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의 이유-66화 (66/79)

66화.

에필로그

“전하답지 않으세요.”

이베카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름이 아니라 굳이 ‘전하’를 붙인 데에서 이베카가 이 사안을 대하는 태도를 짐작한 다니엘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가만히 쓸면서 약간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로즈리가 이베카에게 그런 식으로 말했다는 게 난 참을 수가 없어요.”

“그게 대체 언제 적 일인데요.”

“그 옛날 일을 왜 수사국은 지금 나한테 보고했나 모르겠어.”

“그건 그래요.”

대헌법 초안이 막 발표된 날, 로즈리가 연무장에 있는 이베카에게 폭언을 퍼부었던 것을 수사국에서는 알고 있는 듯했다. 분명 그곳에 수사국 직원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찌되었건 궁에서 일어난 일이니 마음먹으면 캘 수 있는 경로야 많았다.

수사국이야 워낙에 예전부터 그녀의 안전에 대해 민감했으니 그 대화를 알고 있었다는 것은 놀랍지 않았지만, 그걸 이제 와서 상세한 보고서로 만들어 다니엘에게 올릴 줄은 몰랐다. 한때 서로를 향해 잔뜩 경계한 것은 잊고 오히려 고자질을 하는 것 같은 모양새라서, 이베카는 살짝 웃기다고 생각했다.

“무슨…… 혼내 달라는 것도 아니고.”

“원래 여러모로 거슬렸지만 명분이 없고 형수라 참았을 뿐인데…… 당신에게 상처를 줬다면 얘기는 다르지.”

다니엘이 부드럽게 웃었지만, 다소 서늘한 어조로 말했다.

“가만두지 않을 방법은 너무나 많지. 일단은 궁에서 내보내고…….”

“명분이 없다는 것, 그 분이 전하의 형수님이시라는 건 변함이 없는 사실이에요. 저희는 다른 의견으로 논쟁했을 뿐이고요. 사람이 다 다른데, 의견도 역시 다 다른 건 당연하잖아요.”

이베카는 단호하게 말했다.

“전하께서 거슬리신다는 이유만으로 왕궁에 기거할 권리가 있는 분을 왜 쫓아내시겠다는 거예요? 그런 거 하지 말라고 저한테 법을 만들라고 하신 거잖아요.”

“……그건, 맞지만…… 아…… 젠장.”

다니엘이 말을 고르며 속상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보고서에서 읽은 로즈리의 말들을 떠올리면 그대로 두기에 너무 괘씸했기 때문이다.

‘왕비궁은 본디…… 귀족가에 태어나, 고급 교육을 받고, 태자비 시절을 거친 자들의 자리입니다.’

‘아직 왕궁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그 자리가 얼마나 위험한지도 모르는 듯해서.’

이베카 역시 그 말들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말들이 이제는 그녀에게 그 어떤 타격도 주지 못했다. 아메탄에서 가장 실력자들만 모여 있다는 수사국이 그녀를 비호하고 있는데다가 다니엘 역시 호위를 잔뜩 붙여 주었다. 그래서 결정적인 신변의 위협은 거의 초기에 다 막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왕궁이 무섭지 않았고, 왕비 자리가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 궁은 그대의 공간인데, 누구보다도 당신에게 어울리는 곳인데,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로즈리와 얼굴이라도 마주치면…… 얼마나 짜증이 나겠어…….”

다니엘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배에 손을 얹었다.

“지금은 조금의 스트레스도 안 좋은 시기인데…….”

“스트레스 안 받아요, 마주친다고 해도.”

이베카가 부드럽게 웃으며 나른하게 그에게 몸을 기댔다. 의료국에서 그녀에게 임신을 축하한다는 말을 전한 지 벌써 몇 주가 지났다. 이베카는 별다른 입덧도 없었고 딱히 컨디션 저하도 없는 체질이었지만 모두의 만류로 법무국 출근도 그만두고 주요한 항목만 왕비궁에서 확인하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다니엘, 너무 걱정이 많아요.”

“나는 너무 불안해요.”

다니엘이 그녀의 눈가와 볼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왕비 자리에 욕심 없었던 거 아니까, 그래서 여기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까 봐. 그대의 행복에 방해가 되는,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사람들은 다 없애 버리고 싶어…….”

“폭군으로 역사에 남고 싶으세요?”

이베카가 깔깔 웃으면서 다니엘의 볼을 쓸어주었다.

“그럼 제가 곤란해요. 폭군을 남편으로 둔 법률가 왕비로 기록되기는 싫어요. 애처가 정도에서 멈춰 주세요, 부디.”

“……이베카, 화도 안 나요? 아니, 안 되지. 지금 화가 나면 안 되는 거고…….”

그답지 않게 횡설수설하는 다니엘을 보며 이베카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그땐 화가 났지만, 지금은 진짜 아니에요. 왜냐하면 왕비궁은 제게 행복한 곳이거든요. 귀족가에 태어나, 고급 교육을 받고, 태자비 시절을 거치지 않아도 말이에요.”

이베카는 그녀의 남편을 달래듯 그의 품에 더 파고들면서 속삭였다.

“진짜예요. 두고 보세요. 로즈리는…… 아마 머지않아 이곳이 힘들어질 거예요.”

“무슨 소리예요?”

“외롭고 쓸쓸하고, 혼자라고 느껴지면 본디 오래 버틸 수 없는 법이니까요. 진짜예요. 저를 믿어 보세요.”

