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가만히 왕관만 쓰고 있어도 잘 굴러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고 아메탄은 제국에 비해 너무 힘이 없었다. 나는 두 형들이 극단적으로 갈라놓은 귀족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느라 지나치게 바빴다. 잘 할 수 있었으나 극도로 피로하고 지치는 일이었다.
‘넌 왕이고, 이제 그 누구에게도 몰랐다는 핑계를 대면 안 돼.’
루벤이 내게 했던 조언이었다.
잠시라도 정신을 놓았다가는 파국으로 닥칠 것이 뻔한 국제 정세였다. 심지어 아메탄 내부의 균열을 외국에서 조장하고 있는 것 같아 골치가 아팠다. 평생을 이렇게 조마조마해 하면서 온갖 변수를 파악하며 신중하게 살 생각을 하니 남은 인생이 하나도 기대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이젠 소소한 행복조차도 평생 내 것이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때 그녀를 만났다.
“이제…… 괜찮으세요? 혼자라는 거.”
탄생부터 왕위까지 모두 다 남이 만들어 준 길을 지나치게 잘 걷기만 하던 삶이었는데.
“다니엘은 신중하시니까 뭐든 잘 하실 거고, 결국엔 많은 사람들이 응원해 줄 거고, 그래서 행복해지실 거예요.”
내 인생이 나조차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날뛰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고마워.”
“……뭐가요?”
“가장 못나고, 가장 힘들고, 가장 혼자라고 느껴질 때에 함께 있어 줘서.”
그 때 살며시 손에 얽혀 왔던 체온을 잊을 수가 없었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그녀를 알고 싶었다. 궁금한 것이 너무나 많아 그녀를 곁에 두고 한없이 이것저것 묻고 싶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므로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 거리감이 서러울 정도였다. 그런 느낌은 어머니에게도, 친구들에게도, 형제들에게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정말로 간절한 것이 생겼다.
남이 내게 바라는 길이 아니라, 어떻게든 내가 만들고 싶은 길이 생겼다.
남들이 원하지 않아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길.
리한과 이단 때문에 한차례 격변기를 맞은 아메탄처럼, 그때의 나도 아예 새로운 국면의 삶에 들어선 셈이었다.
아마 내 인생은 그 때부터 시작이었을 것이다.
-1-
“행방을 모릅니다. 아예 산하기관을 나갔거든요.”
그녀는 어디에 있느냐 물으니, 내 앞에서 카이든은 짧게 대답했다.
“기억을 지우고 아예 아메니티를 벗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본디 자유로운 삶을 좋아하셨던 분이라.”
그녀를 안고 또 안은 지 아직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오늘 부르면 올 줄 알았는데 돌아온 대답은 ‘기억을 지우고 산하기관을 그만두었다’라는 말도 안 되는 대답이었다. 물론 그녀가 내 앞에서 앞으로의 행보를 구구절절 말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 줄은 몰랐다.
너는 어느 날 아무렇지도 않게 갑자기 내 인생을 헤집어 놓고, 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 버리는구나.
사랑한다는 말로 한 사람의 삶을 뒤흔들어 놓고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모두 지워 버린 채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 앞에서 벌벌 떨면서 부디 곁에만 있어 달라고 빌었던 내 모든 말들은 덩그러니 버려졌다. 그 일방적인 감정의 크기 차이에 나는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애정은 관성, 순정은 자기기만, 욕정은 환상.’
그녀가 야무지게 했던 말이 기억났다. 그녀에게는 이 모든 것이 쉬워서, 그래서 농담으로라도 왕비 자리에 앉겠다는 얘기 한마디 하지 않고 이렇게 사라져 버렸을까. 그에게 사랑을 말하고 나서 단번에 뒤돌아서 편지 한 장 없이 떠나 버릴 정도로.
나는 카이든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수사국 직원이었고, 직원을 보호하기 위한 수사국의 말은 믿을 수 없다. 카이든의 성의 없는 대답 역시 나를 감쪽같이 속이기 위해 준비한 변명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잊고 포기하라는 뜻에 가까웠다.
하지만 어차피 수사국 직원들이 저렇게 나올 때는 어떻게 해도 진실을 알 수 없다는 걸 내가 제일 잘 알았다.
수사국 직원은 아메탄과 국왕에게 충성하지만, 그들만의 성역은 무조건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성역 안에 내가 찾는 ‘이브 진’이 있었다. 내가 수사국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고 난동을 피워도 그들은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아, 그래.”
괜한 입씨름을 하는 것보다, 나는 일단 물러나는 척하면서 하나라도 정보를 얻는 방향으로 재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이제 그녀에 대해서는 수사국과 내가 대립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든 그녀를 찾으려는 나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떻게든 숨기려는 수사국. 다만 내가 의아한 것은 ‘그들이 왜 그녀를 내게서 숨기고 싶어하는가’였다.
설마 내가 사라진 그녀에게 해를 끼치거나, 억지로 옆에 둘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당연히 그녀의 모든 의사를 존중해 줄 생각이었다. 다만 나를 사랑한다고 했던 그녀에게, 발밑을 기고 울면서 애원해서라도 함께하자고 설득할 의향은 충분히 있었다. 그조차도 수사국이 막을 권리는 없었다.
