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그냥, 상관없는 것이 사랑이었던 듯해요.’
그녀의 말은 다 옳았다.
‘상관없었던 것 같아요.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 되어도.’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이유가 있어서 그녀를 사랑한 건 아니었다. 이렇게 맹목적인 감정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내 모든 감정과 행동에는 넘칠 정도의 논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보고 있자면 그 어떤 이유도 생각나지 않고, 그저 다 상관없다는 마음만 들었다.
오히려 그녀의 약하고 어두운 과거를 다시 함께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 혼자서 이겨 내야 했을 그 수많은 시간들을 내가 무조건 옆에서 같이 다독여 줄 수 있어서.
다시 내가, 너를 정말로 행복하게 만들어 줄게. 이 모든 길이 너를 위험하게도 하고 힘들게도 하겠지만, 너는 그렇게 해야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녀를 회의에 절대 오지 못하게 한 것은, 험한 꼴은 나만 보고 싶어서였기 때문이다.
엄청난 개혁을 이뤄 낸 이브나 왕비처럼, 그녀는 아메탄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이다.
그리고 마치 카를 왕처럼, 나의 가장 큰 업적은 그녀를 발굴한 것이 되겠지.
“옷차림이 이래서…… 다 보여 드리지는 못하지만…….”
어느 날 연무장에서, 그녀는 정렬된 무기들 중 단검을 두 개 빼들고 망설임 없이 던졌다. 작은 단검이 과녁의 중앙에 차례로 정확히 박혔다.
바로 이 자리에서, 그녀는 더 이상 단검을 던지지 못하겠다며 덜덜 떨었는데. 차마 그녀의 손을 떠나지 못하는 단검을 바라보며 내 마음까지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트라우마까지 모조리 잊은 그녀가, 마치 예전처럼 환하게 나를 보며 뿌듯한 듯 웃고 있었다.
나는 혼자만이 갖고 있는 기억을 상기하며 살짝 서러워졌다.
애초에 열의가 없었던 왕위였고 어릴 때부터 어떤 왕이 되겠다고 깊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진정한 목표는 단 하나였다. 그녀가 다시 전쟁 같은 끔찍한 일에 휘말리지 않고, 평화롭게 늙어 나와 라인볼을 치는 것.
그녀의 인생이 내 곁에서 아름답고 평온하게 흘러가는 것.
나는 뼛속까지 나와 이베카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왕이었다.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이 시대를 변화시켜 주어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이베카였다.
-6-
내게 혼자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외로움과 쓸쓸함은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느낌을 받아서는 안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최선을 다했다. 물론 그녀가 나를 불신의 눈으로 바라볼 때면, 여전히 주눅 든 모습으로 ‘효용성’ 같은 이야기를 하면 속이 답답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건…… 분노가 아니라 슬픔이었다.
네가 나를 기억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보낸 그 많은 시간들을 함께 이야기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일방적인 감정으로 너를 곁에 두지 않아도 될 텐데.
다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시간이 흘러야 할 수 있는 말들이 있다.
그녀와 함께 나누고 싶은 기억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 못한 말도 너무 많았다.
메나타 호수가 그렇게 아름답다는데, 그날은 물결에 비치는 노을보다 네가 더 예뻤던 것…… 네가 보고서를 가져오던 그 오후, 티 푸드를 준비하며 미친 듯이 설?던 것…… 지금 생각하면 도란도란 나누었던 대화 속에서 서로의 호감이 분명했다는 것…… 네가 다시 단검을 잘 던지게 되어서 너무나 마음이 찡하다는 것…….
뭐 하나 간절하지 않은 게 없는데, 수많은 전하고 싶은 말을 묻은 채 나는 그녀의 주변을 경계해야 했다.
대헌법에 이름을 올린 그녀가 위험해진다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았고, 그녀에 있어서는 그 무엇도 믿을 수 없었다. 그건 대헌법이 대폭 권리를 감축시켜 버릴 수사국도 포함이었다. 나는 수사국이 여전히 그녀를 동료로 지켜 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가장 실력이 좋은 안리크를 그녀에게 붙일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혼자 그녀를 기억하고, 혼자 그녀를 지켜야 했고, 혼자 그녀를 사랑해야만 했다.
‘사람을 혼자 사랑하면 많이 쓸쓸해지는 것 같아요.’
필연적으로 나는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끌어안고 있는 우리의 기억은 나만의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그녀가 괴로워질까 봐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내 마음의 일부만 표현해야만 했기 때문에.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괴로움과 외로움, 전하지 못하는 마음에 대한 답답함과 서러움, 문득 울컥 솟구치는 억울함과 끝없이 쏟아지는 생각들…….’
내 품에서 잠든 그녀를 바라볼 때면 가슴이 죄어드는 것같이 기분이 묘해졌다. 안리크는 그녀를 ‘이브’라고 불렀다. ‘이브 진’이라는 이름도 그와의 기억에서 만들어 낸 가명이겠지. 나는 그녀를 다시 ‘이브’라고 부를 수도 없고 또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랑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이 나를 그렇게 쓸쓸하게 두도록 가만히 두겠어요.’
나는 혼자와 외로움과 쓸쓸함과 그런 것들에 익숙했다. 그런 건 당연한 거였다.
그러니 아주 오랫동안, 이렇게 혼자서 쓸쓸해도 괜찮았다.
