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서로가 서로의 바닥을 확인하며 눈물을 핥고, 지금 당장이라도 머리가 하얘질 것 같은 쾌락을 함께했던 밤의 기억도 오직 내게만 남았다.
한때는 달콤한 티 푸드 사이로 매일같이 꾹꾹 눌러 담은 마음을 서로 숨긴 채 설렘을 주체하지 못한 사이였는데도, 서로 사랑한다며 내 침실 위에서 뜨겁게 체온을 나눈 지 한 달이 넘어서야 겨우 만날 수 있었는데도…….
햇살이 눈부신 이 정원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지금, 이 떨림과 전율은 나만의 몫이었다.
나는 그녀를 꽉 끌어안고,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냐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마음속에서 온갖 폭풍이 몰아쳤다. 혼자만의 기억은 나를 끔찍하게 외로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토록 간절했던 그녀가, 나를 그 누구보다도 외롭게 하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그녀를 이렇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녀는 불편한지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내 인생에 얼마 없는, 아주 충동적인 일이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고, 너무 간절히 그녀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저와 결혼하는 건 어떻습니까?”
사실 청혼까지 생각하며 온 건 아니었다. 그저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었다.
“잘 모르는 텔시 집안의 약혼자나, 잘 모르는 국왕이나 비슷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사랑하지 않는 약혼자와 결혼하느니, 내 곁에 있어 줄래. 네가 원하는 것은 내가 모두 다 줄게. 네가 다시 행복하게 웃고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이런 불행한 얼굴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내가 모든 걸 다 해 줄게.
“대체 저를 왜…….”
“그 이유는 에셀번 백작에게 들으세요. 충분히 알고 있을 겁니다.”
어차피 내가 중립 귀족가와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은 암암리에 완전히 다 퍼져 있었다. 안 그래도 뮤엘튼 공작가 때문에 위태위태한 에셀번 백작가에서 이 혼사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사라져 버린 네 4년…….
네 가족, 네 친구, 네 동료, 네 자존감, 네 일…… 모두 내가 다 줄 테니까, 그렇게 세상을 다 포기한 얼굴로 살지 않아도 돼. 다시 네 날개를 펴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내가 다 길을 깔아 줄 테니까.
네가 버리고 간 이 캄캄한 길 속에서, 나는 너의 행복을 위해 내가 뭐든지 다 할 테니까.
‘저는……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좋아요. 이름을 새길 수 있다면 당당하게 길이길이 남길 수 있는 그런 일.’
나는 너에 대해서, 정말 많이 알고 있거든.
“그대에게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산하기관인 법무국을 그만두지 않는 것.”
네가 잘 할 수 있는 일도 알아. 내게 네가 보여 준 길이 있으니까.
‘그래도 법이 지도자의 위에 있다는 사상이라니까, 지도자가 큰 잘못은 못하겠지요. 개인적으로는, 무생물을 모든 인간의 위에 둔 것이 비인간적이면서도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만이 할 수 있는, 네 이름을 새길 수 있는, 쓸모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이브나 왕비만큼 당당하게 길이길이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또 그래서 우리가 늙어서 라인볼을 칠 수 있게.
반쯤은 정신이 나가서, 그녀를 또 다시 놓칠 수 없다는 욕망이 너무 커서, 그녀의 우울한 얼굴을 보니 어쩔 수 없이 드는 충동으로 청혼했으나 나는 침착했다.
부정하려고 해 봐도,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녀를 배려해야 함을 알아서 늘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생각했던 길이었다.
‘기억 지우기만 해 봐. 그럼 정말로 어떻게 해서든 왕비로 만들 테니까.’
나는 원래 선량하고 온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이기적인 계산이 너무 빨랐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욕망과 합리화 앞에서 나 자신이 싫고 짜증날 만큼.
‘나 혼자만 알고 있는 비밀 몇 개와…… 내게는 너무 쉬운 거짓말 몇 개로…… 널 놓지 않을 거야.’
그녀를 위해 모든 걸 다 해 줄 각오가 되어 있었으나 그 또한 나의 욕망과 이기심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내게 머물러 줘. 곁에 있어 줘. 혼자 두지 마. 아무 데도 가지 마.
네가 메나타 호수에서 먼저 손을 잡아 주었을 때부터, 나는 언제나 네가 필요했어.
-5-
카이든이 가져온 세부 보고서를 보며 나는 완전한 확신을 얻었다.
모든 것이 들어맞는다. 고등학교의 공백, 조기 입학과 4년의 시간에 따른 나이, 성장 배경.
‘당신이 사랑하는, 당차고 유능한 수사국 직원 이브 진은…… 이제 세상에 없어요. 예전에 말씀드린 적 있지만, 저는 원래 음침하고 우울한 애였어요. 효용성이 떨어진 지금, 저는 이미 옛날로 돌아왔어요. 자존감도 낮고, 자신감도 없고.’
내가 어디까지 아는지 몰라 카이든은 계속해서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우리는 그녀에 관해서는 서로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미 ‘이브 진’이 세상에 없다는 걸 내게 말한 적이 있었고, 나는 이제야 그 뜻을 제대로 알았다.
“내가 개인적으로 부탁했던, 그 여자의 행방은?”
