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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이유-64화 (64/79)

64화.

그 말에, 나는 눈물이 울컥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홀로 쌓아 왔던 성이 무너지고, 혼자 견뎌 왔던 시간들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 이후 너무 오랜만이어서 생소하기까지 한 감각이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이브라고 불러.

그리고 이제 그 이름으로 부르고 싶지도 않아.

네가 괴롭지 말라고, 자꾸만 더 주눅 들고 힘들어하지 말라고 숨긴 진실이지만…… 어쩌면 수사국과도 관련되어 있는 것 같아 숨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애정은 관성, 순정은 자기기만, 욕정은 환상.’

내게는 애정도 너, 순정도 너, 욕정도 너뿐이니까.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그냥 너라는 그 사람 자체.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30년, 40년, 아니 50년이 흘러서 들려주려고 했던 그 많은 이야기들을.

10. 결말

루카스와 다니엘은 서로 묘한 관계였다. 서로의 전문성과 능력을 인정하지만, 그래서 절대 믿지 않는 사이이기도 했다. 그 불신을 적나라하게 표면에 올린 것이 리한 카드민 암살 사건이었다.

그 이후에도 직접 부딪힌 것은 아니지만 이베카를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계속 하고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왕비궁으로 향하는 길에 마주친 그들은 서로 어색하게 예의를 차렸다. 둘이서 알현실이 아니라 길에서 만난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전하께서도 티타임에 초대되셨습니까?”

“예. 아마도 우리가 이베카의 첫 번째 티타임에 초대된 주인공들 같군요.”

이베카가 티타임을 연다며 정식으로 초대장을 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들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나란히 걸었다.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깬 사람은 루카스였다.

“왕비님께 붙여 두었던 직원들이 적절하지 않은 언행을 한 모양이더군요.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비밀을 노출했다는 죄목으로, 둘 다 3개월 정직 및 근신 처분을 내렸습니다. 추가로 6개월 감봉 조치까지 할까 내부 논의 중이고요.”

“애초부터 이베카에게 친한 동료들을 붙여 놓고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렸다며 징계를 내리는 게 모순 아닙니까?”

“하지만 그들이 너무 원해서…….”

“개인적인 의견인데, 6개월 감봉까지는 하지 마세요.”

다니엘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이베카를 암살 위협에서부터 지킨 공로도 있으니까.”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루카스는 다니엘이 저렇게 부드럽게 웃을 때에는 꼭 만만치 않은 소리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눈앞에 왕비궁을 두고, 다니엘은 상냥하게 말했다.

“이제 이베카를 앞에 두고 거짓을 말하지 마세요. 어차피 이베카는 그 틈을 파고들어 결국엔 진실을 알아낼 테니까.”

“흠.”

“수사국의 강령이 어떻든 간에 더 이상 이베카를 피곤하게 만들지 맙시다. 이베카를 속이는 건 정말 어렵고, 그게 선의든 아니든 그 과정에서 자꾸 상처받는 것 같아서 말이죠.”

다니엘의 나긋나긋한 말투에 숨겨진 서늘한 경고를 알아챈 루카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명에 따르겠습니다.”

적당히 합의한 두 사람은 그 이후 침묵을 지킨 채 왕비궁에 나란히 들어갔다.

“어머, 같이 오셨네요.”

이베카는 초조하게 두 사람을 기다리다가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앞에서 만났습니다.”

“앉으세요, 일단.”

자신의 앞에 나란히 앉은 두 남자를 보며 이베카는 차를 직접 내려주고 간단한 근황 이야기를 소소하게 건넸다. 하지만 어색한 분위기는 풀어지지 않았다.

루카스와 다니엘은 그 동안 수많은 사안들을 함께 해결해 오면서 각자의 영역을 충분히 존중해 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은 상당히 서로가 껄끄러운 얼굴을 하고 있어서 이베카는 살짝 난감했다.

결국 얼른 본론에 들어가야겠다고 판단한 그녀가 살짝 한숨을 쉬고 차분하게 말했다.

“저희가, 이제 오해를 풀어야 할 것 같아서 이 자리를 마련했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조곤조곤 설명했다.

“솔직히 기억은 안 나는데요……. 전하와 수사국 직원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짜 맞추면 어느 정도 그림이 나오거든요. 근데 여기서 오해가 있으면 서로가 불편하잖아요. 보니까 저와 전하도, 저와 수사국도, 수사국과 전하도 다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베카.”

다니엘은 우아하게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당신의 안전에 관해서는 누구든 경계하고 싶습니다. 수사국을 어떻게 믿습니까? 비기가 들킬까 봐, 수사국의 권한이 줄어들까 봐 당신을 없앨 수도 있으니까요.”

“전하.”

루카스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평소 감정과 생각을 잘 드러내지 않는 다니엘이 이렇게 명백히 날을 세우는 모습을 본 그는 내심 놀란 상태였다.

“저 역시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왕비님의 안전에 대해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건 저희라고 봅니다. 저희가 전하를 어떻게 믿겠습니까? 물론 두 분이 그리고 계시는 국가의 큰 그림은 알겠습니다만 왕비님의 안전에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니었죠.”

하지만 명백하게 드러나는 그 예민함이 오히려 만들어진 상냥함보다는 훨씬 편안하다 생각하며, 루카스는 질 수 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저희는…… 전하께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실 분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특히나 그 대상이 이용 가능성이 충분한 왕비님이시라면 더.”

“……루카스.”

“저는 그냥 수사국 회의 결과를 말씀드린 겁니다. 아,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카이든 루스는 이 의견에 반대했습니다.”

