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왜 지금 당장 못 물어보냐면…… 음, 뭐 이런 거야.
우리는 같은 책을 읽다가, 아주 특정한 앞부분을 살짝 접어 놓고 펼치지 않기로 했어. 물론 나는 가끔 이베카 몰래 펼쳐볼 수 있는데, 그래도 괜찮긴 해. 왜냐하면 지금 함께 읽고 있는 부분도 충분히 즐겁고 행복하거든. 굳이 앞부분을 들추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야.
그 증거가 너희들 아니겠니. 가끔 난 이베카를 곁에 두고도 하염없이 그리울 때가 있단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저릿하게 아프면서도, 내 자신이 오싹할 정도로 네 엄마가 사랑스러워.
물론 언젠가 이베카가 이제는 그 접어놓은 부분을 함께 보자고 하면 반갑게 함께 펼쳐 볼 거야. 시간이 좀 많이 걸리겠지만 몹시 즐겁겠지. 그때를 간절히 기다리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구나. 혼자만 들춰 보는 건 가끔 쓸쓸할 수밖에 없거든. 궁금한 것도 너무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너무 많고.
하지만 괜히 네 엄마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단다.
그래서 우리는 암호를 정했어. 이브나 왕비가 걸어 놓은 고대 마법이 모두 사라져서 어느 날 문득 이베카가 앞부분을 다시 볼 준비가 되었을 때, 내게 꼭 알려 주기로.
뭐? 암호를 가르쳐 달라고? 그럼 둘만의 암호가 아니잖아.
유리아, 그렇게 조르면…… 내가 너무 난감하단다.
그래. 그렇다면 이베카에게는 비밀로 해. 민망해 할 테니까.
암호는 ‘마지막 보고서를 제출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전하. 하지만 그 이유는…….’이야.
언제가 될 것 같으냐고?
글쎄……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아마 우리 유리아가 나만큼 나이가 들어서 왕이 되고, 나와 이베카가 은퇴하고도 꽤 한참이 지나야 그런 날이 올 것 같은데.
그래, 그 동안에…… 네 엄마는 ‘제 2의 이브나 왕비’라며 성공적으로 아메탄 왕국을 개혁시킨 인물로 남고, 내 가장 큰 업적은 어느 날 갑자기 이베카 데 에셀번을 왕비로 둔 것이라고 기억되었으면 좋겠구나.
그 후에 이베카와 라인볼이나 치며 메나타 호수의 붉은 노을을 바라보는 게 내 꿈이야. 그때 즈음에는 우리가 함께 읽고 있던 그 책이 끝날 무렵이겠지만 어쨌든 곁에 있어서 모든 것이 좋았다고 속삭이겠지.
만일 네 엄마가 조금 황당해 할지라도, 지금의 행복이 너무 좋아 용서해 줄 수 있을 만큼 평생을 노력할 거란다.
그래.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인생이어도, 한 번뿐인 삶일지라도, 나는 그 작은 기대로 언제까지나 기쁘게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아. 그 사소한 순간에 평생을 거는 것이 사랑이겠지.
나는 수많은 사람에게 어설픈 악인이었으나 네 엄마에게만은 항상 절대적 약자였거든.
아메탄을 이끌기 위해 수도 없이 후회되는 일을 많이 했지만, 그 모든 것이 네 엄마를 만나기 위한 하나하나의 초석이었다 생각하면 그 어떤 일도 돌이키고 싶지 않구나. 부디 유리아 네가 왕이 되었을 때에는 이 말이 얼마나 끔찍한 소리였는지 평생 모르기를 바란다.
……이제야 자는구나. 그럼 난 이베카에게 가 볼게.
잘 자, 내 보물들. 좋은 꿈꾸고.
* * *
왕실 연대기를 찬찬히 살펴보면, 대다수의 왕들은 죽을 때까지 왕좌에 앉아 있어요. 보통 왕위 선양 같은 건 정말 늙거나 힘들 때 외에는 하지 않는다고요.
하지만 아바마마는, 아니죠, 이제는 그냥 ‘아버지’라고 불러 달라고 부탁하셨으니까, 아버지는 제가 왕위에 오를 만하다고 판단되자마자 바로 은퇴해 버리고 궁도 나가 버리셨어요. 그렇게 평생을 사랑해 마지않던 어머니를 데리고 말이에요.
이제 와 말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늘 유난이셨어요. 제가 어머니라면 좀 귀찮았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매일같이 붙어 있고 싶어서 안달이셨으니까요. 덕분에 저는 맏이치고 꽤 젊은 나이에 왕좌에 올랐답니다.
