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 * *
이베카는 레이나를 정말 만나고 싶었지만, 레이나가 3개월 정직 및 근신 처분을 받는 바람에 계절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국장이 될 때에 문제가 될 수는 있겠죠.”
승진에 혹시라도 큰 걸림돌이 될까 봐 걱정하는 이베카에게 레이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저도 시드도 국장 될 생각은 없거든요. 그래서 괜찮아요.”
“하지만…….”
“어차피 우리 세대의 국장은 카이든 루스일 거예요. 그 자식도 3개월 정직 처분을 받은 적 있지만 다른 성과가 압도적이거든요. 그러니까 억울하지도 않아요.”
레이나는 호탕하게 웃으며 더 이상 이 화제로 이베카가 불편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확실히 했다. 다시 돌아가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며 못을 박기까지 했다.
이제 막 또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 그들의 대화는 끝도 모르고 이어졌다. 묻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한가득이었으니까.
“궁금한 게 있어요.”
이베카는 레이나에게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때, 굳이 외형을 바꾼 거예요?”
1차 습격 때, 레이나가 본모습이 아니라 굳이 분홍색 머리의 처음 보는 얼굴을 한 채 그녀를 안아 주었던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다.
레이나는 흠, 하고 한숨을 쉬더니 턱을 괴었다.
“……해칠 마음이 없었어도 왕비님을 공격하는 게 저희로서는 꽤 위험 부담이 있는 일이었어요. 잘못했다가는 수사국 전체가 날아갈 수 있으니까요.”
“왜요?”
“수사국이 왕비님을 습격했다…… 다들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처음에 제가 짐작했던 것처럼 생각했겠죠.”
이베카는 천천히 대답했다.
“왕비 때문에 대헌법이 생겨서 수사국이 화가 났다, 뭐 그렇게. 법무국 직원들도 다 그렇게 말했거든요.”
“그러니까 정말 들키면 안 되는, 굉장히 극비의 사안이었다고요. 그런데 증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괜히 말이 나오기 전에 모두 다 외형을 바꿨지요. 혹시나 ‘아, 그때 그 직원이!’ 이런 식으로 누군가 기억해서 아주 작은 빈틈이라도 파고들지 못하게요.”
“수사국…… 정말 철저하네요.”
“그만큼 저희에게는 간절한 일이었답니다.”
레이나가 커피를 마시며 싱긋 웃었다.
“왕비님을 지키는 일이요.”
그녀는 아무래도 차가 좋아지지 않는다며, 직접 수사국에서 커피를 가지고 오곤 했다. 처음에 커피를 처음 맛보았을 때 이베카는 별로 자신의 입맛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결국엔 레이나가 꼬박꼬박 가져오는 커피를 은근 기다리게 되었다.
“저랑…… 많이 친했나요?”
“예.”
레이나는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정말 이런저런 얘기 다 하곤 했어요. 바쁜 와중에, 술도 자주 마시고.”
자신에게 동성 친구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매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친하게 지내는 귀족 영애는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지금도 시녀들과의 관계가 어색하고 무슨 대화를 나누어야 할지 모든 것이 어려웠다.
“무슨…… 얘기를 했어요?”
“아, 뭐 별 얘기 다 했는데, 남자 얘기도 많이 했어요.”
“남자 얘기요? 혹시 전하 얘기였나요?”
이베카의 동그랗게 커진 눈과 붉어진 뺨을 보며, 레이나가 투정부리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왕비님 즉위하시고, 제가 얼마나 전하를 경계했는지 아세요? 진짜 얼마나 속상하던지…….”
“……뭐가요?”
“잘한다고 다독여 주고, 대화를 나눠서 친해지고, 응원해 주고…… 그런 건 다 저희한테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전하가 그렇게 해 주신다고 하면서 너무 황송해하셨거든요.”
“아.”
“엄청 걱정됐어요. 전하께서 왕비님을 살살 구슬려 이용하시는 걸까 봐. 거기에 순진하게 감동하던 왕비님이 안쓰럽기도 하고.”
