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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이유-61화 (61/79)

61화.

‘귀족가의 혼사는 당연히 중요한 전략입니다. 역사적으로, 잘 맺은 혼약으로 위기를 벗어난 가문들이 많습니다. 자기 인생 하나 살고 끝나는 산하기관 직원들과는 애초부터 그 무게가 다릅니다. ……산하기관 직원들이나 가끔 왕족들까지도 귀족 영애들을 무시하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에게 처음으로 흥미가 동했던 대화였다. 산하기관 직원이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귀족 영애를 이해한다는 발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었다. 그래서, 온갖 위치의 사람들을 다 대변할 수 있겠거니 생각하여 법무국과 잘 어울린다는 얘기를 했었던 기억이 있었다.

“안리크.”

“예.”

내 뒤에 있던 호위무사가 즉시 대답했다. 딱히 그에게 관심을 가져 본 적은 없었지만, 궁에 들어오기 전 에셀번 백작가에서 몸을 의탁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에셀번 백작가에 딸이 다섯이 있던가요.”

“예, 그렇습니다.”

“다 결혼을 했습니까?”

“위의 둘만 했습니다.”

“나머지는 약혼자가 있나요?”

“아마도 아래의 둘은 혼담이 오고가는 상대가 있는 걸로 압니다.”

“나머지 하나는?”

“……모릅니다.”

“모른다니?”

“셋째 영애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수사국에 들어가 행방이 묘연합니다. 저도 백작가에 가지 않은 지 오래되어 최근의 소식은 잘 모릅니다.”

“행방이 묘연하다고? 왜 그런 독특한 진로를 선택했을까요.”

“그냥…… 정략혼을 하고, 귀족 사회에서 에셀번의 이름을 단 채 식물처럼 사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평소 과묵한 성격답지 않게 안리크의 말이 길어졌다. 잠시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함께 자란 시간이 있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넘겼다. 나는 시종이 가져온 간단한 신상 조사서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베카 데 에셀번은 출신 고등학교가 없었다. 바로 대학에 입학했다는 뜻이었다.

‘아메니티 출신이 아닌가 봐?’

‘네?’

‘왕립 고등학교 학생이라면 당연히 여기를 알 텐데.’

‘아…….’

그녀와 아메니티 시내로 잠행을 나갔을 때, 전혀 고등학교 생활에 문외한이던 그녀를 떠올리며 나는 턱을 괴었다.

아무래도 ‘이베카 데 에셀번’을 만나 봐야 할 것 같았다.

나의 시종은 카이든처럼 대단히 중요한 정보를 얻어 올 능력은 없었지만, 멀리서 ‘이베카 데 에셀번’을 내게 가르쳐 줄 정도는 되었다.

“저 여자입니다.”

나는 갈색의 법무국 제복을 입고 퇴근하는 여자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낯선 이목구비에 자신 없는 걸음걸이, 어딘가 불행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새까맣게 검은 머리카락이 노을에 비쳐 반짝거렸다.

아마 눈앞에서 마주치더라도 아무런 감흥 없이 지나쳐 갈 법한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련한 듯한 보랏빛 눈동자를 보았을 때,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기 이 문장, 고든 에머슨의 부상 관련해서…… 카이든이 변장을 들킨 이유가 눈 색깔이라고? 자세하게 말해 봐.’

‘……수사국에서 아무리 외관을 바꾸더라도 눈 색깔은 못 바꿉니다. 카이든의 새까만 눈동자는 워낙에 흔치 않다 보니까…….’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수사국이 그녀를 내게서 숨겨야만 했던 이유,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면서도 절대로 왕비 자리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은 이유, 내게 아무 말도 없이 잔인하게 기억을 지워 버릴 수 있었던 이유, 수사국에 들어갔다던 에셀번 백작가의 셋째 영애가 오랫동안 행방불명이었던 이유.

그녀가 이 캄캄한 길에 나만 홀로 두고, 잔인하게 멀어진 이유.

-3-

내게는 인생에 ‘남들과는 다른 당연함’이라는 것들이 많았다. 왕족의 피를 이었기 때문이다.

사랑 같은 걸 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왕자 시절에는 형을 위해 얼굴도 모르는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이 당연했다. 생일을 3일 늦추는 것이 당연했고,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에 침묵하는 것이 당연했고, 혹시나 태자인 형에게 민폐라도 끼칠까 봐 존재감 없는 그림자처럼 사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혼자라는 것이 당연한 적은 없었다.

내게는 친구들이 있고, 동복의 형이 있고, 동갑내기 여동생이 있었다.

운명은 나를 왕좌로 이끌었고 나는 한동안 혼자라는 것이 끔찍하게 외로웠다.

친구를 붙잡아 보고 이복의 형을 찾고 여동생에게 정사를 의논해도 국왕의 자리는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내게 충성했지만, 내가 국왕이라는 이유만으로 복종해야 했고 그래서 숨겨야 할 것들이 많아진 사람들이었다.

나는 천천히 그 사실을 깨달았고, 그 이후 빠르게 혼자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외로움은 이제 내 인생의 당연함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혼자 찾아도 괜찮았다.