물론 왕이라고 해서 옛날처럼 막 사람을 마음대로 죽인다거나, 제멋대로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어머니가 만든 법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에요. 답답할 때는 있지만, 그래도 나름 합리적이랍니다. 제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제가 태어났을 때, 이미 대륙은 난리였다고 해요. 어린 시절 내내 타국의 전쟁과 내란 얘기를 들었으니 알 만하죠. 하지만 아메탄은 법을 내세우면서 큰 혁명이나 내전, 전복 전쟁 없이 무사히 여기까지 역사를 이어 왔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메탄 국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요. 특히 어머니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죠. 아마 제가 어릴 때 ‘이브나 왕비 전기’를 백 번씩 읽었던 것처럼, 후대의 후대 사람들도 어머니의 전기를 읽고 자라지 않겠어요?
아버지의 업적은 ‘기술국 설립’과 ‘법무국 독립’으로 짧게 언급되겠지만, 왕궁에 있었던 저는 잘 알고 있답니다. 어머니가 마음껏 순수한 이상을 펼칠 수 있게, 아버지가 온갖 더럽고 치사한 권모술수는 다 뒤에서 부렸다는 걸요.
뭐, 아버지의 적성에 딱 맞았다고는 생각해요. 본인이 별로 즐기지 않으셨더라도 말이에요.
어쨌든 어머니와 아버지는 둘이 오붓하게 살고 싶다며 궁에서도 나가 버리셨고, 아메니티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고급 주택에서 은퇴 생활을 시작하셨어요. 종종 궁에 초청하여 식사를 하곤 하는데 확실히 궁에 계실 때보다 더 마음이 편안해 보이시긴 하세요.
어차피 왕이 다 해결해야 하는 사안도 없고 하니, 결혼에 대해서도 부담을 전혀 주지 않으시고요.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을 때 하면 된대요.
남동생 테헤론은 이미 의료국 직원 한 명이랑 결혼을 했는데, 그때도 두 분이 물어보신 건 ‘평생을 사랑하며 살 수 있겠니?’였어요. 아마 왕족 중에서 그런 질문 하나만 받고 자유롭게 결혼한 사람은 테헤론이 최초일 거예요.
일단 저는 아직까지 마음에 드는 신랑감은 못 찾았어요. 테헤론은 아이까지 둘이나 낳아 꽤 키워 놓았는데 말이에요. 혼기를 이미 한참 전에 놓쳤다고 볼 수 있죠. 이러다 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딱히 결혼을 안 한 게 걱정되지는 않아요.
뭐, 그렇다고 해서 독신주의자는 아니에요.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저는 약간 운명을 믿어서…… 카를 왕이나 아버지처럼 잠행을 나갔다가 우연히 이어진 인연이 제 배우자가 아닐까, 하는 기대를 버리지 못했어요. 그래서 아주 가끔씩, 평범한 아가씨처럼 변장을 하고 아메니티에 홀로 잠행을 할 때가 있어요. 바로 오늘처럼요.
물론 잠행의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에요. 두꺼운 안경으로 얼굴을 가리고 찬란한 금발을 가리는 검은색 가발을 쓰고, 로브를 뒤집어 쓴 채로 메나타 호수 주변을 거닐면 아메니티 사람들의 평상시 삶을 관찰할 수 있어서 좋거든요.
특히 선선한 날씨에 노을이 메나타 호수의 물결마다 아름답게 걸릴 때에는,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대뜸 말을 걸어도 모두가 친절하게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가 주기도 한답니다.
“노을이 너무 예뻐요, 그렇죠?”
아무렇지도 않게 벤치에 앉아 있던 한 아저씨에게 말을 걸려던 저는, 뭔가를 정신없이 바라본다는 그 남자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어요. 아저씨는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하더군요.
“지금 저 부부 보이시오? 지금 랠리가 150개도 넘었소.”
“어…….”
나는 그제야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을 바라보았어요.
아, 어머니와 아버지였어요. 라인볼을 치시고 계셨죠. 물론 아이나 노인들이 하는 구기인 라인볼을 하는 사람들이야 메나타 호수 공원에 널리고 널렸지만, 150개가 넘는 랠리를 이어 가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인데.
“선대 전하와 왕비님 아니세요?”
“맞소. 평범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계시지.”
아저씨의 목소리는 뭔가 회한에 잠긴 듯했어요.
“……이브의 꿈이었는데.”
“네?”
“늙어서 라인볼을 쳐 줄 사람이 있는 거 말이오. 내가 그 꿈을 들었을 때에는 이미 10대 중반이었고, 10대 중반에 라인볼을 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나는 결국 라인볼을 쳐 주지 못했지.”