뭐, 그런 시간들 때문에 다니엘이 급격하게 좋아졌던 건 사실이었다. 이베카는 멋쩍게 웃었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질투였는지도 몰라요.”
레이나는 시원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우리가 어울리던 시간을, 그래서 서로에게 특별했던 그 의미를 전하께 뺏긴 것 같은…… 그런 기분 말이에요.”
* * *
“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요.”
다니엘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 ‘수사국’의 동료들이 얼마나 질투 나던지.”
이베카는 다니엘의 손을 잡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싱긋 웃었다. 아무리 바빠도, 여전히 다니엘은 그녀를 마중 나왔다. 법무국에서 퇴근하고 나오면 그녀의 왕은 언제나 조금도 늦지 않고 같은 자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와 크게 대립하여 쫓겨난 이후, 안리크는 아예 호위무사 직을 그만두고 지방으로 내려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다니엘은 사직서를 받아들이는 대신 긴 휴가를 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절대로 이베카와 마주치게 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꿈꿔 온 자리인데 한 순간의 충동으로 그만두는 것은 그의 인생에 커다란 후회가 될 수도 있다는 배려에서였다.
안리크가 사라졌어도, 다니엘은 그녀와 함께 걸을 때면 그녀가 다른 곳을 보지 않고 자신에게만 집중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니까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선선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좋았다. 이베카는 그 ‘질투’에 대해 묻지 않았다. 어차피 기억이 돌아오면 자세한 건 그때 알게 될 것이다. 그 30년이 별로 크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지금 역시 좋았다.
“다니엘, 저는요…….”
요즈음 들어, 그녀는 그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너무나 어색했지만 그가 간절히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푸른 눈을 보며 이름을 속삭일 수 있었다.
“사실 자매들하고 잘 지내고 싶었어요. 티타임도 같이 하고, 피크닉도 함께 가고, 라인볼도 치고 말이에요. 근데 이제는 그런 게 하나도 상관없어요. 나를 외롭게 했던 사람들에게 매달리는 것이 아니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웃어주는 것이 제 결핍을 채우는 방법이라는 걸 알았거든요.”
이베카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매들이 아니어도, 티타임과 피크닉을 함께하고 늙어서 라인볼을 쳐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저는 이제 아쉬운 게 하나도 없어요.”
맨 처음, 그와 결혼을 결정했을 때 어떻게든 이 결혼으로 에셀번 집안에서 자신을 받아주길 바랐던 것이 사실이었다. 어쩌면 아버지가, 어머니가, 자매들이 자신을 좋아해 줄 수도 있을 거라고…….
그러나 회의에서 빠지며 그 모든 기대가 날아간 지금,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가족들에게 너무 사랑받고 싶었는데…… 이젠 극복한 것 같아요.”
해피 엔딩이란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결핍을 억지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아예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베카, 가족 하니까 생각났는데…… 부탁이 있어요.”
다니엘은 싱긋 웃으며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왕위를 이을 왕족이 아니라면 외국인과 결혼해야 한다는 법이 있잖아요.”
“아, 네.”
아메탄에는 외교적인 문제와 함께 내부 귀족과 연합하여 후계를 위협하는 일이 생길까 봐 왕이 되지 못한 왕족들은 무조건 외국인과 결혼해야 한다는 법이 있었다. 다니엘이 성장 기간 동안 ‘어차피 내 배우자는 얼굴도 모르는 외국인’이라고 생각해 왔던 이유였다.
“나는 언제나 내 형제들이 이해가 안 갔어요. 특히나 사랑하는 여자가 아메탄 국적이기 때문에 왕위에 앉겠다고 펄펄 뛰던 둘째 형……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했나, 사랑에 눈이 돌아가서 미쳤구나 싶었는데.”
“…….”
“이베카를 만나고 나니까, 그 심정이 너무나 이해가 가는 거야…… 상대가 이베카였다면, 나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거예요. 내 형 둘을 죽이고 이 끔찍한 왕좌에 스스로 앉아 그대를 곁에 둘 거야.”