그녀를 아끼는 사람들은 원래 많았다. 동료들과 함께 낄낄거리며 술을 마시고 있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았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주위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당연한 평범한 삶. 만일 그녀가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갔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나는 차마 그녀에게 내 곁에 있어 달라는 부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이제 혼자가 되었다면.

때마침 내가 중립 귀족 세력의 딸과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나는 카이든에게 이제는 결혼할 때가 되었다면서 중립 귀족가의 여식 몇 명을 뽑아 뒷조사를 해 오라고 시켰다. 그 몇 명 안에는 이베카가 있었고, 카이든은 어쩔 수 없이 내게 빽빽한 보고서를 가져와 주었다.

에셀번 백작가의 천덕꾸러기 셋째 딸. 4년 전 수사국 입사, 최근 법무국 전입, 현재 외교국 소속이었던 이아크 텔시와 약혼 중.

“이아크 텔시…… 백작가와는 격이 좀 떨어지는 상대인데.”

“……아무래도 사교계에서 입지가 없는데다가, 출생 관련 추문이 있어서 좋은 귀족가에 가기는 어려울 겁니다.”

카이든은 내키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딱딱하게 대답했다. 제 아무리 그녀를 내게 숨기려고 애를 써 봤자, 국혼에 관계된 일이니 입을 다물 수는 있어도 거짓을 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입 이후 3일 만에 한 약혼이군.”

“뭐…… 중앙 귀족가가 다 그렇듯이, 정략혼이죠.”

정략혼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떠올려 봤을 때, 그녀는 아마 거부하지 않고 아버지의 명을 따라 이 여러모로 부족한 남자와 결혼할 가능성이 높았다.

약혼이 성사되자마자 이아크는 외교국을 그만두었다. 소문이 좋지 않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급 귀족의 딸과 결혼하는 남자의 목적은 뻔했다. 그리고 절대 산하기관을 그만두지 않겠다며 다부지게 말하던 그녀와 잘 맞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냥…… 정략혼을 하고, 귀족 사회에서 에셀번의 이름을 단 채 식물처럼 사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안리크가 알고 있는 사실은, 나 역시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끝내 단검을 던지지 못하고 덜덜 떨던 연무장에서의 그녀 모습을 생각하면 마음 깊숙한 곳이 죄어 오듯 아팠다. 아마 사냥터에서 정확하게 날아가던 단검 실력 역시 내게는 인상 깊어서였을 것이다.

그렇게 싫어하던 삶으로 돌아갈 만큼,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이 끔찍했나.

-4-

법무국으로 그녀를 보러 갔다. 그녀는 제복을 입은 채 배경처럼 사람들 속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나는 그냥,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다.

“초면에 실례합니다. 많이 놀라셨을 텐데.”

당황해 마지않는 그녀를 이끌고 정원으로 나섰다. 그녀는 온몸으로 불행하다는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차분하고, 조용하면서도 이미 무언가를 포기했다는 그런 분위기. 될 대로 되라는 듯이 삶을 부유하고 있는 그런 얼굴.

“괜찮습니다.”

그게 그녀가 내게 한 첫 번째 말이었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분명, 눈앞의 사람은 다른데 그녀를 언제나 떠올리던 내 감각이 반응하고 있었다.

이럴 때 어떤 표정을 해야 할지 몰랐고, 그래서 나는 남들을 향해 기계적으로 짓는 미소를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가장 신경 쓰고 있던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약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약혼자라며 그가 있었고…… 아직은 잘 모르는 사이입니다.”

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애써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불안감이 툭, 하고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만일 약혼자가 좋다고, 얼른 결혼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면 씁쓸하게 돌아설 생각에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약혼에 대해 묻기까지 얼마나 바짝 긴장하고 있었는지, 얼마나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으로 여기에 왔는지 그녀는 전혀 모를 것이다.

“아무하고나 결혼해도 괜찮다는 말로 들리는데.”

언젠가 그녀는 사랑하지 않아도 몸을 섞을 수 있다는 심드렁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직도 남자는 그녀에게 그 정도의 의미밖에 안 되는지. 내 말에 그녀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귀족가에서 태어났으니 집안에서 정해 준 혼처와 맺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대학을 거쳐 산하기관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면 불만이 있을 법도 한데.”

“귀족이어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녀였다.

짧은 대화로, 이미 감각적으로 그녀와 동일 인물임을 짐작한 나는 완전히 확신을 가졌다.

이 일관적인 생각, 체념 어린 어조, 스스로 씁쓸해 하는 신념. 내게 귀족의 정략혼을 말했을 때와 완전히 똑같은 분위기였다.

“주어진 탄생과 운명에 의무를 다해야죠.”

그녀의 보랏빛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었다. 드디어 다시 찾은 나의 사랑이었다.

그냥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걸 알지만, 이 순간을 위해 그동안 살아 왔고 또 앞으로도 살아 갈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가 함께 손을 잡고 걸었던 아메니티의 거리가 얼마나 눈부셨는지, 다니엘이라고 불러 주던 그 어색한 목소리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오후의 편안한 티타임을 즐기며 나누었던 수많은 대화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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