관없지 않나……요? 연구로 바쁠 텐데 굳이 이런 3학점짜리 학부 강의 하나 가지고 힘 빼지 말고…….”
“그렇게 제 걱정을 하고 계시는 줄은 차마 몰랐군요. 당연히 연구로 몹시 바쁩니다. 주말도 없이 연구실에서 커피 들이켜면서 논문 써요. 그러니 보충 수업 하지 않게 본 수업 시간에 최선을 다해 주시길 바랍니다.”
“보, 보충 수업?”
“강의 계획서의 진도를 모두 못 나가면 당연히 보충이지요.”
루벤은 여기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진로와 식물분류학이 아무 관계도 없음을 설명하려다가 대화가 또 반복될 것임을 깨닫고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자신이 첫 수업 이후 한 번도 지각하지 않은 이유는, 늦은 졸업에 열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고지식하게 이 모든 것을 꼼꼼하게 준비한 그녀의 성의를 무시하기 싫어서라고.
아니…….
사실은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대우 받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