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알겠습니다. 그럼 나는 이 일의 배후부터 캐 보도록 하지요. 그리고 혹시 몸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바로 의료국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 의료국 사람에게 레이나부터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베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은 끝까지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결국 이베카의 흔들림 없는 표정에 뒤를 돌아서고 말았다. 의식을 잃은 자객을 호위 무사 하나가 들쳐 안은 채, 그들은 갑작스럽게 왔던 것처럼 또 밀물처럼 빠져 나갔다.
나가기 전 마지막까지 경고하듯 다니엘은 시드와 레이나를 한 번 노려보았다. 그가 사라진 이후, 이베카는 천천히 레이나에게 다가가 붕대를 더 단단히 감아 주었다.
“수사국 정말 이상하네요.”
자객이 달려드는 순간 그대로 앞을 막아서는 레이나의 움직임에 망설임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베카는 문득 코끝이 찡해졌다.
“1차 습격을 할 땐 언제고, 이렇게 또 몸을 사리지 않고서 구해 주다니.”
“다 왕비님을 위한 거였어요. 말씀 드렸잖아요.”
상당히 아플 텐데,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은 채 레이나는 이베카의 눈만 가만히 바라보았다.
“……네?”
“저희는 왕비님의 안전에 한해서는 전하도 믿지 못해요. 분명 여러 위험에 처하실 텐데 더 많은 경계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뿐이에요. 수사국 직원들이 붙어서 지키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손 놓고 지켜보고 있느니, 본격적인 습격이 있기 전에 일을 꾸며서 경계를 강화시킨 거죠.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독살 음모가 있었잖아요. 1차 습격으로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기 망정이지…….”
이베카는 멍한 표정이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왜…… 왜 저를 지켜요? 제가 위험하다 판단했다면 전하께 말씀드리면 호위를 강화해 주셨을 거예요. 굳이 수사국이 이렇게 나설 이유가…….”
그 말에 대답한 사람은 시드였다.
“왕비님께서는 이유를 이미 알고 계십니다.”
“……네?”
“하나. 동료를 소중히 여기며 죽음 앞에서도 서로 지키고 신뢰한다. 외우고 계시잖아요.”
이베카는 머리가 쨍하니 울리는 것 같아 손을 벌벌 떨었다.
‘왕비님이 수사국에 몸담았던 것은, 저희도 절대 잊지 않습니다.’
어제 이상한 맥락이라고 생각했던, 그 깜짝 놀랄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겹쳐졌다.
“왕비라는 지위 때문에 지킨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저희는 왕비님이 수사국의 동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직접 나서서 지키기로 결정한 겁니다.”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수사국의 사람들이 자신을 아직도 동료라고 생각하며, 조직의 일원이라고 인정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쳐지는 것에 익숙한 그녀는 항상 자신이 수사국에게서 쫓겨났다거나, 아니면 버티지 못하고 도망쳤다는 생각만을 해 온 것이다.
레이나는 왜 다른 것을 못 보냐고 그녀에게 화를 냈다.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수사국이 자신을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부터 세울 수 없는 가설이었다. 누군가 뒤에서 자신을 위하고 있다는 건 그녀에게 상상할 수 있는 범위의 일이 아니었다.
“어제, 왕비님은 아니지만 레이나는 아직 제 동료라고 하셨죠. 실언이십니다. 왕비님 역시 제 동료입니다.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하, 하지만 수사국에서는 대헌법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아메탄의 국왕과 왕비가 정한 일입니다. 저희의 존재 목적은 권력이 아니라 왕국의 안녕입니다. 당연히 따를 예정입니다.”
충격을 받은 이베카의 보랏빛 눈을 바라보며 레이나가 부루퉁하게 칭얼거리듯 덧붙였다.
“왕비님이 저를 죽이지 못하셨듯이, 저희도 절대로 왕비님을 해치지 못해요.”
“하지만 나는 이제 수사국 소속도 아니고…… 대체 왜…….”
“함께한 기억들이 있잖아요. 왕비님께는 없겠지만. 저희는 그 일방적인 기억만으로도 왕비님에게 목숨을 바칠 수도 있어요.”
울컥,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들이 북받치는 느낌이었다. 이런 배려와 호의를 받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의리는 겪어 본 적이 없어서, 그저 안 좋은 쪽으로만 의심을 했었다.
“제가 거기서…… 유능한 직원이었나요?”
“당연하죠. 지금도 암살에 있어서는 저희보다 감이 더 좋으시잖아요.”
“그럼 나…… 좋은, 좋은 동료였어요?”
“아뇨.”
레이나가 눈물을 슥 닦으며 대답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제 마음을 정말 아프게 한 동료였어요.”
“…….”
“진짜 보기만 해도 안쓰럽고…… 그냥, 걱정하지 말라고, 괜찮다고 계속 말해 주고 싶은 그런…….”
“레이나.”
이베카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잊을 수 없는 어조, 기억에 선명하게 남은 상냥한 말투.
“치료만 하면 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괜찮다고…….”
느릿하게, 천천히 이베카는 가만히 말했다. 그 말에 투정을 부리듯 되는 대로 내뱉던 레이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1차 습격 당시에, 나를 받아 낸 그 여자. 레이나 맞죠?”
“아, 아니…….”
“분명히 분홍색 머리에 생김새도 달랐는데…… 레이나와 똑같은 초록색 눈동자…… 키도 체형도 비슷했고…… 무엇보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레이나라고 부른 것 같은데…….”