이브가 설마 내가 무서워 자신을 숨겨 달라고 했나. 만일 그렇다면 왜 바로 어제 내게 안기며 사랑한다 속삭였을까. 그 모든 이유를 묻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녀를 찾아야 했다.
“그럼 찾아야지. 찾아.”
“……예.”
“왕명이야. 무조건 찾아내서 내 앞에 데려와.”
“……알겠습니다.”
낮게 대답하고 카이든이 나갔다. 나는 턱을 괴고 한참 동안이나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카이든은, 수사국이 그녀의 행방을 알려주지 않겠다는 뜻을 내게 전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찾아 낼 것이다.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사랑한다며 몸까지 섞고 나서, 그 다음 날 갑자기 증발해 버린 그녀가 괘씸하고 원망스러웠다. 아무리 기억이 없더라도 그녀를 앞에 두고, 그 다음의 일은 그때 생각할 것이다.
“대체 어떻게 감당을 하려고…… 이런 짓을 벌여, 이브.”
나는 아주 오랜만에 혼잣말을 했다.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심장이 저릿해 왔다. 그녀는 나를 버리고 떠났다. 함께했던 수많은 기억들도 모두 지워 버렸다. 그녀가 이토록 내게 잔인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우면서도, 이브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는 수사국에서 쓸모가 없다는 사실이,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했을 것이다. 수사국이라는 조직 전체에 이렇게 질투심이 들끓는 것은 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내가 조금도 망가지지 않은 것은 그녀를 찾아내겠다는 의지가 확고했기 때문이었다.
“기억을 지우면, 내가 비밀과 거짓말을 총동원해서 어떻게든 왕비로 만든다니까…… 내가 그럴 수 있는 인간인 걸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수사국이 파악하지 못하는 사실이 있었다. 수많은 대화와 티타임의 문답으로 인해 나는 생각보다 그녀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다. 아무리 수사국이 거의 모든 일을 다 파악하고 있다고 해도, 그녀와 나의 수많은 대화 내용까지 모두 알고 있을 리 없었다.
그녀가 스스로 말하고 잊어버린 것까지 나는 모조리 기억했다. 그녀의 행방을 수사국의 도움 없이 대충 추론할 수 있을 정도로.
‘전 산하기관에 들어와서 너무 좋아졌거든요. 아마 제 스스로 성취해 낸 최초의 인정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산하기관은 절대 나가지 않을 만큼 저는 제가 좋아요.’
그녀가 산하기관을 나갈 리 없었다.
나는 그녀의 일은 카이든에게 완전히 일임한 척을 하며, 한 달 가까이를 기다렸다.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밤에는 혹시라도 그녀를 영원히 못 찾을까 봐 불안해서 잠조차 잘 수 없었지만 평온을 가장해야만 했다.
괜히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녀서, 수사국에서 더 그녀를 보호하겠다고 나서면 안 된다.
당장이라도 모든 곳을 뒤집어엎어 그녀를 보고 싶다는 충동을 누르고, 수사국도 새로운 일에 바빠질 무렵이었다.
참을 만큼 참았던 어느 날,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종을 울렸다. 수사국처럼 치밀하거나 유능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내게 무조건 충성할 수밖에 없는 시종이 즉시 다가왔다.
“산하기관 전입 명단을 가장 최근 것까지 가져와.”
-2-
원래 산하기관 간의 수평 이동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두 명이나 있을까 싶었던 전입 명단에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거의 수사국에서 나간 사람들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결재를 할 때 옛날부터 받아 두었던 신청자를 한꺼번에 발령 냈다고 카이든이 대답하던 것이 기억났다. 이제 와서 다시 보니 혹시 몰라 이런 식으로 감춘 의도가 눈에 훤히 보였다. 당연히 ‘이브 진’의 이름은 없었다.
나는 그 명단 중 남자들을 제외하고, 여자들만 추려 냈다. 수사국 4년 차라면 나보다 나이가 많아야 했지만 딱 맞는 나이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당연히 정상 졸업이라고 생각해서 나이를 물어본 적이 없었다.
중학교나 고등학교의 월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예상한 나이보다 어린 사람들을 추리자 모두 7명이었다. 그 중 유부녀를 제외하니 4명.
2명은 정보국으로 갔고, 1명은 의료국, 1명은 법무국이었다.
‘법무국은 워낙에 인원이 작아서 TO조차 없는걸요. 그래도 하면 잘 할 것 같긴 해요. 제가 본디 인간 소외에 관심이 많아서. 생각해 보니까 진짜 괜찮은 것 같아요. 뭐, 행정국이나 약제국 같은 부서보다 훨씬 흥미롭네요.’
한때 그녀에게 성적이 안 좋았다면 수사국이 아닌 어디에 지원했을 거냐는 질문을 했던 적이 있었다. 사실 그녀가 성적이 나빠 수사국만 안 들어갔어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수사국 출신 왕비는 여러모로 넘어야 할 장애물이 많으니까. 그때, 유일하게 긍정적인 답을 들었던 곳이 법무국이었다.
나는 홀린 듯 법무국으로 전입한 ‘이베카 데 에셀번’이라는 이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흑백 사진 속 정면을 노려보고 있는 짙은 머리 색깔의 여자는 아무래도 낯선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에셀번 백작가의 여식이…… 산하기관에 있었다고? 그것도 수사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