“대체 누가 그런 어이없는 말에 동의한 겁니까?”

“……나머지 전부요.”

“하.”

다니엘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베카는 자신도 모르게 풋, 하고 웃고 말았다. 하긴 누구나 다니엘을 그렇게 평가했다. 안리크와 에윌, 심지어 자신조차도. 그는 일관적으로 그녀에게 따뜻함을 말했지만 그걸 믿지 않은 건 자신이었다.

그러나 어젯밤, 이베카는 그의 눈물을 보았다. 이야기를 모두 마친 그가 그녀를 끌어안고 소리도 없이 뜨거운 눈물을 한참동안이나 흘렸던 것이다.

그런 사랑을, 그런 순정을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는 것이 서운할 법도 한데 다니엘은 자신의 억울함보다는 그녀의 마음이 혹시라도 흔들릴까 봐 더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저희는, 전하께서 진심으로 왕비님의 안전이 걱정되셨다면 수사국에 요청을 먼저 하실 줄 알았습니다.”

“……수사국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요청을 합니까. 그리고 1차 습격이 수사국 소행인 건 사실이라면서요.”

“저희는 전하를 믿지 못해서 직접 나설 계기를 만든 겁니다. 수사국 직원들이 왕비님을 직접 구해 주는 그림이 나와야 저희를 붙이실 것 같아서요.”

어느새 공격적으로 맞붙어 버린 대화에 이베카가 한숨을 쉬며 테이블을 잠시 두드려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두 분이서 평행선을 달리라고 부른 것이 아니에요. 저는 그냥 오해를 푸시라고…… 혹시 제가 성급했나요?”

이베카의 조심스러운 말에 서로 대치하고 있던 두 남자는 둘 다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오해 풀고 있어요, 이베카. 싸우는 것 아닙니다.”

“왕비님, 대화 중인 겁니다. 괜찮아요.”

이베카는 결국 조용히 웃고 말았다. 모든 것은 서로를 경계한 탓이고, 서로가 더 이베카를 지키고 싶어 안달복달하다가 만들어진 결과였다.

“그런데…… 음…… 저는, 사실…… ‘이브 진’이 아니잖아요.”

그녀가 찻잔을 쥐고 말하자 다니엘과 루카스의 표정이 굳었다.

“수사국에 더 이상 도움이 되는 존재도 아니고, 전하와 함께한 기억도 없는데 대체 왜 그렇게 굳이 저를 지키려고…….”

“왕비님.”

루카스는 싱긋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브 진’의 ‘진’은 제 성을 따른 거랍니다. 그땐 그냥 별 생각 없이 붙인 성이고 국장의 입장에서 누군가를 편애할 수는 없었지만, 저는 왕비님이 친딸 같았답니다.”

“아.”

다니엘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몸을 뒤로 기대며 중얼거렸다.

“친딸 같은 직원을 혼자 전쟁터에 보냈지.”

“사랑하는 왕비님의 이름으로 대헌법을 발표하신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지요.”

“…….”

난생 처음으로, 루카스는 다니엘이 그 나이대의 젊은 청년으로 보였다. 그 동안은 속을 알 수 없고 빈틈이라고는 전혀 없는, 마치 책에서 나온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이베카에 관련된 일 앞에서만큼은 인간적으로 허물어지는 듯한 그가 이상하게 뿌듯했다.

“사람이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데에는…… 효용성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왕비님.”

이베카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아서 눈을 깜빡거렸다. 자꾸만 아니라고 뒷걸음치는 자신에게 다니엘이 매일 해 주었던 말이었다.

“수사국에 도움이 되지 않으셨어도, 동료로 함께했던 그 모든 기억들이 사라지셨어도, 저희를 하나도 알아보지 못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대답이 되었을까요?”

눈물을 참으며, 그녀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지금 그녀는 그냥 존재만으로도 사랑받고 있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안정감이, 사랑과 행복에 대한 확신이 따뜻하게 그녀의 몸을 감쌌다. 늘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언제나 초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고 있던 수많은 시간 동안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를 너무 소중히 여긴 나머지, 서로를 믿지 않고 있던 두 남자 사이에서 이베카는 결국 환히 웃고 말았다. 서로 대화도 제대로 나누지 않았던 두 사람이 그녀에게 하는 말들이 너무나 똑같아서 이제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었다.

“네…… 감사해요, 두 분 다.”

만일 그녀가 기억을 잃은 ‘이브 진’이라는 이유로 어느 날 갑자기 왕비가 되고, 수사국의 비호를 받았다면 굉장히 불행했을 것이다. 자신은 알지 못하는 과거와 비슷해져야 버림받지 않는다는 초조함 때문에 모든 것이 불안하고 힘겨웠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갔을 뿐인 ‘이베카’에게 뭐든 괜찮다고 말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베카는 앞으로도 그냥 그렇게 살기로 했다.

그녀는 여전히 에셀번의 성을 가졌지만 마구간지기의 딸일 가능성이 높고, 앞으로도 사교계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왕비로 남을 것이다.

이런저런 비밀스러운 업무에 투입되는 수사국 직원이 아니라, 매일같이 법전을 뒤적이며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끙끙거리는 법무국 직원으로 살 것이다.

‘이브 진’의 말투라든가 성격이라든가 하는 것들은 잘 모르겠지만, 상관없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런 걸 상관없어 하는 것처럼, 그녀는 이제 그녀의 삶을 열심히 살면 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있을 수도 있고, 잘 해내지 못할 수도 있고, ‘이브 진’처럼 어떤 임무에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그런 건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처럼, 그녀 역시 그녀를 사랑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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