“왕비님, 아니에요.”
“그 여자에 대해 물었을 때 그런 사람 모른다고 했잖아요. 그게 레이나가 내게 한 최초의 거짓말이잖아요.”
“잠시만요, 왕비님. 아니라니까요.”
“아까 내가 칼을 맞은 정확한 부위도 짚어 내고, 내 근육 상태도 기억하고, 마치 그 자리에 직접 있어서 나를 받아 낸 사람처럼.”
시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결국 레이나가 사고를 칠 것 같았다는 책망의 눈빛을 보내며 그가 침묵을 지켰다. 레이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딴청을 피웠고, 이베카는 그 찰나의 당황함 속에서 정확하게 짚어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소문이 있었어요.”
“…….”
“수사국 사람들은 자유자재로 외양을 바꿀 수 있다고. 물론 그냥 다들 하는 말들이었죠. 증거 같은 건 없으니까.”
“…….”
“아마 눈 색깔이나 체형은…… 바꾸기 어려웠나 보네요?”
이베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가 혼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매일같이 궁에 부르던 여자라 난 잘 알고 있거든. 너만 한 작은 키에, 너처럼 보랏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여자였어. 네 눈을 바라보며 그 여자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가슴 속에 아프게 새기고 있던 안리크의 말이 떠올랐다.
‘그나마도 변장일 수도 있겠지요. 저는 잘 모르겠지만, 수사국에서는 외형을 바꿀 수 있다는 말도 도니까요. 어쨌든 제가 드레스를 빌려 입을 수 있을 정도로 키가 작은 편이었습니다. 금발에…… 눈은 보랏빛이었고요.’
그녀를 깊은 좌절에 곤두박질치게 한 유진 유니트의 무심한 말 역시.
이베카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바라보며, 시드와 레이나가 서로 난감하다는 듯이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더 이상 그들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은 채,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비밀을 생각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이베카는 붕대를 섬세하게 한 번 더 감아 주며 중얼거렸다.
“아직 저를 동료로 생각해 줘서요. 제가 이 모양 이 꼴인데도, 어쩌면 수사국의 권리를 침해하는 사람인데도 지켜 주겠다고 해서…… 고마워요.”
“이 모양 이 꼴이라뇨.”
레이나가 코를 훌쩍거렸다.
“왕비님이 어떤 모습이든, 어떤 사람이든, 저희는 왕비님을 아끼고 사랑해요.”
그때, 의료국 직원이 도착하여 레이나의 상처를 본격적으로 봐 주고 그들이 마신 차는 단순한 신체 반응 능력을 느리게 하는 것으로, 한두 시간만 지나면 정상이 된다는 처방을 내렸다.
시드, 레이나와 함께 나란히 의료국 직원의 진료를 받는 동안 그녀는 묵직한 감동에 가슴이 저릿해졌다. 아무것도 모르고 슬퍼할 동안 자신을 지켜 주는 조직이 있었다. 위험을 감지했을 때 호위무사조차 뒤로하고 미친 듯이 달려와 주는 남편이 있었다.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따뜻함으로, 또 다른 진실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 같았다.
* * *
언제나 그랬듯이 다정하면서도 농밀한 정사 후, 다니엘은 품에 안겨 있는 이베카의 머리카락을 쓸며 다정하게 말을 꺼냈다.
“배후는 잘 잡아냈습니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 왕비는 걱정 마세요.”
다니엘은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잔혹한 처사까지는 그녀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못마땅함을 숨기지 않으며 덧붙였다.
“수사국 직원들…… 1차 습격이 사실이라면 나는 좀 불안한데. 번거롭더라도, 계속 나와 붙어 있으면 어떨까요? 늘 눈앞에 두고 싶어서. 오늘 그 꼴을 직접 보고 나니 더욱 더 불안해 미칠 것 같아.”
“전하.”
이베카는 꿈틀거리며 살짝 그의 품에서 벗어난 뒤,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소원이 있어요.”
이베카의 갑작스러운 말에 다니엘은 아주 조금 놀랐다. 그래도 그녀가 먼저 무언가를 원한다고 말해 주는 것이 기뻐서, 그는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쇄골에 깊게 입 맞추고 싱긋 웃었다.
“뭐든 말해 봐요.”
“이브 진이 누구예요? 대답해 주세요.”
그녀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이름이었다. 다니엘은 남 앞에서 크게 당황한 적이 없었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잠시 머뭇거렸다.
아무리 상황을 복기해 봐도 그녀가 그에게서 이브 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그가 늘 쓰는 펜뿐이었다. 하지만 이니셜만 새겨져 있을 뿐이고, 그런 식의 선물이나 상납은 많았기 때문에 그 펜에서 무언가 추론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은 ‘문 상단의 몰락’ 때문에 이 펜을 쓰는 것처럼 가장한 뒤 그녀에게 선물까지 하지 않았는가.
국왕 앞에서도 수사국은 ‘이브 진’의 존재를 철저하게 숨기고 있었다. 수사국에서 이베카에게 ‘이브 진’의 풀 네임을 언급했을 리 없었다. 그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고 있지 않았기에 다니엘의 손이 살짝 떨렸다.
“아, 음…….”
“전하께서 그 여자분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예?”
“저는 그냥 이렇게, 예뻐해 주고 길들인 다음 살살 구슬려 가면서 이용하는 대상이고요.”
다니엘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황망해졌다.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가까스로 내뱉은 질문에, 이베카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결혼 초반부터요.”