아직은 납작한 그녀의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다니엘에게 이베카가 자신 있게 말했다.

“저는 경험자거든요.”

맨 처음 궁에 와서, 모든 사람을 어려워하며 눈치만 살피던 이베카는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이후 점차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시작했다.

수사국 직원들과 다니엘의 사랑으로 안정을 찾은 그녀는 처음에 불편함을 이유로 멀리했던 시녀들과도 교류를 시작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모두 다 자신을 업신여길 것이라는 짐작과는 달리 생각보다 자신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귀족 영애들이 있는 것에 놀랐다.

“모두가 대헌법에 찬성하는 것이 아니듯이 귀족이라고 해서 다 대헌법에 반대하는 건 아니에요, 왕비님.”

그 와중에 친해진 엘레본 자작 부인은 부드럽게 말했다.

“아메탄이 전쟁터가 되는 것보다는 나아요. 혁명 세력들이 둘로 갈려서 싸우고…… 그렇게 피를 보는 건 끔찍하잖아요.”

대헌법의 존재만으로도 아메탄의 분위기는 상당히 많이 변화했다. 무언가 체제에 불만이 있던 엘리트들은 공화주의가 아닌 법치주의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베카는 충분한 소통을 약속함과 동시에 무작정 우기는 권리에 대해서는 확실한 선을 그었다.

합리성, 공정함, 권위에 대한 의심, 동시에 자기 자신의 신념에 대한 의심……. 이베카가 강조하는 것들은 상당히 보편적인 가치였고 그래서 꽤나 많은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자신이 이렇게 시작을 잘 만들어 가면 후대에서 또 시대에 맞추어 더 합리적으로 바꾸어 나갈 것을 믿었다.

그리고 그 길을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분명 있었다.

“그리고 왕비님과 친분을 쌓고 싶어 하시는 영애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저하고요? 왜요?”

“왕비님이시잖아요. 전하의 총애를 받고 계시기도 하고요.”

이베카는 ‘에셀번 집안의 천덕꾸러기’라는 수식어보다 이제는 ‘아메탄의 왕비’라는 지위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도 생겨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 태생은 어쩔 수 없지’라며 고개를 젓는 사람들만큼 ‘그게 무슨 상관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저는 정치에 관여 안 하는데, 저랑 친해져서 무슨 이득이 있을까요?”

그녀는 습관처럼 물었다가, 그냥 입을 다물고 취소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과 사람이 친하게 지내는 데에 이득이 꼭 필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연회에도 나갔고, 티타임에 초대되면 일정이 맞는 한 거절하지 않고 참석했으며 시녀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모두가 그녀에게 호의적인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에셀번 백작가만 해도 그녀와 끝까지 사이가 돈독해지지 않았으니까. 아마 그건 평생 불가능할 것이다. 연회 같은 곳에서 자매들이나 어머니를 만나도 어색하게 인사할 뿐, 마음을 다하는 대화는 하지 않았고 에윌은 더 이상 왕비궁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별로 서운하지는 않았다. 평생을 소 닭 보듯 살아 놓고, 왕비가 되자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태도를 달리하는 것이 더 난감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굳이 가족이 아니더라도 귀족들 중에서는 그녀와 성격이 맞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베카의 왕비궁에 놀러오거나 말상대가 되어 주었다.

“임신 너무 축하드려요, 왕비님.”

“이건 제가 직접 만든 아기 모자예요. 저희 아이 모자도 제가 직접 만들어 주었거든요.”

햇살이 좋은 날이면, 이베카는 꽃들이 예쁘게 피고 단풍이 아름답게 물든 정원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함께 티타임을 갖곤 했다. 추운 겨울이 오기 전 찾아온 아기 덕분에 파란 가을 하늘 아래에서 온갖 축하와 축복을 모두 받을 수 있었다.

왕과 왕비의 첫 아기 소식에 왕궁 전체가 설렘으로 들떠 있었다. 벌써부터 아이 이름을 무엇으로 정할지에 대하여 다니엘과 종친들은 머리를 싸매고 고민 중이었다. 이베카는 출신에 대한 추문은 있었어도 인품에 대한 악평은 없었기 때문에 궁에서 일하는 사용인들도 좋은 마음으로 아기를 맞이할 준비에 분주했다.

“아기 침대와 딸랑이, 그리고 순면으로 된 이불과 베개…….”

“에제트 풀을 잔뜩 심어 두는 게 좋겠어요. 혹시라도 벌레에 물리면 안 되니까요.”

“왕비님 식단은 지금부터 의료국의 검수를 받고, 왕비님께서 드시는 모든 것을 기록해 두도록 해.”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보호와 호의에 이베카는 당황스러운 경우가 많았으나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어딜 가든 축하가 쏟아졌다. 수사국에서는 그녀의 안전에 더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왕비궁 앞에는 아기의 선물들이 쌓였다.

“평민들 사이에서도 얼마나 축하의 메시지들이 쏟아지는지 몰라요.”

레이나는 자신이 뿌듯하다는 듯이 웃었다.

“언제 평민들 사이에서 그렇게 인기가 좋아지셨는지…… 대헌법 때문이겠지만요. 벌써 왕비님한테 ‘제 2의 이브나’라는 별명이 붙었어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새로 태어날 아기에 대한 관심은 수그러들기는커녕 더 증폭되었다. 긴 겨울을 거쳐 봄이 와 이베카의 배가 동그랗게 부풀게 되는 그 시간 내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왕궁에서는 초유의 관심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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