희끗희끗해져 버린 갈색 머리의 아저씨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가만히 보니 예전에 체술 좀 했던 몸인데, 그렇게 라인볼이 아쉽나. ‘이브’는 또 누군지 모르겠지만 묻지는 않았어요. 어쨌든 나이 든 사람들은 흰소리를 잘 하니까 말이에요.
“좋은 짝을 만나 행복했을 운명인데 괜히 걱정했군. 쓸데없는 소리도 많이 하고.”
남자는 씁쓸한 듯 웃어 보였어요.
그때 팽팽하게 이어지던 랠리가 어머니에게서 끊겼답니다. 그다지 어려운 공도 아니었는데, 어머니는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라켓마저 떨어트려 버리셨어요.
운동 신경이 좋으셔서…… 저렇게 랠리를 마무리하실 분이 아닌데.
아버지는 언제나 지나치게 어머니를 걱정하곤 했어요. 너무 과도하게 보호하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어느새 아버지를 닮아 어머니의 작은 위험에도 전전긍긍하게 된 건 저희 남매도 마찬가지였어요.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저는 벌떡 일어나 달려가려고 했답니다.
그때…….
어머니가 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말씀하셨어요.
“어…… 마지막 보고서를…….”
제 호흡이 멈추는 것 같았어요.
“제출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전하.”
아버지는 저를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그 표정을 볼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알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아마도 어린 날 제게 이야기해 주던 그 표정 아닐까요. 아버지조차도 상상하지 못한다는 그 얼빠진 표정. 제가 처음으로 초콜릿을 먹었을 때 지었다는 그 황홀하면서도 아찔한 표정 말이에요.
“이제야 말씀드리네요. 하지만 그 이유는…….”
접혀진 책의 앞부분이 이제야 펼쳐지고 있었어요. 저도 모르게, 제 눈에 눈물이 핑 돌았어요.
“전하께서는, 이미 그때 노력하지 않아도 제 마음에 들어왔기 때문이었어요.”
주름이 곱게 진 어머니가, 마치 스물둘의 소녀처럼 수줍게 웃고 계셨어요.
후기.
치기로 시작했던 5부작을 이렇게 끝내고, 질척거리며 후기까지 쓰게 될 날이 이렇게 왔습니다. 시리즈의 마지막인 다섯 번째 이야기만큼은 자존감 낮던 주인공이 알고 보니 존재 그 자체로 사랑을 담뿍 받아 온 가치 있는 사람이더라, 하는 힐링물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생각대로 잘 되었는지 자신이 없네요.
여러모로 트렌드에도 맞지 않고 인물 간 관계도 복잡한데다가 연작이라 진입 장벽도 높을 수밖에 없으셨을 텐데, 여기까지 함께해 주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히나 순서 상관없이 아무 거나 읽어도 되지만 그러면서도 모든 시리즈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조건을 맞추고 싶었는데, 5부까지 오니까 사실상 독립적인 이야기라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네요……. 부족한 점을 언제나 인식하고 있었기에 응원을 받을 때마다 언제나 황송한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정말로 잘 쓰고 싶었는데 의욕이 능력을 뜻하는 건 아니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8년 처음으로 <꿈속의 기분>이 출간되고 난 후 처음 기획한 대로 모든 이야기를 끝까지 다 털어내어 저 스스로도 정말 기쁩니다.
처음 기획할 때에는, 다섯 개의 이야기 주인공들 특성을 다 다르게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이 첫 번째였습니다. 이 중 하나는 누군가의 취향에 맞으실 것이다, 라는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니 이 중 하나는 누군가의 취향에 정말로 안 맞으시겠더라고요. 멍청하게도 그 사실을 글을 쓰면서 알았습니다. 분명히 뭐 하나는 마음에 안 드셨을 텐데, 혹시라도 다섯 이야기 다 봐 주신 분들이 계시다면 너무나 감사드린다는 말을 다시 한번 고개 숙여 반복합니다.
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해 주신 동아 출판사 관계자님들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많이 짚어 주셔서 부족한 역량의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겠지만, 아마 <꿈속의 기분> 연작과는 아주 다른 성격의 글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4부쯤 왔을 때에는 다시는 이런 복잡한 글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제게는 의미 있는 로맨스판타지 첫 작품이고, 연작을 쓰는 2년 동안 즐겁고 괴로웠던 모든 기억을 간직하려고 합니다.
독자님들께서 제게 주신 행복을 감히 글로 서술할 수조차 없습니다. 여기까지 읽어 주신 독자님들께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행복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