그가 그녀의 입술에 살짝 입 맞추고 말을 이었다.
“내가 결혼을 해 보니까, 역시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하고 해야 해.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그 법은 없애는 게 어떨까요. 여동생의 부탁이기도 했고.”
“네, 그럼요. 당연히 검토해 봐야죠. 어쩌면 사랑도 왕족의 권리인데요.”
이베카는 열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법 때문에 일어났던 비극은 그녀 역시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이전에는 역사가 너무 오래되어 상당히 고치기 부담스러운 법이었겠지만 지금 아메탄은 국가 체계를 완전히 뒤엎을 만한 커다란 개혁을 앞두고 있었으니 그 정도야 어려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라는 말에, 이베카는 참아 왔던 의문을 터트리고 말았다.
“다니엘, 그런데 있잖아요.”
“네.”
“처음에…… 왜 후계를 빨리 보면 좋겠다고 했어요? 나 9월까지 임신 안 되는 거 뻔히 알면서.”
“아…….”
다니엘은 살짝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아내는 관찰력과 기억력이 너무 뛰어나서, 어떻게 대충 넘어간 것 같아도 결국에는 아주 작은 진실까지 알아내고 만다. 그가 민망하다는 듯이 귀를 붉히며 말했다.
“……사실, 이베카가 내 처음이고…… 진짜 밤을 보낸 건 한 번이었거든요.”
“한…… 번이요?”
이베카가 미심쩍다는 듯이 반문했고, 다니엘은 살짝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섯 번이요. 침대에 들어온 횟수로 쳐서 한 번이에요.”
“…….”
“어서 다시 안고 싶은데, 이베카는 너무 순진해 보이고, 두 번째 만나서 달려드는 짐승같이 보이기는 싫어서…….”
“그럼 거짓말 한 거네요?”
“그래도, 약속은 지켰어요. 그날 밤 정신 못 차리고 너무 나 좋을 대로 짐승 새끼같이 달려들어 버려서…… 다음에 정사를 나눌 땐 꼭 이베카가 좋은 대로만 해 주겠다고 약속했거든요. 결혼식 날 밤 필사적으로 참으면서 당신이 좋은지 안 좋은지만 살폈는데.”
계속 좋으냐고 물어봤던 첫날밤을 떠올리며 그녀는 볼을 붉혔다. 그때는 그 질문이 부끄럽기만 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니.
“이 얘기는 30년 후에 마무리 짓도록 해요. 나도 변명할 거리는 있으니까. 분명 이베카가, 다시 자신을 찾으면 비밀도 거짓말도 몇 개 허용해 준다고 했단 말이에요.”
다니엘은 억울하다는 듯이 말하면서도 연신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알았어요.”
이베카는 툴툴거리면서도 피식 웃었다. 자신이 정말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진위는 그 때 가서 밝히면 되니까.
“이 사안은 30년 후에 결론을 내기로 하죠.”
“그때 즈음엔…….”
다니엘은 그녀의 손을 고쳐 잡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은퇴한 뒤에 메나타 호수 근방에서 라인볼을 치고 있겠지. 그거, 내 꿈이에요.”
“……제 꿈이 아니라요?”
“그럼 같은 꿈이네.”
이런 얘기를 나눌 때만큼은, 왕도 왕비도 사라지고 그냥 평범한 부부 같았다.
“우리의 꿈을 이룰 수 있게, 이베카, 나랑 같이 잘 해 봐요.”
물론 그 말에 담긴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아메탄이 전쟁이나 내란에 휩쓸리지 않도록 노력하자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베카는 다니엘이 자신에게 이렇게 부탁하는 것이 좋았다. 자신 역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네. 같이, 잘 해 봐요.”
이베카는 밝게 대답했다. 다소 무거운 주제일 수 있었지만 아무런 위화감도 불안함도 없었다.
그녀도, 그녀의 남편도,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