어차피 끝이 있는 기다림이었다.
-7-
마력은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이브나 왕비의 고대 마법 역시 풀릴 것이다.
정보국에서는 아마도 30년이라고 예상한 보고서를 보내 왔다. 물론 예측일 뿐이고 40년, 50년이 걸릴 수도 있었다. 이런 사태는 우리 모두 처음이니까.
그녀가 습격 받은 이후, 나는 법무국까지 매일 그녀를 마중 나갔다.
나는 굉장히 바빴고, 궁에서 법무국까지의 길은 꽤 멀었고, 그녀가 오는 시간에 맞추어 혼자서 그 길고 긴 길을 걸어야 했다.
“전하, 이 먼 길을 어찌…….”
그녀가 기억을 찾고, 이 모든 이야기를 해 주려면 아직도 먼 길이 남아 있었다.
“빨리 보려고 일찍 나왔어요. 기다리기 힘들어서.”
혼자서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도 있었다. 네가 기억을 찾아서 내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함께 있고 싶어서.
“그래도, 홀로 걸으셔야 할 길이 꽤 길었을 텐데…….”
나 혼자 이 모든 기억을 안고 기다려야 하는 날들이 과연 30년일지, 40년일지, 50년일지 모르겠지만…….
“그런 건 상관없고.”
상관없었다.
“올 땐 함께 오지만, 저를 데리러 오시는 길은 혼자 걸으시는 거잖아요. 마중이라는 건 그만큼 일방적인 거고…… 또 그만큼 외로우실 거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가장 외로울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매일같이 느꼈다. 그래도 그녀를 사랑하기에 느끼는 외로움이니 괜찮았다.
“법무국으로 가는 길에, 돌아오면서 이베카에게 이것저것 해 줄 이야기를 생각하느라 하나도 외롭지 않아요. 반드시 다시 이 길을 함께 걷는다는 확신이 있으니.”
아주 먼 훗날, 그녀가 모든 것을 기억해 냈을 때…… 그때에는 해 줄 이야기가 정말 많을 것이다. 아직 말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우리의 첫 만남에서부터 결혼 생활까지. 내가 어떤 마음으로 늘 그녀를 곁에 두었는지, 무슨 생각을 하며 기다렸는지 모두 말해 줄 것이다.
결국엔 왕비 자리에 앉혔다며 그녀가 투정을 부리겠지만, 어쨌든 텔시 집안의 몰락 귀족과 결혼하여 산하기관을 그만두는 것보다는 낫지 않았냐며 뻔뻔하게 웃어 보일 것이다.
화를 내면 풀릴 때까지 빌 것이고, 민망해 하면 더 민망해질 때까지 안아 줄 것이다.
그때에는 내가 너무 많이 늙어서, 그녀가 가끔 나를 바라보며 지어 보이던 황홀하다는 표정이 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마중 나와 주시는 거, 좋아요.”
다행히 그녀는 내가 마중을 나가는 것을 좋아해 주었다.
“오는 길에 다치지 말라고, 헤매거나 낯설어 하지 말라고, 그리고…….”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너는 내게 오겠지만, 그게 언제든 나는 무조건 기다릴 수 있지만…… 괜히 이상한 놈에게 가서 다치거나 힘들어 하면 안 되니까.
“혹시나 다른 곳에 가지 말라고요.”
그러다 영원히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가면 안 되니까.
그녀는 언제나 아무 생각 없이 현재를 말했지만, 나는 모든 걸 다 기억해 두었다. 언제나 내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것은 혼자만의 과거와 아득한 미래였다.
“고마워요, 이베카.”
“뭐가요?”
“좋다고 해 줘서. 꼭 기억해 줘야 해요.”
나중에 그녀가 따지고 들거나 혹시나 너무 슬퍼하면, 그저 나는 30년 동안 마중을 나간 것뿐이라고…… 그녀도 그걸 좋아했다고 변명처럼 말하며 또 다시 매달릴 것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내게 결혼의 이유를 물었다.
그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모습이든, 그 어떤 시간이든, 곁에 두지 않으면 내가 못 견딜 만큼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 유일한 내 결혼의 이유라고.
-8-
그녀가 어떻게 ‘이브 진’을 알았는지 알 수 없다. 나는 그녀가 그 이름을 알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고 자신에게 그렇게 따뜻하게 대하는 줄 알았다고…… 정말로 내가 그녀를 이용하는 줄 알았다고…….
나는 정신연령이 고작 열여덟에 불과한 그녀를 보며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녀가 이 정도로 무언가를 숨기면서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잔뜩 내는 성격일 줄은 몰랐다.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기만적인 일인가.
그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는데. 그래서 결국 너를 찾아냈다고, 내게 너는 그 정도로 유일하다고 자랑하고 싶었는데, 정작 그녀의 속이 썩어 들어가는 걸 전혀 몰랐다.
“저는 전하를 사랑하거든요. 진심으로요.”
비록 그녀의 외양은 다르게 바뀌었지만, 예상치 못한 담담하고 당당한 고백으로 내 마음을 헤집는 것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다른 여자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해도 옆에 있고 싶었어요. 제 속이 썩어 들어가고, 영혼이 망가지는 느낌이 들더라도요.”
어쩌면…… 서로를 더 알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준 상처에 괴로워하는 것이 사랑일지도 몰랐다.
“이브라고 불러 주세요,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