나는 이베카를 왕비로 맞이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수사국의 의중을 물었다. 아마 내 모든 짐작이 맞는다면, 카이든은 나와의 우정보다는 일단 그녀의 비밀을 지키려고 할 것이 뻔했다.
“찾고 있습니다.”
대답은 짧고 간결해서 다소 성의가 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네가 아직도 못 찾았다는 것이 이상한데.”
“……주제넘게 충언을 올리겠습니다. 계획대로라면 곧 왕비님을 맞으시게 됩니다. 아직 식도 올리지 않았고 이렇다 할 불화도 없는데, 일단 그 여자는 잊으시는 편이 좋지 않으실까요.”
“아.”
그게 수사국의 입장이라는 건가.
이베카를 왕비로 올린다니 말릴 수는 없지만, 이브와 연관 짓지는 말라……. 무뚝뚝한 목소리에서 나에 대한 불신이 묻어 났다.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무슨 생각인지 그들 역시 불안해하고 있는 듯했다.
“왕비 외에 비는 들이지 않을 거야. 선대에 그 난리를 피웠는데 내 대에 똑같은 일이 벌어지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니까.”
“그렇다면 그 여자를 왜 찾으시는 겁니까.”
“네가 못 찾는 게 이상해서.”
여유 있게 한 번 더 비꼬았으나 그는 죄송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만일 그때 카이든이 사실대로 내게 다 말했다면 나 역시 진실을 털어놓을 수 있었을까.
그녀 역시 끝까지 수사국 직원으로 내게 비밀을 지켰으니, 나 역시 카이든에게 서운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를 곁에 두는 일조차 철저히 혼자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을 뿐이었다.
물론 안리크가 그녀의 첫사랑이라는 것은 짐작조차 못했다. 내 앞에서 그녀의 어린 시절을 설명하던 그의 다소 상기된 어조를 떠올리자 가슴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었다.
‘정말로 좋아했다고 생각한 사람은 하나였던 것 같아요. 오히려 그 사람과는 데이트조차도 해 본 적이 없지만.’
그때 가볍게 넘겼던 그녀의 그 ‘한 사람’이 안리크였다니.
내가 그녀를 왕비감으로 지목한 뒤, 그녀에게 붙은 수사국 직원은 바로 새 보고서를 내왔다. 안리크와 만났으며, 함께 도망가자는 말을 했고, 수사국이 붙었을 것이라는 안리크의 말에도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고.
뭐가 당차지 않다는 건가.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머리를 싸맸다. 다소 주눅 들어 있을 뿐이지, 제 뜻이 분명한 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왕비 자리가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도.
“한 번 잊을 수 있었다면 두 번도 잊을 수 있겠지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다. 한 번 들었다면 두 번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에게 민폐가 될까 봐 차마 쏟아붓지 못했던 사랑을 다 줄 수 있다는 생각에 그깟 질투심이야 마음에 묻어 둘 수 있었다.
이제 그녀를 평생 내 옆에 둘 수 있으니까, 뭐든 괜찮았다.
그렇게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와 결혼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녀를 왕비궁에 앉히고 온갖 좋은 것들에 둘러싸이게 한 뒤 아무것도 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전쟁에서 혼자 살아 돌아온 것을 생각하면 미친 듯이 불안했고, 갑자기 어느 날 사라져 버린 것을 떠올리면 입이 바짝 마를 정도로 초조했다. 바빠서 정신없는 와중에도 어떻게 해서든 그녀가 내 옆에 있다는 것을 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냥 그녀의 존재 그대로만도 괜찮다고, 내 옆에만 있어 준다면 그 어떤 모습이어도 좋다고 몇 번을 말해도 그녀는 몇 번이나 내게 결혼의 이유를 물으며 불안해했다.
자꾸만 효용성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모습은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이 사안을 해결해 주지 않으면 그녀는 내 옆에서 행복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녀에게 법을 만들어 달라 부탁했다.
솔직히 그녀가 잘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녀의 신분과 이름과 위치가 정말로 도움이 되는 개혁이었으나…… 굳이 그녀를 끼우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입헌군주제의 모습은 어차피 다른 방식으로라도 구현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비난과 위험에 노출될 것은 뻔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예전의 모습이 사라져서, 다니엘의 마음이 식을까 봐 전전긍긍하며 사는 삶은 제게 지옥이에요.’
우리는 사실 만난 적이 있다고, 내가 너를 너무나 사랑해서 곁에 두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고, 어느 날 운명처럼 네가 내게 와 사랑도 배려도 또 그만큼의 괴로움도 가르쳐 주었다고 말하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 그때의 자신이 아니라 실망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말 한 마디 한 마디도 조심할 것이다.
지금의 그녀는 너무 경계심이 강하고 자존감이 낮았다. 함부로 예전의 그녀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가뜩이나 잔뜩 움츠린 고양이 같은 그녀가 고통스러워 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나는 ‘이브 진’의 이야기를 숨기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나는 그녀가 단검을 잘 던져서, 외모가 귀여워서, 당찬 말투가 마음에 들어서 좋아한 것이 아니었다.
뭐, 그런 것들이 처음 호감을 지니게 한 데에 영향을 줬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사랑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